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켓리스트
2017.01.04 04:25
작년 봄에 간암 선고를 받고 10월에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암 선고를 받고 나서 먼저 떠로르는 생각은 다가오는 죽음을 어떻게 대처하는가 였다. 63세의 죽음이라 너무 이르지 않나? 아니지 더 일찍 돌아가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 라고 생각해봐도 좀 억울한 것 같았다. 어제까지 정말 건강한 몸이었는데 암으로 겨우 환갑을 넘긴 나이에 사망이라? 찹찹한 마음으로 그동안 내가 한 것이 무엇이었나? 죽으면 누가 나를 기억해 주려나? 기억 안해주면 또 어때… 라고 중얼거리며 내가 살아왔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회복이 순조롭게 되면서 앞으로 살 삶의 우선 순위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65세의 남자의 여생은 평균해서 17년 여자는 20년이니 나도 평균으로 살면 17년은 더 살 수 있다. 암에 걸린 것을 보면 평균보다 못할 확률도 있으니 오년? 아니10년은 넘을까? 그렇다면 남은 생애를 어떻게 보내지? 뭐 꼭 하고 싶은 일들이 있나? 생각이 많아지고 복잡해졌다.
걱정이라면 내일 모레것까지 꾸어다 오늘 하는 마누라는 나보다 더 죽을 상이다. 갑자기 “자기 시집낼래? 아니 수필집이면 어때?” “뭐 하고 싶은 것 없어? 책 써라.” 라며 꼭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것으로 들리는 말을 한다. 세상에 글을 남긴다? 흠. 유서야 진즉 작성했으니 그말은 아니겠고… 허기사 철학자 대비드 흄은 65세에 자기가 죽을 병에 걸렸음을 알고 하루만에 “나의 생애” 라는 짧은 자서전을 썼다. “나는 지금 나의 종말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난 이 병으로 고통을 거의 격지 않았다. 신기한 것은 내 건강이 나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내 의식이나 영적 생활은 예전과 똑 같다는 것이다. 난 여전히 학문하는 일에 전과 같이 열정을 가지고 있으며 친구들을 만나면 즐거움을 느낀다.” 라고 말한다. “나는 온화한 성정을 가졌고 화를 잘 참고 개방적이고 유쾌한 유머와 애정을 가졌지만 증오에는 영향을 거의 받지않았으며 모든 감정에 절제를 잘 해왔다 생각한다.” 라며 “지금의 삶에서 더 초연해야 한다는 것이 몹시 힘들다.” 라고 한다. 초연이라…
산다는 게/ 뭐 별것 있나요// 한순간/ 반짝이는 생이다가// 총총 사라지면/ 그뿐이지요…
정연복의 <꽃잎 편지>에서 처럼 총총 사라져야 할 나는 내 죽음에 그렇게 초연하기가 쉬운 것 같지
않았다. 얼마 전에 작가이자 의사인 올리버 삭스는 (영화 Awakenings의 저자) 암이 너무 퍼져서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남은
삶에서 지금의 친구들과의 우정을 더 깊게 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작별의 말을 하고
글을 많이 쓰고 힘이 있으면 여행을 하고 더 깊이 사물을 이해하는 통찰력을 가지게되길 바란다.” 라고
“나의 삶(my own life)” 이라는 글에 남긴다.
그는 그런 마지막 시간들을 몇 달 보내다 82세의
나이로 2015년 8월에 죽는다.
흄이나 삭스를 흉내낼 수는 없지만 나도 정리할 것들과 미루지 말아야 할 일들을 생각해보았다. 소위 버켓리스트라는 죽기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작성해보는 일 말이다. 그런데 꼭 하고 싶은 것이 남아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찾을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작성한 버켓리스트 베스트 100 혹은 베스트 25를 보아도 나에게 꼭 적용되는 것은 찾을 수 없다. 리스트 작성 요령에 “버킷리스트에는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반드시 하고 싶은 일을 적어야 합니다. 막연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만으론 부족합니다. 양동이가 발끝에서 떠나가는 순간 –킥 더 버켓은 죽는다는 서양의 표현이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이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이든 해내겠다’는 절박함이 필요합니다.” 라고 친절히 가르쳐주고 있는데 절박하게 하고싶은 일은 없었다. 마누라는 당신은 늘 당신이 하고싶은 일들만 하면서 살아와서 그렇다고 했다. 생각하면 살아온 지난 세월이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우정을 나누고 사랑을 하고 또 내가 하고싶은 공부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축복이었다.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즐거워했고 거기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축복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 이런 행복을 준 사람들을 다시 만나서 고마왔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의 버켓리스트의 첫 번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우선 친구와 선생님이 리스트 일번이다.
금년
한국에 갔을 때 53년 이상 사귀어온
친구들을 만나 같이 강원도로 여행을 떠났다. 한 친구는 은퇴할 때가 되어 고별강연 준비를 하고 있었고 또
한 친구는 캐나다에 있었는데 잠시 캄보디아에 사업차 머무르고 있다가 우리 만남을 위해 서울에 달려온 친구다.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라는 마종기시인의 <우화의 강>에서 나오는 강 같은 우정을 나눠왔다고 자신하는 친구들이다. 이제 몇 번 더 이렇게 만날 수 있겠니 우리 남은 시간에 더 자주 만나기로 하자라고 약속하면서 무척이나 행복했다.
대학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신 두 분 선생님과 저녁을 하면서 지난 이야기를 했고 다시 만날 약속을 하였다. 한 분은 나에게 테니스를 가르쳐주신 분이었고 군대는 사관학교 수학교관으로 가라고 추천해준 분이었고 또 한 분은 공부하는데 여러가지로 도움을 주신 분이었다. 늦게라도 그때의 고마움을 전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꼭 뵙고 싶던 다른 선생님은 원주에 이사를 가셨다고 했다. 원주까지 오가는 데 하루는 걸리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촉박해 못뵙고 그냥 미국으로 돌아왔다. 내년에 꼭 찾아뵈야지… 라고 다짐하면서. 이분은 수업시간에 이상한 질문을 골라하는 나를 너그럽게 보아주시며 연희동 자기집 근처로 하숙을 옮기게 하시고 쓰시던 책 교정보는 일도 시키며 마치 친 동생처럼 돌봐주시던 분이었는다. 저녁이면 커티삭이란 위스키병을 들고 내 하숙방에 오셔서 딱 한잔씩이다 라며 한잔씩 마시며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사모님이 이화여대 무용과 교수로 계셨는데 무용 발표회에 갔다오면 “대진아 거 뭐 주재가 사랑이면 사랑한다 하고 한마디 하면 될 것을 매뚜기처럼 폴짝폴짝 뛰기는 왜 뛰냐…”라면서 사모님을 놀리던 일이 생각난다. 그런데 미국에 돌아오고 한 달 지나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 미루지 말고 그 때 만났어야 했는데 하는 늦은 후회. 나희덕시인의 시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가 떠오르며 가슴이 저려왔다.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 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 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 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나는 선생님께는 너무 늦게라도 놀러 갈 수 없게 되 버렸다. 버켓리스트는 반드시 하고 싶은 일만 쓰는 것이 아니라 할 기회가 주어지면 미루지 말고 바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만 아니라 리스트에 있는 사람들의 삶도 얼마 남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버켓리스트 일번에 남은 사람들도 기회가 되면 미루지 않고 꼭 만나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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