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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삶을 보고 !

2007.11.29 01:17

이 상옥 조회 수:922 추천:115



우리는  많은  선현들이     어느날  자기  주변에  벌어진   사건이나  타인들의  삶을  보고  자신의  장래  목표를 정  한  일들을  많이    알고있다.              
석가모니도       젊은  나이에 가족을  떠나거나  
슈바이쳐 박사의  어린시절,
이웃  친구와의  사소한  사건도  마찬가지다.              
이런  일들이  내겐   없었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정확하게   한번씩  있었다.      
오늘은 먼저   우리   딸아이에게   있었던  사건을  
여러분들과  나누고져  한다.      
물론     이런 것은   다른  사람이   살다  격은   주관적인  
이야기여서    꼭  이렇다   저렇다를  떠나     경험을  
나누는  것이 첫번째   나의   의도니까    보기에  따라서는  내  가족  자랑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판단여하는  물론  여러분들의  몫이니까
난  그러한 전제하에 이런 글을 쓰고자 한다.              


우리  딸아이는  한마디로   모범생이였다.        
항상  책을  많이  읽고  운동도  잘 했으며              
친구도 많아 쉬운  말로 팔방 미인이였었다.                
성격 조차도 조용하고  논리적이며 또 이성적이여서  
나하고는   한마디로 통하는 것이  참  많았다.                  
그  아이가      고등 학교에   들어  갔을  땐    나도
첫  아이여서    그애가  커서  뭐가  
되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본 적도 더러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다가   그해가  아마  1992년     봄이  였을  것이다.    
LA에   폭동이  일어나서                
우리도     주의깊게        사태의  추이를   보기 위해  
티비  뉴스를  보고 있었다 .                  

저녁  ABC 밤   10시   뉴으스가   끝나고              
"  테드  카플   "의
" 나이트  라인     "이란     뉴으스  심층  취제    
프로그램이 곧이여  방영됐다.        
그날 프로그램은 물론  엘에이  폭동이  주제   였으며 흑인  목사들과      
테드  카플,  그리고   우리   동포들을  대표하여    
" 앤잴라   오   "변호사가    참석 했었다.            
아내와  아들 피터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고  
나와  내 딸아이 쏘피아하고   둘이서 자리를
같이 했었다.      

먼저 흑인  목사는       우리   한국계의  미국인들에게  
불평을 한참이나  쏟아   놓았다.              
"  그들은    돈은   우리  동네에서  벌지만   쓰기는  백인  동네에서  쓰며      
손님인   우리들에게  불친절하기  짝이없는 고마워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
당시의   그  말은    거의     사실이였다.              
이에 "  앤잴라   오    "변호사는  이렇게  응수했다.        
"  주류의  백인사회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무감각해서  
현재   슬럼가에서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들에게  
미래를  주지  않았고   이렇게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자        소수 인종간의 마찰로  몰아부치며  
책임을   회피하려  하고 있다.    "고 항변 했다.                  


우리  둘은    그  당시  별로  한말은  없었지만                
우리  딸   아이의   머리  속에는 그  민권   여변호사  
"   앤잴라     오     "여사가   깊이  깊이  각인된  모양이였다.  
어느덧   딸아이가  대학에  진학하게  됐다.              
딸아이는    주저없이   리버럴  앗트   칼리지를  선택하여
전공도  "    정치 학   "을 선택하였다.                
그러면서  내게  한  말은  "  아빠, 난 꿈이  있어요.          !  
나도  앤잴라  오여사처럼  민권   변호사가  되  보고  싶거든요. "
" 그래라.       난   네   꿈이  잘  이루어  지기만  바랄께       !   "

사립대학이여서  부 전공으로    "  러시아  어      "까지
택하여    열심히  공부하는  눈치였다.
대학 이학년이 끝난 후 워싱턴 디씨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인턴  쉽을  하게되여    우리는     2개월   간  생활할  
짐보따리를  싸  들고 가족이  긴 여행을  했다.                
시카고에서 워싱턴 디씨까지  거의 750 마일  가량을
단숨에 내 달렸다.  
디씨의 어메리칸 유니버 씨디  기숙사에 딸아이를
내려놓고   아내와 피터 그리고 나는
작은 형님댁에  들려 하루밤을 자고는 새벽 녁에 다시
시카고로 출발했다.
난 스탑으로 13 시간이  걸리는  지루한  여행이였지만
누구하나 군소리없이  잘 다녀왔다.      

2개월  후  우리 세명은  다시 워싱턴 디씨을 다녀와야 했다.  
딸아이의 인턴쉽이  다 끝났기 때문이다.          
돌아 오는 차안에서  딸아이는 지난 2개월 동안  격은
새로운 이야기로
우리는 지루한 줄  모르고  시카고에 올 수 있었다.
    
이제 다시 9월이 와서  딸아이는  차를 가지고 짐을 싸들고 혼자 학교로 향했고  
대학에 입학한  아들 녀석은  우리가 테워다 줘야했다.  

갑자기 조용해진  집에서  뭔가  허전함  만이 가득하여
우리 부부는 서로의  얼굴만  멀거니 처다보며 지낼 때  
딸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 아빠 !  좀 상의해야 할 일이 있는데  들어 봐 주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정치학을 하면 많이 싸돌아 다녀야 하고  처음에는 실속이 없을 것 같아 전공을 하나
더 해야  할 것 같아요.  "
난  가슴이 덜컥 내려 않았다.      
" 그러면  졸업을 언제하려고 그러냐  ?  "
난  가슴을 조이며  이렇게 물었었다.    
" 걱정마세요.  아빠,  세상없어도 4년 만에 졸업할께요.   "
" 근데 뭘  공부하려고  하니  ?   "
" 요즈음은 주식 시장이 활황이여서  
리스키 메네지먼트를  공부하고 싶어요. "
" 그래 ? 그러면 네가 알아서 하려무나.  "
" 허락해주셔서  고마워요.   아빠   !   "


그렇게하여  딸아이는  복수 전공을 한 덕분에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직장을  세군대나 합격하여  그중에 두군대  를 놓고 고민을 하다가  다른 곳보다  연봉이 15000  불 더 많은  
지금의 직장으로 입사했다.  
정치학 ( 폴러리칼 싸이언즈  )배경을 가졌기 때문에  회사에서 환영을 받았다 한다.              
회사가 민주당을 지지하여  본래부터 민주당원이였든  
딸아이는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조직적으로
선거 운동을 잘하여   지역 마이너리티대표가  되서
전당 대회에도 참석했었다.
그녀는 거기서 알 고어 대통령 후보와 함께 사진도 찍고
갑자기 친해진 모양이다.
아무튼 그는 대통령후보로 보다도 한 인간의 선배로
내 딸 쏘피아에게 현실적으로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려고 한 것 같았다.

" "앗차,    가만 ! "
난 딸아이를 설득하기로 맘을 정했다.  
리더 들은  자신의 사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난 맘에 들지않아서
딸아이가 소수 엘리트의 길을 가지 말도록 은근히 조용한 방법으로 시간을
두고 설득해 버릴 수 밖에     !
" 얘야,  여자는  결혼해서 아이들 낳고 사는것이 가장 쉽게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이란다.
예를 들자면 사람들 아니 여자들 100여명을 놓고 보자. 그중 아마 다섯 사람쯤은 결혼을 하지 안고 평생을
자신의 철학대로 살지만
아흔다섯 사람은 일찌거니 결혼해서 잘 들 사는데  ,,,,,
넌 그중에 어느쪽에 설라고 그러니   ?  "

결국 딸아이는  고민끝에  
평범한  아녀자의 길을 택했다.      
"에   효효    !   "
딸아이에게 주어진  " 챈스 "가 좀  아깝긴  했지만    
그러나  이렇게  아무때나   내가 원하기만 하면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나의 " 축복 "이 아니겠는가  ?
그냥  감사하고 감사할  다름이다.    
내 말은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이루려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정말  자랑스러워서   아이들에게 좋은 꿈을 꾸도록  
부모들이 여러가지로  애써 볼 것을 권해 보라는 뜻으로
이글을 썼 읍니다.      
암튼  끝까지 읽어줘서   "  감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