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만년 선생님
2021.08.03 05:59
전기 수도가 없는 시골에 살던 어릴 때 희미한 초롱불 아래서 잠자리에 들면 어머니는 누나와 나에게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모모 다로 상(복숭아 동자) 이야기, 시타키리 스즈메(혀 잘린 참새) 이야기 또 우라시마 타로(거북이를 구해 용궁에 간 어부) 이야기 등등 주로 일본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라디오 드라마처럼 재미있게 들려주셨다.
외가댁은 일본 오사카에서 큰 포목상을 하셨는데 2차대전이 끝날 무렵 미군의 공습을 피해 한국으로 귀국하셨다. 오사카에서 낳으시고 여학교까지 모두 그곳에서 마치신 어머니는 우리말이나 문화에 서투르셨다. 당시 나온 일본어판 조선어 문법책으로 혼자서 한글을 배우신 어머니는 나에게 한글을 가르치실 때도 당신이 배운 방법으로 가르치셨다. 커다란 종이에 세로는 자음 가로는 모음을 써 첫 세로줄은 가나다라마바사…. 하는 자음과 모음의 조합을 모두 큰 종이에 써서 벽에 붙이시고 기역에 ㅏ면 ‘가’ 기역에 ㅏ에 기역은 ‘각’ 하시면서 한글 공식을 가르치셨다. 밖에서 동네 아이들이 “대진아 노올자 잠자리 잡으러 가자”라며 날 유혹하고 있었는데 너덧 살 된 나는 어머니 앞에서 무릎을 꿇고 니은에 오에 리을이면 ‘놀’ 지읒에 아면 ‘자’ 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다 배우면 어머니가 재미있는 동화 이야기를 해 주시겠지 하면서. 그러다 한글을 깨우쳤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배울 땐 친구들과 뛰어다니며 잡을 잠자리만 생각나더니 글을 깨우친 뒤엔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재미있는 동화가 신기하게 글자로 변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만화책이며 이야기책들을 읽을 수 있는 것이 날 자유롭게 한 것 같다. 전기도 수도도 없는 촌이어서 학교도 가기 전에 공부를 따로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았을 때 선생님을 하시던 어머니 덕택에 책에 재미 들린 것이다. 이렇게 공식을 깨우치는 것으로 시작한 어머니 교육 때문에 국어가 아닌 수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당시 서른이 안 된 나이에 남편을 유학 보내고 삼 남매를 혼자 책임지고 계시던 어머니는 자식이 뒤떨어질까 봐 불안하셨던 것이 아닐까? 빨리 가르치시려고 문법책을 보며 당신이 깨우치신 방법으로 어린 나에게 가르치신 것은 아닐까? 아둔한 아들의 마음이 잠자리 날개를 타고 하늘 높이 날고 있던 것을 모르시고 어머니를 닮았다고 생각하시면서…
가르치실 때 어머니는 항상 무릎을 꿇어앉으셨고 우리도 어머니 앞에서 무릎을 꿇고 듣는 것이 버릇이 되어서 학교 다닐 때 벌로 무릎 꿇고 앉아있으라면 -자주 그런 일이 있었다- “아 쉬는 시간이구나."라고 생각했지 벌을 받는다는 생각을 안 했다. 자라면서 자주 어머니와 문학 이야기 역사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내가 새로 읽는 모든 책마다 어머니는 어릴 때 읽으신 책들이었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등의 러시아 문학까지 어머니와 경쟁이라도 하듯이 읽었는데 아무리 애써도 어머니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좋아하던 내가 그의 단편 <코>를 읽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슬쩍 보시더니 여기 번역이 잘 못 되었네 하시며 콧물이 아니라 코라고 해야 맞는다며 어머니가 여학교 때 읽으시던 책과 비교하며 설명해주셨다. 류노스케의 <라쇼몽>이나 <갓파>를 읽을 때는 일본 문화의 배경이나 전설을 상세히 가르쳐주셔서 작품을 깊이 감상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일본 책들을 읽기 위해 일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일어로 편지를 써 보내면 항상 틀린 문법이나 문장을 하나씩 고쳐주시고 바른 글쓰기의 예를 들면서 답장해주시던 일들이 기억난다. 하기야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책을 들고 계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자랐고 주무실 때도 항상 책을 읽다 주무시는 걸 보며 자랐으니 그 시간을 다 합하면 내가 어떻게 어머니의 독서를 당하고 생각의 깊이를 어떻게 비교라도 할 수 있으랴. 문학과 시사와 역사를 친구처럼 이야기할 수 있던 어머니를 가진 것은 나에게 커다란 행운이었다.
내 한글교육은 어렵게 하셨지만, 어머니 제자들이 진 선생님은 엄하시지만 재미있고 쉽게 가르치신다고 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내가 학교 선생을 하게 된 것은 부모님이 모두 선생님이신 것을 보고 자랐기 때문이겠지만 그중에 어머니의 영향이 더 큰 것 같다. 어머니는 항상 자식들이 뭘 이해 못 할까 봐 걱정되는지 자꾸 가르쳐주고 싶어 하신다. 몇 년 전 우리 집에서 누나네 식구랑 한국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다가 ‘콘텐츠’란 말을 이상하게 쓰고 있길래 “누나 저기서 이야기하는 콘텐츠가 뭐야?” 했더니 “나도 모르겠다. 문맥이 전혀 맞지 않는데”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갑자기 어머니가 아픈 무릎으로 일어서시더니 끙끙거리며 방에 가셨다 나오시면서 우리에게 물었다. “너희들 아직도 모르겠느냐?” “뭘 말이에요 어머니?” “콘텐츠.” “네 아직도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했더니 “내용이다. 내용” 하시며 미소를 지으셨다. 우리가 영어 단어 뜻을 몰라 그런 줄 알고 힘들게 방에 들어가서 영한사전을 찾아보고 나서 가르쳐주시는 것이었다. 방에 있던 우리 모두 어머니는 못 말리는 ‘만년 선생님’이라고 하면서 가가대소한 것은 물론이다. 엄마 때문에 내가 망신당한 이야기를 해 줄게 하면서 누나가 중학교 일 학년 영어 배울 때 이야기를 했다. 학교 가기 전에 영어를 공부시킨다고 하시며 어머니가 교과서를 미리 예습시켰는데 I am a boy. That is a book 같은 문장을 읽고 해석을 하면서 가르치셨다. 학교에서 누나가 읽는 차례가 와서 “아이 얌 아 보이. 뎃도 이즈 아 부크”라고 어머니에게 배운 데로 책을 읽었더니 선생님이 크게 웃으며 이 일본식 발음은 어디서 배웠니 하는 바람에 망신을 톡톡히 당했다면서 웃었다. 한글은 외국어 가르치듯이 영어는 일본식 발음으로 가르치셨지만, 열성으로 자식들 교육을 하셨으니 자식들이 거의 다 선생님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잘못해도 큰소리로 꾸중을 안 하셨다. 어떤 경우에도 자식의 자존심을 세워주려고 했고 엄한 교육 속에서도 따뜻한 사랑을 느끼게 해주셨다. “옛날엔 안 그랬어야!” 하시며 이모가 들려주신 이야기가 있다. 이모가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다른 아이들은 “호랑이요“ “사자요“ “귀신이요.” 하며 대답하는데 우리 막내 이모는 “네 우리 언니요.”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이 호랑이보다 무서운 언니가 어떤 분이신가 하고 가정방문까지 했다고 하시며 “언니 너무 많이 부드러워지셨어. 하늘과 땅 차이야”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되면 다 이렇게 부드러워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흥이 많으셔서 노래도 잘 부르시고 글을 참 잘 쓰셨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셔 “배움에는 늦다는 것이 없다.” 하시며 공부를 계속하신다. 아흔이 넘으셔도 여행하실 때 필요하다며 매일 영어공부도 하시고 로마사 한국사 등등의 역사도 공부하시고 또 노인 대학에 가서 듣고 싶은 강의를 듣는다. 여행을 무척 좋아하셔 아메리카 대륙을 동서남북 위아래로 섭렵하셨는데 가는 곳마다 지도에 표시하고 메모를 하면서 역사나 도시의 특징을 배우셨다. 몇 년이 지난 뒤에도 그 도시는 이렇더라 이 도시는 이렇더라 하시며 아주 미세한 것까지 기억해내셨다. 내 별명 하나가 <만년 학생>이고 노래를 즐겨 부르는데 이것 또한 어머니에게서 받은 유전자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빨리 펜데믹이 사라져 어머니 휠체어를 밀면서 문학도 이야기하고 만년 선생님이신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노래를 부르며 탄천을 따라 걷고 싶다.
(2021년 4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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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머니 유전자가 어디로 이어졌을까요?
세상 어머니는 완전 훌륭한 스승!
그 어머니의 그 아들!
와우, 세상 최고의 어머니시군요!
지혜의 휠체어를 밀고, 대화하며 밀때
계속 지속되기를...밀어드리는 팔에 제 힘도 보태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