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은 바리깡 외 1편

2005.04.04 15:07

김지중 조회 수:51 추천:5

30년 넘은 바리깡

김지중(金智中)

  올해 고등학교에 들어갈 우리 집 아들아이가 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르기 시작한지도 꽤나 오래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네 식구 중에서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이 머리를 다듬기 위해 미장원을 출입한다.
  그것도 이젠 미장원이 아니라 ‘머리방’에서?헤어샵?으로 이름조차 바뀌었다. 개명(改名)한 그런 공간이 우리 집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남녀노소들이 드나들며 머리를 손질하는 곳으로 되어버렸다.
  예전의 미장원은 주로 여성들이 드나들고, 이발소는 남자들이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다. 다만, 나의 초등학교 시절에는 여자아이들이 반듯한 단발머리를 하기 위해 남자아이들과 함께 이발소를 드나들었었다. 그 시절에 사용하던 이발기계를 우리는 '바리깡'이라고 불렀다. 한때 그 이름이 일본말이라고 해서 우리말로 순화해 불러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원래 바리깡은 '바리캉(Bariquand)'이라는 불어(佛語)이고, 회사이름으로 'Bariquand et Mare'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런 역사(?)를 지닌 바리깡이 우리 집에도 하나 있다. 그냥 세월의 흐름 속에 묻혀 있었던 것이 아니고 현재진행형으로 지금까지 한 30여 년이 넘게 현역으로 일을 하고 있다. 다름 아닌 내 아버지의 애장품이기도 하고, 우리 형제, 더 나아가 우리 아이들과 조카들을 위한 이발기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용 빈도수가 많고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은 아마도 내가 아닐까 싶다.
  우리 집 아들아이의 경우만 해도 할아버지의 이발 솜씨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바리깡으로 머리를 깎다보니 요즘 이발소나 미장원에서 사용하는 전동(電動) 이발기계의 속도감을 따라가지 못해, 머리카락이 목덜미에서 등줄기로 타고 흐르다가 속옷에 끼어 박히면 따갑기 때문이다. 미장원에서처럼 깎은 머리가 옷 속으로 파고들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차단된 가리개 대신에 어머니가 헝겊으로 만든 간이 가리개를 이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머리를 맡겨 깎아온 지 30여 년이 넘었다. 처음으로 머리를 깎은 게 나의 중학교 시절이었고, 지금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고 성장해서 둘째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니 어느새 그 정도의 세월이 훌쩍 지났다.
  내가 중학시절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대다수의 남학생들은 모두 까까머리 형태였다. 하나같이 검정 교복을 입었고 추운 겨울에도 아랑곳없이 바리깡으로 빡빡 민 민둥머리로 학교를 다녔었다. 그때부터 우리 집 바리깡이 활약하기 시작했다. 이발소에 가는 시간과 이발요금에 대한 부담을 갖지 않고 집에서 손쉽게 용의(容儀)를 단정히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다만 아버지의 힘을 빌리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작해서 군복무 기간과 객지에서의 직장생활 몇 년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빠짐없이 아버지의 손을 통해 머리를 깎는다. 대략 3?4주 간격으로 이발을 하여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예전과 달리 요즘 성인 남자들의 두발형태는 다양하다. 흔히 얘기하는 2:8 가르마에 단정한 공무원 스타일의 점잖은 머리형태는 지긋하게 나이 드신 어른들만의 스타일이 되었다. 노랑은 물론이고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머리는 이제 여성 전유물이 아니라 젊은 남성이나 청소년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헤어 트렌드로 정착된 지 오래다.
  그런 가운데서 나의 두발형태에 변화가 왔다. 하지만 전형적인 2:8 가르마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예전에 빗으로 반듯하게 머리를 빗어 넘겼다면, 요즘에는 오른손 손가락으로 가르맛자리를 쓰­윽 빗어 올리면 되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것이 어쩌면 현재 유행하는 머리 스타일에 필적(匹敵)하는 70대 중반인 우리 아버지만이 지닌 정통 트레이드마크인지도 모른다.
  더불어 30년 된 바리깡은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오신 아버지의 삶의 흔적과 내가 생활해 온 그동안의 과거가 동시에 공존하는 물건이 아닐까 싶다.
                                                        (2005. 02. 17)





  
左)바리깡(수동이발기계)   右)전동(자동) 이발기계  




    
대소인원개하마

김지중(金智中)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나름대로 우리말로 풀이하면, "어른?아이 등 모든 사람들은 탈 것(말? 가마 등)에서 내려 예(禮)를 갖추어야한다."는 뜻이다. 전주의 덕진공원, 정확히 말해서 건지산(乾止山) 조경단(肇慶壇) 입구에 서 있는 비석에 빨간색으로 음각된 글의 내용이다. 비석에 새겨진 글로 보아서 그 주변을 지날 때는 경건하게, 그리고 조용히 하라는 무언의 표지인 셈이다.
  조경단(肇慶壇).
  그 곳은 초등학교 시절에 으fp 가던 봄?가을의 단골 소풍지였다. 그리고 당시, 우리는 조경단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냥 '덕진 왕릉'이라고만 불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이상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조경단이 태조의 21대 할아버지이며 전주(全州) 이씨(李氏)의 시조(始祖)인 사공 이한(司空 李翰)의 묘소란 사실을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던 전주시내의 태평동이나 고사동에서부터 걸어서 덕진 왕릉까지 오는 길은 참으로 멀기만 했다. 두 명이 짝을 이뤄 늘어선 아이들의 소풍길 행렬은, 여름날 햇볕에 엿가락 늘어지듯 하다가도 선생님의 호령 한 마디에 다시 팽팽한 활시위가 되곤 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마냥 즐거웠다. 덕진 왕릉의 넓고 경사진 잔디밭에서 뒹굴고 뛰어 놀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너나 할 것 없이 평소와는 다른 도시락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무를 엷게 켜서 사각의 형태를 만들고 습자지처럼 얇은 종이로 귀퉁이를 발라 만든 도시락에는, 맨밥에 단무지를 길게 썰어 넣고 당근과 시금치와 계란 지단을 넣고 만든 김밥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소풍날은 모처럼 그 맛있는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의 초등학교 시절 조경단은,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하고는 영 거리가 먼 얘기였다. 1899년(광무 3년) 5월에 고종은, 1만여 평의 경내에 주변을 돌담으로 쌓아 동?서?남?북문을 만들고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이라는 비문의 글씨도 친히 쓸 정도로 소중하고 경건하게 전주 이씨의 시조묘(始祖廟)로 정성을 다해 가꿨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소풍갈 당시에는 지금처럼 세련되고 키가 높은 담장이 없어 출입이 자유로워서 우리는 그런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했었다. 그래도 우리의 초등학교 시절에는 조경단이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이었고,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곳이었다.
   지금의 조경단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주변에는 ‘체련공원’이 들어섰고, 조금 더 가면 ‘동물원’이 있으며, 조경단의 길 건너편 쪽으로는 웅장한 ‘한국소리문화의 전당‘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조경단을 중심으로 좌우 양편으로 등산과 산책을 겸한 건지산의 산행길이 시작되는데, 시내 중심가의 인도를 걷는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 건지산 조경단 주변을 거닌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를 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 역시 우리네 선조들은 이처럼 미래까지도 내다보는 혜안(慧眼)을 지녔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2004.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