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2017.01.04 04:29
수명이 20년 혹은 30년이 남아있다고 하면 죽음을 생각할까? 숫자로는 분명히 끝이 멀지 않은 상황이지만 살면서 20년을 아니면 10년을 여생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아니10년은 커녕 5년이나 1년 앞도 생각을 못하고 지내는 나같은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허지만 죽을 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고 나면 어떨까? 죽음이 추상적으로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가까이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조금 달라지는 것 같다. 그래서
인생의 끝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다.
작년에 간암 수술
때문에 다니던 학교를 한 학기 쉬어야 했었다. 방학 말고는 한번도 학교를 쉰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한 학기 동안이나 일을 멈춘다는
것은 나에겐 충격적인 일이었다. 일을 그만둔다는 생각도 전혀 안했었는데 생각해보니 이제 학교를 그만두는 일도
생각해보고 또 그만두면 연금은 어떻게 되는지도 알아보아야 할 때인 것을 알게되었다. 끝을 생각하는 때가 나에게도 온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은퇴를 생각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 정년이란 것이 있는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벌써 명퇴나 조퇴를 했고 대학에 있는 친구들은 작년에나 금년에
은퇴를 했다. 나도 은퇴를 생각해야할 나이? 내가 나이가 들었다? 죽음을 준비할 때라고? 아주 먼 일 같았는데 준비해야 할
일이 코 앞에 다가왔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한국에선 요즘 은퇴자들을 정퇴자, 졸퇴자, 조퇴자로 분류한다고 한다. 정년퇴직을 하면 정퇴자, 졸지에 퇴직당하면 졸퇴자, 멀쩡한 젊은 나이에 퇴직당하면 조퇴자라 분류된다는 것이다.
미국 직장에선 나이때문에 은퇴를 강요할 수 없기 때문에 정퇴라는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이 때문에 은퇴를 해야 된다는 생각은 하지는 않는 것 같다. 특히 대학에선70세 정도면 한참 일할 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70 이전에 은퇴하는 사람들을 별로 볼 수 없다.
70정도 나이에선 일을 계속하거나 은퇴하거나 경제적으로는 차이가 별로 없기 때문에 돈 때문에 일을 계속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일이 즐거워서 한다고 할까 아님 일을 그만두어도 특별히 하고싶은 다른 일이 없기 때문이랄까.
그래도 막상
은퇴를 생각하니 메디케어며 소셜시큐리티 연금이며 알아보아야 할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은퇴 나이와는 거리가 조금 멀다고 생각되는 마누라도 일만 하다 죽으면 어떻하냐고 일찍 은퇴하겠다고 벌써
부터 벼르고 있다. 은퇴하고 뭐 할껀데 라고 물어보면 특별히 할 일도 못찾으면서 그저 지금 하는 일을 안하는 것 만으로 스트레스가
없어질 것 처럼 말한다. 특정 나이가 되어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면 차라리 준비하기가 쉽겠지만 나이를 빼면 그만 두어야 할 이유를
찾기는 쉽지 않은 이곳에선 은퇴 준비가 자꾸 미루어지는 것 같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을 하면서 말이다.
혹자는 나이든 사람들이 은퇴를 해야
젊은 사람이 직장을 구할 수 있다며 정퇴를 타당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은퇴의 이유가 되지 않는 것 같다. 난 내 직장을 포기할 정도로 젊은 사람들을 사랑하지도 않거니와 요즘같이 실업율이 낮은 이곳에선 일할 사람의
인구가 줄어가는 것이 더 문제니까 말이다. 한국에선 젊지 않다는 것이 마치 핸디켑이나 되는양 말들하지만 미국에선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다음 미국의
대통령이 된다는 것만 보아도 나이는 별 문제가 안되는 것 같다.
나이와 상관없이 대통령의 일을 할 수 있다면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를 하는
일도 물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정년이 없는 이곳에서 일해도
평생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 언젠가 은퇴를 하고 준비를 해야 한다. 난
은퇴를 준비하는 일은 죽음을 준비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죽음이 저 먼 곳에 있는 듯 하여 이를 미루어온 것 같다. 사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무엇인가? 매일 할 일 없이 앉아서 죽을 일을 생각하는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두려움을
이길 준비를 한다? 아닌가?
어떻게? 생각해보면
죽음을 준비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죽음은 경험해 볼 수 없기 때문에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
곰곰히 생각하면 은퇴의 준비는 죽음의 준비가 아니라 새 삶을 준비하는 것 같다. 지금의
삶에서 벗어난 새 삶을 찾아야할 때, 지금과 다른 무엇을 할까 또 어떤 곳을 돌아볼까 어떤 새로운 공부를 할까 하며 계획하는 때가 아닐까?
언제 은퇴를 하지? 학문을 업으로 삼고 지내온 학자라면 언제 은퇴를 해야 하나? 나이를 정해놓고 몇 살 때까지 일한다고 계획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학자라면 나이에 상관없이 공부하는 것이 재미가 없어지고 공부에 흥미가 없어지면 또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재미가 없어지면 그때는 은퇴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은퇴로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니고 생활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다른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니까. 반드시 가야 할 곳이 있는것도 아니고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나서는 시간이 되는거다.
나도 언젠가 내 공부에 열정이 없어지거나 가르치는 일이 지겹다고 느껴질 때 은퇴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내왔던 삶의 패턴과는 완전히 다른 일을 해 볼 것이다. 오래 전부터 줄거리를 생각하고 있던 소설을 끝내 문인회 친구들에게 비평을 받아볼 것이고 바하의 플루트 소나타 전 곡과 텔레만의 12개 프루트 환상곡들을 마스터하고 연주할 것이다. 여행하면서 주위 경치나 사람들을 그림으로 남기고 선물해 줄 것이다. 아 참 초보에 머물던 서반아어를 연마하여 남미 여행을 통역없이 해봐야 겠다. 은퇴할 날을 기다리는 삶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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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수술을 하신후 빠르게 회복중이신 모습을 뵈니 한결 편해집니다.
수필 쓰는 노기제, 교수님께 인사드립니다.
이렇게 해서 교수님의 버킷리스트에 이름 석자 올려볼까 구상중입니다.
은퇴를 정의하신 대목에 동의합니다. 저는 아주 이른 나이에 은퇴를 했지만
이유가 확실했거든요.
그러나 스트레스로 인해 발병이 되었을지도 모르니 그 근원은 제거하심이
옳은줄로 아뢰옵니다.
정유년 새해엔 확실하게 건강 회복하시길 기도합니다.
참고로 이상구 박사 강의를 들어보시길 강추합니다.
www.leesangku.org 화면이 뜨면 지난강의 동영상을 클릭하시고 최근 것 클릭해서
들어보시구요. 1부는 건강강의, 2부는 성경강의 입니다.
또 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