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이는 진짜 박사가 아닌데요
2021.08.03 05:58
오래전 버지니아 의과대학에 근무할 때다. 내가 의대 교수라고 하고 또 ‘닥터 고’ 라고 불리니까 가끔 사람들이 –특히 미국 온 지 얼마 안 된 교회 사람들- 의료상담을 해오곤 했다. 주로 식사하기 바로 전이나 식사할 때 붙들고 잠깐만 봐달라고 하는데 “전 잘 모르니까 병원에 가보세요.” 하면 화를 내면서 아니 잠깐이면 되는데 닥터라고 잘난 체한다거나 짜게 군다며 욕을 하곤 했다. 나중엔 눈을 까 보이면서 이렇게 눈이 붓고 눈물이 나온다고 하며 잠깐만 봐달라고 한다. 일단은 잘 들어주고 “많이 아프시겠네요. 그런데 제 전공이 안과가 아니라서… 안과 전문의한테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라든가 골치가 아파서 잠을 못 잔다는 사람에게는 “정신 신경과에 가보셔야겠네요” 라고 추천하면서 상황을 최대한 피하곤 했다. 거기서 의과대학 교수라고 다 의사가 아니라는 설명을 하거나 내 전공이 생물통계학이라든가 박사와 의사의 차이가 무엇인지 설명하려면 식사 시간을 놓쳐 밥을 굶어야 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여러 사람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닥터 고 어쩌고 하는 말을 듣던 마누라가 비슷한 오해가 있을까 봐 지레 겁먹는지 “He is not a real doctor, you know.”라는 것이 아닌가? 뭐? 진짜 박사가 아니라고? 무슨 소리냐 했더니 ‘real doctor doctor’말이야 라며 변명한다. 아마 첫 닥터는 ‘의사’ 두 번째 닥터는 닥터라는 호칭을 가르치는 것일 터 우리말로 번역하면 ‘의사 닥터’ 가 되는데 “딴 사람이 들으면 내가 가짜박사인 줄 알겠네…”라고 하며 말을 잘하지 못하는 -번역을 잘하지 못하는- 마누라의 말이라고 웃고 넘어간 적이 있다.
작년 말에 바이든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보수신문 월스트릿저널 오피니온에 컬럼니스트 엪슈타인Epstein이란 사람이 영부인 질 바이든을 박사라고 부르는 것이 웃기는 소리라고 하면서 바이든이 의사냐? 사기를 치는 것 아니냐…라고 조롱하는 듯한 내용의 칼럼을 내보냈다. 영부인이 대학교수로 계속 가르치고 있고 또 박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닥터 바이든이라고 불러주는 것이 좀 아니꼬워서 그런 것 같다. 물론 이 칼럼은 엪슈타인 본인은 박사학위를 받지도 못했으면서 의사만이 박사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라는 괴팍한 노인의 말이라고 평가절하되었고 특히 질 바이든을 kiddo (얘야) 라고 낮춰 부르는 등 여자를 무시하는 수구꼴통의 전형적 글이라고 많은 칼럼리스트들의 욕을 바가지로 들어야 했다. 더구나 키신저를 비롯한 남자 박사들이 박사라고 불릴 때는 전혀 그런 말을 하지 않다 여자가 박사라 불리니 이런 글을 쓴다며 여성 혐오자가 아니냐는 등 반발을 샀고 또 조롱거리가 되었다.
최근 발표된 연구에 의하면 여자 박사 (혹은 의사) 는 남자에 비해 박사라고 불릴 확률이 훨씬 적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런 전반적 경향은 여성의 학문적 업적을 평가절하할 뿐만 아니라 상을 받는다거나 진급할 때 여성들을 불리한 위치에 있게 만든다고 한다. 여성의 업적을 평가절하하는 것이 어디 미국에서만 행해질까? 교포 사회도 비슷한 것 같다. 필자가 다니던 성당에 한 학생이 찾아와 닥터 고를 찾았다. 모두 나를 찾는 줄 알고 나에게 보냈는데 그게 마누라를 찾는 학생이었다. 한번은 고 교수님을 찾는다고 해서 또 나에게 보내졌는데 마누라를 찾는 학생이었다. 이런 실수를 자꾸 하니까 신부님이 미안해하시며 “잘 모르시는 것 같아 이야기하는데 고안나 자매님도 닥터시고 또 교수님입니다.”라고 따로 교인들에게 공지하는 걸 보았다. 그래도 마누라에게 닥터 고 혹은 고 교수라는 칭호를 부쳐주는 사람은 경영정보학과 (마누라 전공) 학생들이나 우리가 부부 교수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된 한국 식품점 사장님을 빼면 거의 없다. 한국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함께 다니는 병원이나 치과에서도 의사나 간호사들이 나에겐 닥터칭호를 꼬박 부치면서 마누라에겐 그저 이름이거나 미세스 고 라고 부른다. 아니 힘든 학위를 하고 남자들도 못 올라간 정교수까지 되었는데 왜 그러지? 하면서 남성 중심의 문화를 탓하는 마누라에게 당신이 “real doctor”가 아니어서 그런가? 히히… 하며 웃었다.
필자가 한국에서 학교 다닐 때는 교수님 중에서도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 많지 않아 교수님보다 박사님이라 불리길 더 좋아했다. 요즘은 박사가 많아져 박사 중 일부만 교수가 되기 때문에 박사라는 호칭이 교수라는 호칭보다 낮은 수준으로 인식되어 교수라고 불리길 좋아한다고 한다. 미국에선 학교 안에서는 교수 혹은 박사 호칭을 구별 없이 사용하고 학교 밖의 사람들도 대부분 박사라는 호칭을 부쳐준다. 질 바이든 박사의 경우 학교에선 바이든 교수님이라고 부르고 언론에서나 대부분의 사람은 닥터 바이든이라 불러주는 것 같다. 물론 닥터라는 말이 ‘의사’란 말로 많이 쓰여 오해받을 수는 있지만, 미국에선 의과대학을 졸업하면 Doctor of Medicine (M.D.)라는 학위를 받기 때문에 의사도 박사라고 불리는 것이 맞다. 수의사나 치과의사도 마찬가지다. 의사가 아닌 박사학위는 주로 Ph.D. (Doctor of Philosophy)인데 철학박사라고 하지 않고 그냥 박사라 부른다. 바이든같이 교육학 분야의 최종 학위인 교육학 박사(Ed.D.)를 받거나 다른 분야의 최종 박사학위를 받아도 박사는 박사다. 박사 칭호를 안 쓰는 학위 중에는 명예박사와 법대를 졸업하면서 받는 법학박사 (J.D.)가 있다. 명예박사는 공부 안 하고 받는 박사라서 그런 것 같고 J.D.는 박사라 부르지 않고 변호사 (attorney)라는 칭호를 써서 그런 것 같다.
호칭에 민감한 사회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마땅히 부를 호징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우리말 호칭에 서투른 마누라가 연세가 많으신 어느 분에게 ‘미스터 ㅅ’이라고 불렀다가 혼난 적이 있다. 아니 뭐라고 불러? 선생님도 아닌데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한인회 회장도 옛날에 했으니 회장님도 아니고 나는 존경의 의미에서 미스터라고 했는데…라고 쭝얼거리는 마누라에게 전 회장이라도 회장님이라 부르고 대통령을 그만두어도 미스터 프레지던트라고 부른다고 열심히 설명했는데 “He is not a real doctor, you know.”라는 사람에게 너무 어려웠던 말은 아닌지 모르겠다?
최근 필자가 은퇴하고 나서는 호칭이 더 모호해졌다. 명예교수는 너무 길고 사장님이나 선생님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사장님도 아니면서 무슨… 혹은 전 선생님이 뭐…라는 마누라 목소리가 들려서 화백*이라는 호칭을 쓰기로 했다. 고화백입니다 라고. 무슨 그림을 그리십니까? 라고 물으면 주로 누드화를 그리지요. 혹시 모델을 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라고 되물을 거다.
(*화백은 화려한 백수의 준말이다.)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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