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를 지나면서

2009.04.18 01:27

고대진 조회 수:1011 추천:232

한 30여 년 전 캐나다 수상 튀르도는 두 아들 생일이 크리스마스인 것을 들어 하나님도 크리스마스가 생일인 아들을 하나밖에 못 가졌는데 자기는 크리스마스가 생일인 아이를 둘씩이나 가졌으니 하나님보다 더 낫다고 우스개 소리를 한 적이 있다. 허지만 아이의 사주팔자가 생년월일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본국에서는 이 날 탄생한 예수님의 팔자가 기구하여 아이의 운명도 기구하리라 생각해서 이 날은 좋은 날이 아니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예수님의 생일은 아무도 모른다. 역사적 혹은 천문학적 자료를 조사해보아도 그 생일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물론 성경에도 그런 날자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4세기 이전에는 성탄절이 없었고 2세기 때는 1월 6일을 ‘신현절’이라 하여 예수의 나신 날과 세례 받으신 것을 겸하여 지금의 성탄절로 지켰다 한다. 12월 25일을 예수 탄생의 날로 공식 발표하여 지키기 시작한  것은 서기 354년 교황 리베리어스에 의해서다.

‘그리스도’(Christ) 와 ‘미사’(Mass) 가 합쳐 구성된 용어인 크리스마스가 굳이 12월 25일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가장 유력한 설명은 ‘정복당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이라는 로마시대의 동짓날의 축제를 택했다는 것인데 밤이 점점 길어지던 날이 끝나고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를 기념하는 것은 동서양에서 공통적인 현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2월 22일을 동지로 삼아 팥죽을 쑤어 문설주에 바르고 먹는 등 악귀를 물리치려는 척사의 관습을 가지고 있다. 사실 예수의 탄생일을 시작으로 세상의 어둠이 줄어들고 빛의 세상이 온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붙이고 보면 크리스마스가 동지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밤이 가장 긴 동지도 지나고 서양의 동짓날인 크리스마스도 지났으니 낮 시간이 점점 길어질 것이다. 이 때는 지난 한 해의 길고 어두웠던 기억들을 지우고 새로운 날들을 계획하고 소망하는 시간이다. 필자도 이번 동지에 어두웠던 기억의 하나를 지울 수 있게 되었다. 2년 전 신청했던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한다는 통지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작년 10월 본 칼럼에 <발자국 만들기>란 제목으로 쓴 바 있지만 필자는 1969년 삼선개헌안 변칙통과 규탄과 반대 데모를 주동했다가 데모의 성공(?) 덕택으로 무기정학과 소년원에 송치되는 실형을 받은 적이 있었다. 2년 전 ‘명예회복’을 신청하면서는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30년 전의 그 사실을 밝혀 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또 과연 이 일을 바로 밝혀서 우리가 했던 일을 인정해줄까 하고 반신반의했었다. 이제 내가 한 일이 옳았음을 인정하고 구체적인 명예회복의 조치를 취한다는 통지서를 본국에서 받고 나니 역사 속에서의 나를 자꾸 돌아보는 것은 그만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아니라 이 시간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니까 말이다.

....발자국을 남기기 위해 꿩이 눈밭을 걸어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뚜렷한 족적(足跡)을 위해 어깨에 힘을 주면서 발자국 찍기에 몰두한 것도 아니리라....라는 최승호 시인의 꿩처럼 발자국을 만들었다는 생각조차 잊어버려야 하리라. 그리고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소식도 눈 위에 남겨졌다 녹아버린 그래서 이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없는 발자국임을 알아야 하리라. 동지가 지나서 어둠이 조금씩 물러나듯 고문의 아픈 기억이나 당시 부모님의 근심과 아픔도 어둠에 묻혀 물러날 것. 눈과 함께 녹아버린 발자국처럼 녹아버릴 것이다.

새해에는 새롭게 들으려 할 것이다. 살아있는 존재들이 내는 웃음소리와 울음소리를. 어둠이 가장 긴 날이 오면 빛이 점점 길어지는 날도 따라 오는 것. 어둠이 조금씩 줄어들면 조금씩 나아진 세상이 오길 기대할 수 있으리라. 겨울이 오면 봄도 정녕 멀지 않다는 쉘리의 시를 기억하면서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는 새해를 독자들과 함께 맞고 싶다.  


<미주 중앙일보 2003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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