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플루트 소리가 더 좋은데

2009.04.18 01:35

고대진 조회 수:1312 추천:191

 

누가 나에게 취미가 뭔가 물으면 난 참 난감해진다. 특별히 하나 잘하는 것은 없지만 즐기는 것, 좋아하는 것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 가지를 취미라고 대답을 하면 마치 다른 것에 미안해해야 할 것 같아 우물거리기 일쑤다. 미국 속담에 "팔방미인치고 제대로 하는 것 없다 (Jack of all trade, master of none)"라고 하는데 내가 바로 그 꼴이다. 내가 팔방미인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제대로 잘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내가 좋아하던 수학자이며 철학가인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이란 책에서 행복하여지려면 취미를 다양하게 가지라고 권한다. 아마도 내가 그 말의 사도가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나에겐 `영원한 학생`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는데 그 말이 좋아 이젠 "배우는 것이 제 취미입니다."라고 곧장 대답하고 만다. 사실 난 순수 수학이 전공이었는데 통계학으로 바꾸었다. 통계학을 하려면 상담을 해주는 분야마다 반은 전문가가 돼야 하니까 이것저것 많이 알아야 한다. 그 새로운 것들을 배우는 재미에 아예 전공까지 바꾸고 만 것이다. 항상 조금씩밖에 못 하면서도 배운다는 것이 재미있다. `영원한 학생`이 되고 나서 더욱 젊어지는 것 같다. 뭐든 시작해도 아직 젊은데 뭐 하고 시작하길 즐긴다.

뭐 그렇게 심각하고 고상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마술, 화투, 댄스, 누드 그리기, 요가, 저글링 등등 못하는 것 빼고는 다 하고 싶어한다. 난 성격상 수동적으로 구경하기보단 내가 직접 해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아마도 햄릿같이 심사숙고하는 타입이 아니라 돈키호테같이 먼저 일을 저지르고 보는 사람인 것 같다. 하도 새로 배우고 시도해 보는 것을 좋아하니까 마누라가 "기왕 돈 주고 배우는데 좀 쓸모 있는 것 배우면 어때요? 자동차 수리라든가 목공일 등 말이에요" 하고 속 들여다보이는 말을 했다. 문제는 이 쓸모 있는 것들은 또 죽으라고 배우기 싫다. 취미는 일과 상관없는 그런 것 아닌가? 하기야 쓸모 있는 것에 재주가 많으면 마누라한테 큰소리나 칠 텐데 난 유지비가 많이 든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돈을 쓰는 취미만 골라 만들어 야단맞는다.

음악 이야기를 좀 해야 하겠다시애틀에서 살 때 아이들을 좋아하던 나는 옆집 학생 아파트에 살던 세 살짜리 우현이를 늘 데리고 놀러 다녔다. 우현이 엄마가 가야금을 전공한 음악 석사라는 것을 알게 된 건 한참 뒤 일이다. 옛날부터 국악에 취미가 있던 내가 그냥 넘어갈 수 있나 배울 수 있느냐고 물을 수밖에랫슨비는 못 받겠다고 하니 난 그 남편에게 테니스를 가르쳐 주기로 하고 가야금 배우기 시작했다. 엄하신 선생님에게 성금연류 가야금 산조를 한 이년 넘게 배웠다. /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잡지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엇머리 잦아지다 휘몰아 보아/ 하는 영랑의 시구를 (""이란 시다) 산조 악보에서 비로소 대하게 되었다. 국악은 악보가 양악과 틀려 항상 마주앉아 음을 반복해서 듣고 연주하고 하면서 오음계의 음을 익힌다. 가야금의 음은 열두 줄의 길이를 안족(기러기 다리라는 뜻)이라는 받침을 조절함으로 시작하는데 영랑의 다른 시 "가야금"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도 이때다. 북으로/ 북으로울고간다 기러기/ 남방의/ 대숲 밑/  휘여 날켰느뇨/ 앞서고 뒤섰다어지럴 리 없으나/ 가냘픈 실오라기/ 네 목숨이 조매로아/. 옛날엔 가야금 시에 기러기는 왜 나오나 했는데 안족과 열두 줄의 배열 상태를 가리킨 걸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언젠가 다시 좋은 선생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보는데 아직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뒤부터 악기에 대해 관심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첫애를 임신한 마누라에게 가야금 선생님이 모차르트의 플루트 협주곡 판을 선물해 주었다. 태교에 바로크 음악이 좋다고 말하면서. 그 뒤로 마누라가 좋아하는 악기가 플루트가 되었다. 소리가 밝고 맑다나? 아들놈이 자라면서 아들이 연주하는 모차르트의 플루트 협주곡 듣고 싶다는 엄마의 소원에 플루트를 시작했다. 항상 교습을 데리고 다니던 내가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않은가. 한 학기 뒤에 새로 내 플루트를 사고 말았다. 마누라에게는 부자가 하는 이중주를 들려준다고 하며 나도 교습을 받기 시작했고. 마누라를 위한 기쁨조 `이중주 부자`가 되기도 전에 아들놈이 배신했다. 뭐든지 시작하면 5년은 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5년을 기다리다가 자기는 록 기타를 한다고 기타 교습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제 이중주는 글렀고 어쩐다 하면서도 난 계속 교습을 받았고 또 아들 덕택에 악기도 마련하고.

사실 난 이것저것 배우고는 싶은데 돈주머니는 마누라가 지킨다. 빤한 수입에 두세 가지 레슨비가 차지하는 비용이 적지는 않으리라. 몇 년 전 난 플루트와 피겨 드로잉과 쿵후, 세 가지 교습을 받고 있었다. PBS에서 영국의 청각장애인 타악기 전공의 음악가인 에블린 글레니에 관한 프로그램을 보다가 너무 깊이 감명을 받고 드럼이 갑자기 배우고 싶었다. 유지비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들리는 듯해서 참고 있던 차에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해준 세미나의 강연료를 꽤 많이 받게 되었다. 마누라 모르는 돈이라 시침 뚝 따고 리치먼드의 유명한 밴드인 "파이팅 그래비티 (fighting gravity)" 소속의 드럼머에게 드럼 교습을 받기 시작했다. 마누라 몰래. 그런데 난 바보같이 반년 뒤에 세금보고를 할 때 강연료를 세금보고 해야 하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거다. 마누라가 회계 감사 전공인 공인 회계사라는 것도 말이다. 남은 돈 몇백 불을 봉투에 넣고 이거 당신 옷이나 사라고 했더니  돈이야 하고 표정이 밝아진다. “이때다하고 이실직고했는데 그날 누가 북이 되었는지 또 그 뒷일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난 다시 드럼을 건들지 (?) 했다는 걸 밝혀두고.

플루트가 마누라의 악기라면 나는 낮은 목소리의 악기를 더 좋아한다. 테너 색소폰이라든가 첼로 또 배스 등등어느 날 밤 새로 산 테너 색소폰으로 감정을 잡으며 밤안개를 멋있게(?) 불고 있었는데 마누라가 오더니 자꾸 난 플루트 소리가 더 좋아 라고 한다. 그래도 난 색소폰 소리가 더 좋아라며 계속 부는데 어유 말귀도 어두워라. 색소폰은 너무 소리가 커서 잠을 잘 수 없다고요.  조용히 하라고 그랬는데….”라는 마누라.

갑자기 버린 북을 되찾아 둥둥 울리고 싶어지는 때였다. 자네가 소리하지 내가 북을 잡을 테니 하며 육자배기도 판소리도 시작하고 싶은데…. 누구같이 할 사람 없습니까? 부인에겐 비밀을 보장합니다.

(200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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