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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성수  조회 : 1486         등록일 : 12/25/2009  13:21

꼭 숙지하셔야 할 성령 강림의 문제 수정 |  삭제    



지난 주 수요 예배 설교와 그 지난 주 수요 예배 설교, 그리고 사도신경 17번과 연계해서 공부를 해 보세요.
성경 전체가 눈에 들어 오실 것입니다.


사도신경18

성령을 믿사오며
(행1:4-5)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지난주까지 성자 예수님에 관한 신앙고백을 다 공부했고 이번 주에는 드디어 성령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수년간에 걸쳐 제가 여러 차례 성령 론을 설교했기 때문에 여러분께서는 이미 성령 하나님에 관해서는 잘 정리를 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성령 하나님을 곡해하고 있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아서 오늘 완전하게 정리를 해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성령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관한 확인 작업부터 시작합니다.
(행4:3-4)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기 소유를 팔아 얼마를 감추어 두고 그게 전부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너희들은 성령을 속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뒤에서는 그 성령을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나 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 그리고 초대교회 모두가 성령을 하나님으로 배우고, 인정했으며, 고백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성령을 하나님의 영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롬8:9)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사도 바울은 성령을 가리켜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하고,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과 성령하나님이 영원하신 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을 향해 오라, 가라 명령을 하거나, 성령은 마치 인격도 없는 무슨 능력이나 현상에 불과한 것처럼 홀대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성령은 왜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신 것이지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을 완전하게 충족시킨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 사건 바로 뒤에, 우리 택한 백성들을 천국으로 몽땅 이동시켜도 되는 것 아닙니까? 도대체 왜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시고, 성령님은 우리에게로 내려오신 것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구원받은 택한 백성들의 이성과 인격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의 실상을 올바로 이해시키고, 설득시키시길 원하시기 때문에 성령을 우리의 인생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 성도가 하나님 나라에서 이성과 인격을 갖고 살게 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성도의 구원의 현실을 그 뿌리부터 결론까지, 그리고 그 과정까지 올바로 이해를 하여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을 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는 모반과 반역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시 내려오신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쯤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로 성령하나님은 우리 택한 백성들을 성부하나님의 일에 동참시켜 당신의 나라를 완성하시는 데에 동역자로 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 강림의 첫 번째 이유인 진리에로의 이끄심과 두 번째 이유인 하나님의 일로의 부르심은 동시에 일어나는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곧 바로 승천하지 않으시고 무려 40일 간이나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게 무엇이지요?
(행1:3)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주님께서 곧바로 승천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열심히 가르치셨던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제 제자들을 통해 당신이 하시던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의 일에 관해서는 예수님께서 이미 제자들에게 확인시켜 주신 적이 있습니다.
(요6:28~29)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보시다시피 하나님 나라의 일은 그 나라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예수님만을 믿는 자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일을 하다가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 믿었고 그 분이 시키시는 일에 절대 순종하시다가 가셨습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으로 그 그릇을 채워내는 것. 그리고 그렇게 도덕적 피조물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만을 믿는 자로 완성이 되어져 가는 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도 공생애 직전에 성령이 임하셨던 것이고, 성도 안으로도 성령이 강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일에 관해 제자들을 가르치신 후 어떤 분부를 하시는지 보세요.
(행1:4-5)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40일간 하나님의 일에 관해 설명을 하신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성령 강림을 기다리라고 하신 후 승천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너희가 예루살렘에 머물며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즉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절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 세례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 다시 말해 하나님과 예수님만을 우리의 행복의 근원으로 온전히 믿게 되는 일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령은 무슨 능력이나 권능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신비한 체험을 하게 해 준다거나, 방언이나 예언, 신유 등의 은사를 체험하게 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를 부인하고 세상의 힘을 기각당하면서 오로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은혜만을 꼭 붙들고 믿는 자로 지어져 가는 길에 도움을 주러 오시는 분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의해 탄생한 교회들의 삶속에 예수의 지상에서의 삶을 그대로 재현시키시기 위해 성령은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을 보혜사라 부르는 것입니다.
(요14:16~18)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6절의 ‘또 다른’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알로스’는 ‘구별이 되는 똑같은 것, 똑같은 다른 것’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입니다. 분명 구별이 되는데 하나인 것이 ‘알로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성령님은 구별이 되는 한 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보혜사이신 것이고, 성령님도 보혜사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첫 번째 보혜사(파라클레토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어떻게 우리를 위로하시고 도우셨나요? 우리가 원하는 이 세상 것들을 풍성히 제공하고, 우리의 모든 소원을 다 이루어 주시는 것으로 우리를 도우셨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기대와 세상 적 소망을 무참하게 허무시고(눅24:21) 십자가를 지고 죽어 버리셨습니다. 그러니까 보혜사 예수님은 우리의 세상 적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와 악이 되셔서 죽으시는 것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역시 첫 번째 보혜사이신 예수의 일을 똑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예수님과 똑같은 보혜사(알로스)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그렇게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적으로, 역사적으로 죄와 악을 죽이는 일, 즉 자기부인의 일을 도우시러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18절을 보세요.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신다고 하셔놓고, 잠시 후에는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올 것이라고도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성령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맞는 것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오히려 우리 안에서 우리의 기대와 소원과 야망을 기각시키고 우리의 죄와 악을 죽이는 일을 하러 오신 것입니다.
(막16:19~20)
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 하시니라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나가서 두루 주를 전파하는 삶을 사는데, 주께서 ‘함께’ 역사하신다고 하시지요? 분명 제자들은 성령 세례를 받고 성령과 함께 일을 했는데 마가는 주가 함께 일을 하셨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그들의 삶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 삶과 자기부인의 일이 나타났다는 말인 것입니다. 주님의 지상 사역동안에 일어났던 그 순종의 삶과 십자가의 삶을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기필코 그들의 삶 속에서 만들어 내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성령은 그렇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완전히 다른 종류의 능력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처럼 순종하다가 죽는 자로 만드시는 능력으로 오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 말은 감옥에서 한 말이라 했지요? 능력을 받으니 감옥이, 감옥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수난을 받고 있는데 그게 견뎌지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성령의 능력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도 바울을 감옥에 쳐 넣는 것이 성령의 능력이며, 그에게 자고하지 않도록 육체의 가시를 주어 겸손의 자리로 끌어 내리는 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마28:18~20)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잘 보셔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전도나 선교에 힘쓰라는 명령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만유의 왕으로 등극을 하셨습니다. 그건 우리가 2주 전 설교 때 자세하게 공부를 했지요? 따라서 주님이 승천을 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주님의 왕권 회복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당신의 왕권, 즉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십니다. 능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십니다. 그 명령은 예수님의 승천 바로 직전에도 제자들에게 주어집니다.
(행1:8)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마태복음 28장의 지상 대 명령과 동일한 명령입니다. 다만 마태복음의 ‘모든 족속’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표현이 된 것일 뿐입니다. 이 두 명령을 종합하여 정리를 하면 이러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의 왕으로 등극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만유를 통치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만유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권능을 주시는데, 그 권능이 성령 강림으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으면 모든 족속 앞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세례를 주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고,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성도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그 명령 뒤에 붙이시고 계십니다. 내가 돕지 않으면 너희들은 절대 그 삶 못산다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이 성령으로 다시 오셔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니, 세례를 주고, 증인이 되는 게 뭐 그리 힘들어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성령으로 다시 오셔야 한다는 것인가요?

여러분, 우리도 세례를 받았지요? 누구에게 어떤 세례를 받은 것이지요? 목사에게?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걸 구원이라 합니다.
(막1:8)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세례 요한이 한 말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분은 우리에게 세례를 주시기 위해 당신이 먼저 세례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 예수님의 세례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눅12:50)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이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선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세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저주의 물에 빠져 죽고, 예수 안에서 다시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세례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신 것은, 세상에 나가서 모든 족속 앞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라는 말인 것입니다. 세례는 그렇게 주는 자의 선 세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아울러 세례를 주면서 세례를 받는 자들도 죽여 버리라는 말입니다. 물론 옛 사람의 죽음을 말합니다. 그 때 새 창조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를 주라는 것은 너희들이 먼저 죽고, 그 죽음으로 다른 이들을 세상 속에서 죽여 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세상 속에서 죽을 때, 모든 족속 앞에서 죽을 때, 땅 끝까지 가서 죽을 때,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이 지어져 가게 되는 것이고, 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자들의 옛 자아가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되는 새 창조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가 성도를 낳는 일인 것입니다. 그것을 전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도는 자기부인과 십자가가 선행되지 않고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창세기 때의 하나님 명령의 성취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초의 인간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해산의 고통을 더하셨습니다. 바로 그 명령이 성령에 의해 교회 안에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죄악 된 세상에서 교회를 낳는 자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자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 우리의 영적 자녀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은 죄에 대한 저주였으니까요. 그렇게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십자가와 자기부인의 삶으로, 다른 말로 해산의 삶으로 다른 성도를 낳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에게 자주 ‘내가 너를 낳았다’고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교회는 해산을 함으로 구원을 받는 다는 말도 했던 것이고요.(딤전2:15) 성령에 의해 창세기 1장 22절의 하나님의 명령이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모든 족속에게 세례를 주라는 말인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증인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어떤 사건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이 그 일에 대하여 낱낱이 증거 할 수 있을 때, 그를 증인으로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직접 본 자들처럼, 그 분의 삶을 자신의 삶과 입으로 증거 하는 자로 살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의 삶이 어떤 삶이었나요? 자신의 모든 힘과 능력을 다 비우고, 하나님으로 그 빈 그릇을 채워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완전한 자기부인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완전한 자기부인의 삶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 이 세상 어디에서도 다 일어나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게 되는 범위가 어떤 지역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에서든 그 삶을 살게 될 터이니 그 때 당황하지 말라는 말임과 동시에, 증인됨의 주도권 또한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어라’로 말씀하시지 않고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증인됨의 주도권도 예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삶이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삶이기에 권능의 성령이 우리에게 보혜사로 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무력하고 불가능한 자로 폭로하심으로 결국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는 자로 만들러 오시는 것이지, 우리의 능력이 되어 신비한 것을 체험케 해 주시거나, 대단한 은사를 주어 상대적, 비교 우위적 우월감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를 애초의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완전히 비워내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성령 세례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하나님 절대의존자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가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도 역시 성령으로 잉태되지요? 그리고 성령 세례를 받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부터 예수님의 삶이 어떻게 전개가 되던가요? 마치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마지막 장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당신의 모든 계획과 뜻과 희망사항을 전부 기각당한 채, 누군가가 밖에서 띠를 띠우고, 그 분을 이끌어 가는, 그런 자기부인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는 급기야 죽기까지 순종을 하심으로 하나님 절대의존자의 완성지점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으로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수 앞에서도 예수님의 삶을 보여주는 자로 지어져 가게 됩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 즉 유대인들이 개 취급도 안 했던 사마리아와, 당시 유대인들을 식민 통치했던 원수, 땅 끝의 로마 사람들에게 까지도 예수의 증인의 삶을 보여주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 이야기의 배경을 보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승천하실 예수님 앞에서 ‘이스라엘을 회복할 때가 지금입니까?’라고 물었지요? 그 말은 ‘이제 로마는 엎어버리시고 우리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해 주세요.’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이스라엘이 회복이 되려면 로마가 무너져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은 아버지의 소관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고, 너희는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땅 끝의 로마를 뒤집어엎는 자들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는 증인의 삶을 사는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에 무력 대항을 하지 않았습니다. 카타콤에서, 사자 굴에서, 기름 가마 속에서 그냥 십자가를 져 버린 것입니다. 그랬더니 로마가 기독교에게 무너졌습니다.
그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적 메시지였습니다. 여러분, 죄와 악은 내가 그 죄와 악에 맞아 죽을 때 소멸이 됩니다. 그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악이 되셔서 죽으셨다는 것은 다 아시지요?(고후5:21) 예수님이 인간 세상의 죄와 악에 의해 십자가에서 살해를 당하셨습니다. CS Lewis의 표현을 빌리자면, 십자가는 예수님의 심장 안으로, 이 세상의 죄와 악의 화살이 깊숙이 뚫고 들어와 버린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의 죄와 악이 십자가에 달리신 당신께로 쏟아질 때, 마징가 제트의 레이저 빔 같은 능력으로 그 죄와 악에 응전을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죄와 악을 품어 안고 죽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죄와 악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버렸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멸망의 자식 유다와 같은 ‘자아 숭배와 이기’라는 죄와 악에 젖어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죄와 악은 자기 이외의 다른 이들을 모두 경쟁자와 원수로 간주합니다. 그러한 죄와 악의 공격이 시기, 질투, 분열, 다툼, 험담, 모함, 전쟁 등의 현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성도는 거기에 응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악의 원흉인 땅 끝을 품어 안고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아울러 내 속에 잔존하고 있는 죄와 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속에서도 내가 원하던 원치 않던 수시로 죄와 악이 드러납니다. 내 속의 죄가 나를 공격한단 말입니다. 그 때 우리가 그 죄와 악에 대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죄와 악을 이겨내어 하나님 앞에 훌륭한 신앙인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 올바른 반응일까요? 그게 내 힘으로 죄와 악에 대해 응전을 하는 일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와 악이 폭로 되면 우리는 우리의 무력함과 불가능함과 티끌 됨을 그냥 인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이렇게 살다가 죽을 사람입니다.’인정하고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순간 나에 대한 신뢰를 하나하나 놓아버리게 됩니다. 그게 죄와 악을 품고 죽는 것입니다. 내 능력을 발휘하여 하나님 마음에 드는 자식이 되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예수처럼 하나님 앞에서 그저 작은 티끌이 되어 죽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성령을 받았다는 가장 큰 증거는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하고, 큰 능력을 발휘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바보가 되어가고, 점점 약한 자가 되어가고, 점점 겸손한 자가 되어가고, 점점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을 잃어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걸 겨자씨 같은 믿음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겨자씨 같은 삶을 가능하게 도와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그러한 영적 교만이 오순절 파나 신비주의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개혁주의 진영에서도 똑같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파는 신비적인 체험이나 현상 등으로 영적 교만을 드러내는 반면,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올바른 성경 지식으로 영적 교만을 드러냅니다. 그건 둘 다 패역한 일입니다. 우리는 땅 끝까지 가서 십자가지신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지 어떤 이유로도 다른 이들의 우위에 서서 교만을 떨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상대방 앞에서 죽어서 작은 겨자씨가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하여튼 내가 제일 작은 자여야 하고, 내가 제일 죄인이어야 합니다. 그게 증인입니다. 그게 세례를 주는 일입니다.

그러한 복음의 현실이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열 두 사도를 채우는 사건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왜 꼭 열 두 사도여야 합니까? 그냥 열 한 명이서 열심히 하면 안 되나요? 예수님이 언제 열두 명 꼭 채워서 일 하라고 했나요?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아가 열 두 사도의 대열에 합류를 하는 사건은 아주 소중한 복음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사건인 것입니다.
우선 열둘이라는 숫자의 기원이 어디인지를 알아야지요? 열 두 지파, 열 두 사도는 야곱의 열 두 아들에서 기인한 숫자입니다. 야곱의 다른 이름은 이스라엘이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며 한시적으로, 설명용 교보재로 쓰이던 구약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가면 하나님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데 거기에 열두지파,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열둘은 하나님의 교회, 즉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지칭하는 숫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둘 중에 하나가 멸망의 자식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멸망의 자식인 유다와 다른 열한 제자들이 뭐가 다른 것입니까? 유다는 배신을 했다가 예수님의 무죄를 외치며 남자답게 장렬하게 자살을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요? 역시 모두 예수님을 배반하고, 그 분을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습니다.
따라서 멸망의 자식 유다는 나머지 열한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죄인들을 상징하는 자였습니다.
그 자가 십자가 앞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멸망의 자식인 죄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탄생하게 되는데, 바로 그러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탄생이, 맛디아의 선출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유다로 대표되는 옛 사람 열둘이 죽고, 맛디아로 대표되는 새로운 열둘이 하나님의 은혜로 탄생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22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열둘을 채워서 하고자 하는 일이 나옵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하기 위함’입니다. 그 어구를 좀 더 원어에 맞게 번역을 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함’입니다. 그러니까 유다로 대표되는 옛 사람 열둘은 절대 예수의 증인으로 살수가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멸망의 자식 유다 속에서 다 죽여 버리시고, 유다 대신에 예수의 증인으로 살 수 있는 어떤 자를 새롭게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증인의 삶은 성령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삶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 바로 직전에 새로운 열둘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성령이 부어짐으로 해서 교회가 진짜 새사람, 새 교회가 되어 예수의 증인으로의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에 의하면 멸망의 자식 유다는 ‘제 곳’으로 갔다고 하지요?(행1:25) 유다는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갔다는 말입니다. 그게 죄인입니다. 그 말은 성령을 받은 성도는 절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 수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모두 예수의 삶, 증인의 삶, 십자가의 삶으로, 밖에서 띠 띠운 채 끌려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다는 율법으로 상징되었던 구약의 열두 지파인 것이고, 맛디아는 성령으로, 은혜로 완성이 되는 신약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순절 성령의 오심은 우리 안의 유다를 죽이고, 새로운 맛디아로 탄생을 시켜, 예수의 증인으로 세우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무력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숙식을 같이 했던 열두 제자중 하나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멸망의 자식으로 스러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던 아담에게서 범죄가 나오고, 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던 이스라엘이 그러한 엄청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고도 광야에서 다 죽어야 했으며, 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던 열두 제자 가운데에서 배도가 나오게 하셨는지 이제 아시겠지요? 사도 바울에 의하면 마지막 심판 때에도 하나님의 교회에서 배도하던 이들이 먼저 나오고, 멸망의 자식이 죽은 뒤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된다고 하지요?(살후2:3) 하나님 나라는 그 어떤 종교적 열심이나 노력 등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완성이 된다는 것을 그렇게 성경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에 걸쳐서 반복하여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노력과 열심과 조건도 다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도,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것도 다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배도가 일어났단 말입니다. 성도는 성령에 의해서만 태어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첫 번째 제자 그룹의 대표인 유다대신, 새로운 은혜의 피조물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맛디아가 채워지는 이야기 속에 함의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사도 야고보가 순교했을 때에는 사도들이 굳이 열둘을 채우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장의 열둘을 채우는 사건은 복음의 모형으로 단 한번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대한 또 다른 예가 성령이 오시기 전 마가의 다락방에서 열심히 기도를 했던 120문도의 이야기입니다. 혹자들은 그러한 제자들의 기도의 행위를 들어서 제자들이 열심히 기도해서 성령이 임했다고 하며, 성령 세례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제자들이 기도해서 성령이 임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령은 바로 그 오순절 날 오시기로 이미 구약 때부터 예시가 되어있었습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 제자들이 기도를 한 사건은, 오히려 교회의 존재론 적 본질에 관한 명시인 것입니다. 교회는 그 어떤 종교 행위나, 그 어떤 열심으로도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자의 근거는 신자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부으시는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전에는 절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던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던 그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이전에 사기충천, 용기백배하여 그 다락방을 나섰다면 사도행전은 거기서 끝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오시기 전에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를 한 사건이나, 열 두 제자를 채우는 사건 등을 들어서, 그들이 성령이 오시기 전에 이미 교회로서의 모습을 보인 것이라거나, 아니라거나 그런 논쟁은 절대 무가치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성도는 이미 창세전에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의 구원의 시점이 문제가 됩니까? 성경은 성경의 유일한 독자인 교회에게 구원의 진리만을 가르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을 뿐입니다.
성도는 기도를 통하여 성령을 불러 내렸다가, 다시 내 보냈다가 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성도의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 저희들의 힘으로는 절대로 증인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라는 항복 선언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도이고 그들이 성령 받은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120명의 기도사건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하면서도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갇혀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령은 굳이 오순절 날 오셨어야 하는가? 출애굽기로 가보겠습니다.
(출19:1)
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후 삼월 첫째 날의 이야기입니다. 그때가 바로 유대월력으로 오순절 날입니다. 출애굽 이후 첫 번째 오순절입니다. 그 첫 번째 오순절 날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율법을 받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 시내산 아래에서는 금송아지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인간들이 인생과 역사의 중심에 자신을 올려놓고 하나님은 마치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능력이나 힘 정도로 생각하는 아담 적 죄의 본질이 낱낱이 폭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에게로 내려가 그들에게 던져짐으로 심판이 일어납니다.
(출32:27~28)
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율법이 죄에 닿자 삼천 명이 죽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모든 인간들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새 언약을 주십니다.
(렘31:31-33, 겔36:26-28)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 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 할지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이게 하나님의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이라고 하니까 옛 언약 이후에 나온 싱싱하고 새로운 언약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새 언약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있던 원래의 계획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새 언약, 즉 성령의 강림으로 인해서만 예수님의 증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율법, 옛 언약이 잠시 몽학선생으로 등장을 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새 언약의 현실이 사도행전의 오순절 날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신약의 오순절 날에도 심판이 일어납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데 불의 혀처럼 임하십니다. 불은 히브리 사람들에 의해 항상 심판을 상징하는 언어로 쓰이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이 혀처럼 갈라졌다고 합니다. 그건 그 성령의 불에 의해 성령 받은 자와, 성령 받지 못한 자, 즉 신자와 불신자가 갈라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 어떤 한 무리는 심판을 받게 되고 어떤 한 무리는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120 문도가 방언으로 말할 때, 어떤 이들은 그 말을 하나님의 큰일로 알아들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이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을 했습니다. 그렇게 성령에 의해 신자와 불신자가 갈리는 것입니다. 그게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 있는 이들은 세상이 심판을 당할 때 성도로 구별이 되어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새 언약에 의한 은혜의 새 영이 부어지게 되면, 똑같이 자기들의 세상 적 유익을 위해 예수를 때려죽인 죄인들이 도륙의 대상이 아닌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신약의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보세요.
(행2:41)
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
구약의 오순절에는 율법에 의해 삼천 명이 죽는데 여기서는 삼천 명이 살아나지요? 율법으로는, 다른 말로 인간의 행위나 조건에 의해서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의 앞에서 도륙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초에 당신의 은혜에 의해서만 당신의 백성들을 존재케 하고 살게 하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서만, 다른 말로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서 존재할 때에만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이 역사와 우주와 시간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순절 날 성령 강림과 함께 임했던 방언 사건은 도대체 무엇인가? 여러분이 확실하게 아셔야 할 것은 오순절 날 터진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이 아니라 외국어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시면 적어도 열다섯 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각기 자기네 나라나 자기네 지방의 말로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다른 나라 말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으면 무조건 방언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그런 무리들은 성경을 정말 무식하게 보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그 방언 사건은, 은혜의 성령이 오심으로 어떤 무리들에게서, 흩어졌던 언어가 하나로 통일이 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였던 언어가 최초로 흩어지게 된 사건은 다름 아닌 바벨탑 사건입니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여 하늘에 닿으려 했던 시도였습니다. 역시 아담의 죄의 복사판입니다. 그 일로 하나님은 인간들을 저주하셨습니다. 언어를 흩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언은 저주의 표징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흩어진 언어로 저주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에게 은혜의 성령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다시 하나로의 회복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피조물의 자리를 떠나 하나님의 자리에 오른 죄인들을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셔서 구원해 내시는 일, 그게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따라서 성령은 우리의 바벨탑을 계속 무너뜨리는 사역을 하시는 것입니다. 절대 여러분의 바벨탑 쌓기를 도와주지 않으신단 말입니다.

역사는 바로 그러한 새 창조를 목적으로 하여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오순절 날 임하신 은혜의 성령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탄생이 되는 은혜의 나라 이야기가 성경 전체의 주제인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의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이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의 모형이었던 것이며(그로부터 첫 창조가 시작되는 것이므로) 출애굽 홍해 사건에서 르와흐(바람, 성령)가 밤새도록 홍해를 갈라 12지파를 구원해 낸 사건도 바로 오순절 새 창조를 모형으로 보여주었던 것이고,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 날’을 기도했던 모세의 예언적 기도가 바로 그 이야기였던 것이고, 요엘서 2장의 ‘하나님의 신이 임하시면...’으로 시작되는 요엘의 예언도 바로 그 이야기인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서 떠났다가, 다시 새로운 성전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온 에스겔서의 사건 또한 오순절 사건의 모형으로 나타났던 것이고,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성령을 받으시고, 성령의 사람으로, 성령에게 이끌림을 받는 삶만을 살아내시다가 결국 완전한 순종의 절정,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삶이 바로 오순절 성령 사건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옛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새 성전을 세우리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인간의 노력과 지혜와 힘으로는 절대 예수의 증인의 삶, 자기부인의 삶을 살아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기인한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만 성도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완성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복음의 이야기가 오순절 날 성령의 강림으로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그게 성령 세례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세례는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second blessing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세례는 모든 구원 받은 성도들이 단 한번 받게 되는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순절 파의 주장처럼 오순절 이후에도 사마리아에서 에베소에서 고넬료의 집에서 성령이 눈에 보이게 임한 것을 예로 들어, 오순절 성령 강림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는 것은 얼토당토한 말인 것입니다. 그건 교회의 탄생을 가시적 사건으로 보여주었던 오순절 사건이 사마리아와 온 유대와 땅 끝에서도 정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증명하는 사건이었지, 오순절 이후에도 또 다른 성령 세례가 반복하여 주어진다는 그런 말은 아닌 것입니다.
잘 보시면 사마리아와 에베소와 고넬료의 집에서는 사도들의 기도가 선행하고 그 뒤에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전청소)과 온 유대와(니고데모와의 만남) 사마리아와(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 땅 끝까지(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이르러 하신 일을 사도들이 성령의 강림으로, 예수님과 함께 그 분의 사역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예수님의 말씀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에게 떨어진 명령이기도 한 것이며, 우리 교회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세 군데에서는 성령이 눈에 보이게 임하신 것이고, 그 가시적 성령 강림 사건 앞에 사도들의 기도가 선행이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성령 강림 사건이 실제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재현이 되었던 것처럼 지금도 그 일이 우리를 통하여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쉽습니다. 요한계시록 11장 8절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소돔에도 애굽에도 섰다는 표현을 하지요? 십자가는 2,000년 전 딱 한번 골고다에 섰지만, 그 십자가의 효력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동일하게 적용이 된다는 의미에서 요한이 그런 표현을 썼던 것처럼, 오순절 성령 강림도 마가의 다락방에서 한 번에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의미했던, 성령에 의한 교회의 구원이 전 역사를 아우르며 동일하게 적용이 되는 것이 성령 세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에도 오순절 성령 강림의 체험을 바라며 땡깡을 부리는 행위는 어리석은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은 무엇인가?
(엡1:23)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바울은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충만이라 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지요? 그러니까 교회는 그 자체가 성령 충만의 현상으로 존재하게 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교회 자체가, 여러분 하나하나가 성령 충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성령의 열심에 의해 하나님과 연합하는 자로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을 이루어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한 충만한 성령의 역사 속에 들어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 충만한 이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을 부인하고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우려낼 때 우리는 그를 가리켜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모는 성도가 다 성령 충만의 소산인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라는 전제가 없이는 교회가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삶 속에서는 예수의 삶이 삶으로 입으로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성령이 충만하다는 말 다음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동행하여 나옵니다. 성령 충만은 복음의 삶과 복음의 말씀과 절대 무관할 수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세례나 성령 충만이라는 단어를 아무 때나 막 쓰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받으신 이후에도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계속 자라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성령을 받으신 후에도 지혜와 키가 자라갔다고 성경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시면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셨다는 말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엄마 젖 빨면서 ‘자식들, 난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러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자라시다가 결국 구원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고전15) 우리는 성숙의 과정, 자라남이 과정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으로 완성됩니다. 그걸 구원이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고도 하고, 구원을 받고 있다고도 하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지도 않고 우리가 성령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자라가기 위해서는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복음의 능력이 우리를 부인시키는 힘으로 우리를 쪼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내용이 ‘내가 성령을 믿는다.’라는 한 어절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이 모든 것을 다 믿으십니까? 그럼 여러분이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