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선고

2017.01.04 04:22

고대진 조회 수:241

지난 오월 봄 학기가 끝날 때 까지 나는 건강에 자신이 있었다. 거의 매일 수영을1마일씩 하고 있었고  수영이 없는 날은 한 시간씩 달리기를 하고 있어서 몸의 컨디션이나 건강 상태가 더 할 나위없이 좋았다.  그런데 5월 정기 건강 검사의 초음파 검사에서 암일 수도 있는 종양이 간에서 발견되었다는 진단이 나왔다. 아니 종양이라니 이렇게 건강한 나에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결과라서 여러 병원을 다니며 CAT, PET, MRI, 조직검사 등등 모든 검사를 다 해봐도 얻은 결론은 간암이라는 것이다. 6월부터 병원 자료에 나는 63세의 간암환자로 분류되어 있었다.

암이라면 죽음을 먼저 떠오르게 된다. 오죽 했으면 사형 선고라고 하듯이 암 선고라는 말이 나왔을까. 암을 선고 받고 나에게도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죽음이었다. 생각해보니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두분 다 한국나이로 64세 되던해 6월에 돌아가셨다. 내가 6월에 치료받다가 죽으면 우리 집안의 남자들에게 64 6월은 저주받은 달이 된다. 죽음을 앞둔 공포와 외로움이 무척 고통스러웠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죽는 다는 것이 나에겐 그렇게 먼 일이 아니었다. 내 아이도 막 스무살을 넘기고 하늘나라에 갔다. 천상병의 싯귀처럼 세상을 소풍나온 것처럼 잠깐 왔다 사고로 간 아이. 대학을 졸업하려는 해 6월이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같든 달 6월에. 아이가 가고 난 후부터 트라우마 치료를 위한 항우울제가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시나 소설이나 수필이나 어떤 글도 위안을 주지 않았고 마음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했다. 그 아픔을 견디기 위해서 아이의 기억을 지워야 했고 아이를 생각케하는 것들을 모두 버려야 했다. 그 아이의 기억을 공유하던 가까운 사람들도 멀리하게 되었고 연락을 끊었다. 이름을 말하는 것도 우리 집에서 금기가 되 버렸다. 그래도 떠오르는 아이의 죽음은 꼭 내 탓만 같았고 그 죽음은 어두움과 공포로 나에게 다가왔다. ‘공무도하가라는 시를 쓴 것은 이 일이 있고 얼마 지나서였다.

'위험해건너지마…'
울부짖던 내 고함
정녕 못 들었을까?
허연 물살에 휩싸여
떠오르지 않는 너
나는 물가를 헤매는
어미 청동오리가 된다

더 큰 소리면 들었을까?
더 큰 사랑이면 보았을까?

잿빛 하늘엔
허공을 훠히 맴도는
미친 바람이
울고 있다

… <졸시 공무도하가 2연에서>

6월은 꼭 넘겨야 할 것 같아서 억지로 먼 여행을 했다. 6월을 넘기고 다시 받은 정밀검사에서 간의 다른 부분은 건강하니까 수술을 하여 종양만 제거하면 될 것 같다는 결론을 얻었다. 간의 삼분의 일 정도를 제거하는 수술인데 한 석 달 정도면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 학교 강의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시월에 수술을 받았다. 살려고 수술하는 것인데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은 여전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마누라에게 좀 있다 보자라고 하며 웃었지만 볼 수 없을 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먼저 가면 어머니 가슴이 얼마나 아프실까 안되지라고 생각이 떠올라 마음을 가다듬었다.

수술하는 의사의 말로는 수술이 너무 일찍 끝나면 배를 열었다가 암이 다른 부분에 많이 전이되어 가망이 없을 때이고 너무 늦게 끝나면 수술에 문제가 있었을 때이기에 적당한 시간에 끝나야 좋은 징조라고 했다. 수술은 생각보다 조금 일찍 끝났고 의사는 암 세포가 간의 한 부분에 고립되어 있어서 제거가 쉬웠다고 말하면서 곧 회복할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켜놓고 갔다. 아 내가 살아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면서 엄청난 고통이 몸을 습격했다. 수술후 고통을 덜어주는 에피듀랄 마취가 실패하는 바람에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지를 수 밖에 없는 상테가 한동안 지속되었다.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일, 신진대사를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크고 고마운 것인가를 긴 회복기간을 통해 배우게 되었다. 입원중 처음 가장 절실한 일은 방귀를 뀌는 일이었으며 (수술뒤 몸 회복의 시작으로 생각한다) 그 다음 큰 일은 스스로 소변을 보는 일이었다. 아 소변 대변을 스스로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참 행복할 텐데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일어나 걷는 일 또 잠을 자는 일 등등 모두가 정말 힘들게 노력해야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사람의 몸은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나의 몸은 또 얼마나 연약한지 느끼면서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들이 거의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절실하게 가슴에 와 울렸던 시가 가즈키오의 <종이학>이라는 시다. 가즈키오는 일본 의사로 근무하던 중 오른쪽 무릎에 악성 종양이 생겨 다리를 절단했고 종양이 폐로 전이되어 32세에 요절한 시인이다. 

<종이학>

이무라 가즈키오

왜 모두 기뻐하지 않을까?

당연하다는 사실들

아버지가 계시고 어머니가 계시다.

손이 둘이고 다리가 둘

가고 싶은 곳을 자기 발로 가고

손을 뻗어 무엇이든지 잡을 수 있다.

소리가 들린다. 목소리가 나온다.

그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아무도 당연한 사실들을 기뻐하지 않아

당연한 걸하며 웃어 버린다.

세끼를 먹는다.

밤이 되면 편히 잠들 수 있고 그래서 아침이 오고

바람을 실컷 들이 마실 수 있고

웃다가 울다가 고함치다가 뛰어다니다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모두가 당연한 일

그렇게 멋진 걸 아무도 기뻐할 줄 모른다.

고마움을 아는 이는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들뿐

왜 그렇지 당연한 일

나도 63세의 암환자가 되고 수술을 받고 나서야 비로서 내가 가진 것이며 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수술후 팔을 조금씩 움직이면서 아 이제 손을 움직일 수 있구나 멋지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으면서 걸을 수 있구나 기쁘다’, ‘변을 혼자서 볼 수 있구나 고맙다라고 혼잣말을 했다. 겸손하게 초조하지 않게 그러면서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손과 발 움직이기 그리고 한발자국 두발자국 걷기건강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조금씩 얻어지는 것이었다. 나에게 쉬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쉬면서도 써오던 논문을 마무리짓는 일이며 논문 마감일을 맞추고 학생 연구 비평해주는 일 연구비 신청하고 다음 학기 수업 계획 등등 수많은 일들이 생각나서 편안히 쉴 수 없었다. 일을 안하면 불안하고 자꾸 뒤쳐지는 느낌이 들어서 초조해진다. 그래서 나에겐 쉴 시간이 없었다. 여행을 가도 책이며 공부할 논문들을 가방에 잔뜩 집어넣어야  안심이 되었다. 그렇다고 그걸 다 읽는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일에 신경을 쓰지 않고 지내던 날들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니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일은 내 삶의 중심이었고 내 휴식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던 일들이 암환자에게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읽었던 많은 책들이며 내가 이해하고 있었던 과학적 지식은 수술후 내 마음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나는 누워서 손가락 움직이는 일에 신경을 써야 했고 나에게는 방귀뀌는 일 소변을 혼자 보는 일이 더 시급했고 중요했다. 아픔을 참으며 한걸음 한걸음 걷는 연습이 우선이었고 일분 이분 서서 걸을 수 있는 시간을 연장하는 일이 더 큰 일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누워서 시간을 보내는 것 또한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는 일에 나는 얼마나 무심했었는지. 그동안 내 건강에 대한 자만심으로 음식으로 또 스트레스로 몸을 학대 했던 것을 반성하면서 너무 멀리 생각하지 않고 하루를 지내기로 했다.  인생의 끝이 언제 올지 모르니까 오늘 하루를 잘 살기. 건강에 너무 자만하지 말고 하루 하루 내 몸을 조금씩 회복시켜나가기. 죽음이 옆에 있다는 생각을 잊지말고 살아가기. 작은 것들에 고마와하며 기쁘게 감사하며 살기생각하니 내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암은 나에게 고마운 새 삶을 주었다. 환갑을 넘기고 암에 걸리고 나서야 조금 철이 드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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