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아내

2009.09.02 06:49

고대진 조회 수:1206 추천:258

 

2000년 봄의 일이다. 학교로 미주 한국 문인협회에서 전화가 왔다. 시인이 된 것을 축하한다고심사위원 중 한 분인 문 인귀 시인과 한참 동안 시에 관하여 이야기하다 집으로 갔다. 저녁을 먹으면서 "마누라, 나 시인이 되었대" 하고 말했다. " 시인?" "-, 내가 시를 쓰거든." "? 언제부터?" "작년에 몇 개 보냈더니 신인상 받았다네" "왜 나한텐 이야기 하지 않았어?" "뭐 될 줄 몰랐지." "어떤 시인데?" "나중에 보여줄게. 근데 시상식에 오라는데" "뭐 주는데?" "상패랑 상금이랑" "얼마나?" "쪼끔" "비행기 값은?" "……." " 돈 드는 취미가 하나 늘었구나! 당신은 좌우간 못 말려." "시 쓰는 건 취미로 쓰는 거 아니야." 심각하게 나오는 나. "당신 정말 시인되는 거 아니야? 가난한 시인?" "나 벌써 됐다는데." 잠시 말을 잃은 마누라기 묻는다. "그럼 난 뭐가 되?" "시인의 아내" "우리 집은?" "시인의 집" " 우리 아들은?" "시인의 아들" "우리가 사는 마을은" "시인의 마을" "무슨 노래 제목 같은데... 좌우간 멋있게 들리네." 이렇게 마누라는 졸지에 시인의 아내가 되고 말았다. 만날 내 글에서 주연을 빛나기 위해 조연으로만 등장하여 뭇 사람들의 동정을 한몸에 받던 마누라가 말이다.

내가 코미디를 썼다면 마누라를 비롯한 날 아는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떡이며 그럴 수 있지 라고 할 텐데. 아니면 하다못해 구어체로 말하듯 써대는 수필이라면 몰라도 시? 시인? 하는 눈치다. 교회에서 매달 나가는 뉴스레터의 내 칼럼을 보면서도 사람들이 전혀 감동(?)하거나 놀라지 않는 것을 보고 왜 그런가 하고 물었더니 내가 평소에 하는 말투와 내용이 이런 코믹한 글과 전혀 다르지 않아서 그렇단다하기야 "좀 심각해 보세요."라는 말이 내가 결혼하고 지금까지 마누라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니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시인이라뇨고 선생님과 시는 전혀 안 어울리는데요." 라는 분까지 있고 보면 내가 얼마나 이미지 관리에 소홀히 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 글을 열심히 읽고 맞춤법을 교정해주는 마누라도 내 시 쓴 것은 본 적이 없으니. 아니 내가 시를 좋아하고 가슴에 담은 시가 많다는 것은 안다. 그래서 한번은 워싱턴 주 시골에서 끝 간 데를 모르고 파랗게 펼쳐져 있는 봄의 들판을 가로지르며 흠- 시가 생각나는 풍경이네 했더니 읊어보란다. “저어 푸으른 초오원 위에하고 길게 뽑았더니 눈을 좀 크게 뜨는 마누라. 이때를 놓칠세라 "그림 같은 집을 짓고 궁따라랏닷 삐약삐약" 했더니 "어유 이젠 그만 좀 심각해 봐요" 하는 마누라. 정말 예쁜 꽃을 보며 "어머나 예뻐라 눈같이 하얗다. 이거 무슨 꽃이죠?" 하면 난 심각하게 "음 이거?" 하며 뜸 좀 들이고 "하얀 꽃" 하고 대답하곤 했으니 심각이란 나와 상관없는 말인 줄 안다. 그런데 심각하게 시인이라니. 나이도 생각하셔야지. 아랫배가 나오는 나이에. 똥배 나온 시인이 어디 있어? 어 그건 뭔 배가 아니라 인격이라 부른다던데. 킥킥.

그래도 시인이라 불리고 나니 좋은 것이 있다. 시를 좋아하는 분들을 많이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만나는 분들이 나도 시를 쓴 적이 있다거나 시를 좋아한다고 수줍은 듯이 고백한다. 동지를 또 만났구나 하고 우린 반갑게 이야기한다. 시를 나눌 기회도 조금씩 늘어난다. 시를 써서 경제적으로 부자가 된 사람은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마음은 부자가 된다. 글 친구가 생기는 것 때문에. 한국에도 또 미국에도 시카고에서 엘에이까지.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의 글을 나누면서 친구가 된다. 친구가 생김으로 사는 폭이 넓어진다. 시를 통해 행복해지는 거다.

누군가 내 글을 읽어준다는 것처럼 흐뭇한 일이 어디 있을까더구나 내 시를 읽고 시 속에 들어있는 마음까지 안다면. 내 시가 소개된 신문을 열심히 읽던 마누라에게 "재미있지. 잘 썼어?" 하고 물었다. "응 재미있게 잘 썼네!" 하며 선선히 대답하는 마누라. 뭔가 낌새가 이상한데…. 생각하는데 "이 최진희라는 분 -한국 남자가 알아야 할 것- 내 생각을 그대로 써 주셨네. 참 잘 썼다." 하는 마누라. 그러면 그렇지.  

 

 (200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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