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이야기
2005.03.28 06:52
봄 이야기
전북대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기초반 김정자
엊그제 때아닌 눈발이 날렸다. 남편은 눈 속에 핀 복수초 꽃을 촬영해야 한다며 새벽부터 서둘렀다. 삼월의 변덕스런 날씨는 금세 봄비로 변하더니 오늘은 따사로운 햇살이 블라인드 사이를 비집고 방안으로 들어오고 싶어했다.
다른 때 같으면 땀흘려가며 배드민턴에 열중할 시간인데 오늘은 그렇지 못하다. 옛날에도 무거운 물건을 들다가 허리를 다친 경험이 있는데도 그 사실을 순간 잊어버린 나는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우둔함으로 아픈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 하고 끙끙 앓았다. 그런데 오늘은 허리의 아픔보다 햇살의 따사로움이 더 느껴지는걸 보니 회복이 되어 가긴 하나 보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수많은 방을 지니고 산다고 한다. 자신만의 비밀들을 모아 놓고 방문을 꼭 잠가버린 방, 옛날부터 읽어왔던 감명 받은 부분들이 적혀있을 책들을 모아놓은 널따란 서재 방이며 세월의 흐름 속에서 순간적으로 눈동자 속에 잡혀버린 앨범에도 없는 사진들을 모아놓은 그런 방들도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뿐일까?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시골집이 송두리째 들어앉은 방도 있을 것이고 조그마한 가슴 한 쪽들을 차지하고 있는 가족 친구들의 방, 그리고 스쳐간 많은 사람들은 있는 듯 없는 듯 방을 차지하고 어느 땐 혼자서 가만히 속삭이기도 하고 ,여럿이 함께 불러내기도 한다.
이처럼 햇살 따뜻한 봄날엔 가슴속 하나의 방을 차지하고 있는 어린 계집애들이 한꺼번에 방문을 열고 뛰쳐나와 그 시절을 이야기하며 말을 걸어온다. 우리 마을에는 올망졸망 내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여덟 명이나 있었다. 그 시절 어느 때인들 힘들지 않았을까 마는 특히 봄은 고구마로 점심식사를 때우기도 힘든 보릿고개를 넘어가던 때였다. 그래도 우리들은 신나기만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동네에 하나밖에 없던 우물에서 물을 길어 집에 있는 항아리를 채우기도 하고 눈이 녹아 내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설이 지나면 바구니를 들고 들판으로 돌아 다녔다.
정월 보름날 전에 세 번 나물을 캐다 먹으면 일년동안 몸이 건강하다는 어른들의 말에 우리는 더 열심히 동네근처의 넓은 논과 밭 두렁을 돌아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겨우내 먹지 못했던 푸른 채소의 비타민과 무기질의 공급이 시급한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 긴 겨울을 김치종류로만 견디어 냈으니 봄나물이야말로 입맛 살리는 보물 같은 것이었다. 그러면서 날씨는 점점 따뜻해지고 나비가 날아다녔다. 우리는 노랑나비를 맨 처음 보면 그 해 좋은 일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흰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을 힐끔 봤으면서도 애써 외면하며 노랑나비를 보려고 애썼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그때 좋은 일이란 무엇이었을까?
아파트 앞으로 난 길이 떠들썩하다. 초등학교 공부가 끝났는지 그 시절 나만한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때 허리에 두르고 뛰면 함석필통에서 딸그락거리는 연필 구르는 소리가 나는 책보자기 대신 여행 가방 같은 책가방의 손잡이를 끌고 가며 저희들끼리 재미있어 한다.
고운 피부, 예쁜 옷. 정말 예쁘다.
그런데 저 애들과 그 시절의 우리는 누가 더 행복할까? 이제 집에 가면 저 아이들은 뭘 할까? 우린 책가방을 마루 끝에 던져 놓고, 고구마 몇 개 부엌에서 찾아먹고는 늦게 나가면 큰일이라도 날것처럼 다시 모여 동네가 떠들썩하게 돌아 다녔는데......
작년 이맘때쯤 오늘처럼 화창한 날을 견디기 힘들어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친구를 불러내어 김밥까지 싸들고 매화꽃이 활짝 어우러진 섬진강상류에 위치한 장구목으로 나들이를 갔었다. 쑥 미나리 원추리 냉이, 알고있는 나물들을 바구니에 캐 담으며 오랜만에 행복한 시절로 돌아가 둘이서 쳐다보며 웃었다. 커다란 소나무 밑에서 김밥과 과일을 먹으며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행복했었다.
허리가 나아가고 있다. 가까운 친구 불러내어 친정동네도 한번 더 둘러보고 매화 흐드러진 강가로 나물도 캐러 가야겠다. 그리고 가슴 한 칸의 방을 차지하고 이런 봄날 나를 불러내는 고향친구들에게 전화라도 하면서 나물 캔 자랑도 슬그머니 하면 그네들 뭐라 그럴까? 세월 속에 묻혀 버린 그때가 그립다.
전북대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기초반 김정자
엊그제 때아닌 눈발이 날렸다. 남편은 눈 속에 핀 복수초 꽃을 촬영해야 한다며 새벽부터 서둘렀다. 삼월의 변덕스런 날씨는 금세 봄비로 변하더니 오늘은 따사로운 햇살이 블라인드 사이를 비집고 방안으로 들어오고 싶어했다.
다른 때 같으면 땀흘려가며 배드민턴에 열중할 시간인데 오늘은 그렇지 못하다. 옛날에도 무거운 물건을 들다가 허리를 다친 경험이 있는데도 그 사실을 순간 잊어버린 나는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우둔함으로 아픈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 하고 끙끙 앓았다. 그런데 오늘은 허리의 아픔보다 햇살의 따사로움이 더 느껴지는걸 보니 회복이 되어 가긴 하나 보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수많은 방을 지니고 산다고 한다. 자신만의 비밀들을 모아 놓고 방문을 꼭 잠가버린 방, 옛날부터 읽어왔던 감명 받은 부분들이 적혀있을 책들을 모아놓은 널따란 서재 방이며 세월의 흐름 속에서 순간적으로 눈동자 속에 잡혀버린 앨범에도 없는 사진들을 모아놓은 그런 방들도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뿐일까?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시골집이 송두리째 들어앉은 방도 있을 것이고 조그마한 가슴 한 쪽들을 차지하고 있는 가족 친구들의 방, 그리고 스쳐간 많은 사람들은 있는 듯 없는 듯 방을 차지하고 어느 땐 혼자서 가만히 속삭이기도 하고 ,여럿이 함께 불러내기도 한다.
이처럼 햇살 따뜻한 봄날엔 가슴속 하나의 방을 차지하고 있는 어린 계집애들이 한꺼번에 방문을 열고 뛰쳐나와 그 시절을 이야기하며 말을 걸어온다. 우리 마을에는 올망졸망 내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여덟 명이나 있었다. 그 시절 어느 때인들 힘들지 않았을까 마는 특히 봄은 고구마로 점심식사를 때우기도 힘든 보릿고개를 넘어가던 때였다. 그래도 우리들은 신나기만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동네에 하나밖에 없던 우물에서 물을 길어 집에 있는 항아리를 채우기도 하고 눈이 녹아 내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설이 지나면 바구니를 들고 들판으로 돌아 다녔다.
정월 보름날 전에 세 번 나물을 캐다 먹으면 일년동안 몸이 건강하다는 어른들의 말에 우리는 더 열심히 동네근처의 넓은 논과 밭 두렁을 돌아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겨우내 먹지 못했던 푸른 채소의 비타민과 무기질의 공급이 시급한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 긴 겨울을 김치종류로만 견디어 냈으니 봄나물이야말로 입맛 살리는 보물 같은 것이었다. 그러면서 날씨는 점점 따뜻해지고 나비가 날아다녔다. 우리는 노랑나비를 맨 처음 보면 그 해 좋은 일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흰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을 힐끔 봤으면서도 애써 외면하며 노랑나비를 보려고 애썼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그때 좋은 일이란 무엇이었을까?
아파트 앞으로 난 길이 떠들썩하다. 초등학교 공부가 끝났는지 그 시절 나만한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때 허리에 두르고 뛰면 함석필통에서 딸그락거리는 연필 구르는 소리가 나는 책보자기 대신 여행 가방 같은 책가방의 손잡이를 끌고 가며 저희들끼리 재미있어 한다.
고운 피부, 예쁜 옷. 정말 예쁘다.
그런데 저 애들과 그 시절의 우리는 누가 더 행복할까? 이제 집에 가면 저 아이들은 뭘 할까? 우린 책가방을 마루 끝에 던져 놓고, 고구마 몇 개 부엌에서 찾아먹고는 늦게 나가면 큰일이라도 날것처럼 다시 모여 동네가 떠들썩하게 돌아 다녔는데......
작년 이맘때쯤 오늘처럼 화창한 날을 견디기 힘들어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친구를 불러내어 김밥까지 싸들고 매화꽃이 활짝 어우러진 섬진강상류에 위치한 장구목으로 나들이를 갔었다. 쑥 미나리 원추리 냉이, 알고있는 나물들을 바구니에 캐 담으며 오랜만에 행복한 시절로 돌아가 둘이서 쳐다보며 웃었다. 커다란 소나무 밑에서 김밥과 과일을 먹으며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행복했었다.
허리가 나아가고 있다. 가까운 친구 불러내어 친정동네도 한번 더 둘러보고 매화 흐드러진 강가로 나물도 캐러 가야겠다. 그리고 가슴 한 칸의 방을 차지하고 이런 봄날 나를 불러내는 고향친구들에게 전화라도 하면서 나물 캔 자랑도 슬그머니 하면 그네들 뭐라 그럴까? 세월 속에 묻혀 버린 그때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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