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퍼즐 찾기

2005.04.05 16:28

유영희 조회 수:35 추천:3

기억의 퍼즐 찾기
전북대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유영희

"오늘 저녁 일곱시 꼭 나올 수 있죠?" 고속도로 운전 중에 잘 아는 전도사님이 전화로 저녁 약속을 상기시켜 주신다. '오늘 저녁 일곱시? 무슨 약속을 했더라?' 기억하고 있음을 전제로 말씀을 하시는데 무슨 약속이냐고 되묻기는 너무 민망하였다. "제가요, 지금 운전 중인데 이어폰을 착용하지 않았거든요. 휴게소 들러서 전화 드리겠습니다." 순간의 난감함을 면해 보고자 통화를 잠시 뒤로 미루었다. 다음 휴게소까지 가는 내내, 꼬깃꼬깃 구겨진 기억의 메모지를 꺼내어 수도 없이 다림질을 해보았다.

'누구랑 저녁을 먹기로 했었나? 무슨 모임이 있나?' 퍼즐을 맞추듯 기억의 조각들을 맞추어 보아도 목요일 저녁 일곱시의 약속은 도무지 그 형체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전도사님께서 내게는 전달하지 않은 약속을 착각하고 계시는 듯하였다. '동군산' 휴게소에서 차 한잔을 들고 의자에 앉았다. 불과 며칠 전 몰아치던 눈보라는 흔적도 없이 완연한 봄이다. 장애인 주차구역에 차 한 대가 들어온다. 무심코 바라보던 차에서 목발을 짚은 여성 장애인이 내리고 있었다. '아! 맞다. 오늘 K호텔에서 여성장애인 인권문제로 좌담회가 열린다고 했지.' 그때야 번개처럼 목요일의 약속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잊지 않겠다고 어딘가 메모까지 해두었던 중요한 약속이었다.

그걸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맡은 남편을 태우러 가겠다고 약속을 또 해놨으니……. 내가 가지 않으면 남편은 시외에서 타고 올 차가 없다. 기억을 살려낸 다음에야 전도사님께 전화를 걸었다. "죄송해서 어쩌죠? 저 도저히 못 갈 것 같은데." 좌담회를 위해 서울에서 일부러 내려오고 계시는 전도사님 입장에선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괜찮다며 다음 약속 날짜를 잊지 말라고 거듭 당부를 해 주셨다. 여기에서도 나는 다음 약속 날짜에 대해서 되물어야만 했다. 다음 목요일 '여성장애인연합회' 임원들 모임이 있음을 전해 듣고 겨우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아침, 열시 반쯤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차 하는 마음이 앞선다. 얼마 전 아이를 출산한 구역식구를 열시 반에 방문하기로 약속을 해놓고, 그걸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서둘러 준비를 하고 나선 시각은 약속시간에서 한참을 넘겨버린 뒤이다. 요즘 들어 번번이 반복하는 실수이다. 잊지 않으려고 메모까지 해두고는 메모장을 찾느라 난리법석을 떨기가 일쑤다.

하루 세 번씩 먹는 약 앞에서도 먹었나, 안 먹었나 하는 기억의 퍼즐 찾기에 골몰할 때가 다반사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퍼즐조각이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는 쓰레기통을 뒤지기까지 하였다. 어느 때는 저녁 약을 잊어버리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녘에 조절이 안 되는 몸 상태에 간밤에 약을 안 먹었음을 그저 짐작하는 것이다. 누굴 탓할 수도 없는 모든 상황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에게 거듭 사과를 하며 스스로에게 짜증을 낸다.

"요즘 왜 이러나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치매 초기 증상 같아." 변명처럼 한 마디를 던졌다. 순간 모였던 식구들은 뜻을 같이 하는 동지가 되었다.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슈퍼에 나갔다가 까마득히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빨래는, 경비실에서 방송을 할 때쯤 이미 시커먼 재가 되어 있었단다. 같은 동 식구들에게 받았던 눈총이야 마땅한 기본이었고, 빨래가 그을린 냄새는 앞뒤 문을 다 열어도 일주일을 가더라는 것이다. 연로하신 시어머님이 시골에서 오시기에 터미널에 마중을 나가기로 약속을 하고는 집안 일을 마치고 잠시 쉬는 틈에 그걸 깜박 잊고 말았단다. 아파트 이름과 동, 호수를 몇 번을 일러드려도 시어머님은 그 퍼즐 조각을 아예 찾으려 들지도 않으시던 분이다. 한 시간을 기다리다 누군가에게 부탁하여 집으로 전화를 걸었던 시어머님의 분노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잃어버렸던 기억들로 인해 겪었던 사건, 사고들을 앞 다투어 털어놓는데 세상 모든 사람이 기억의 퍼즐 찾기에만 매달려 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본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육신의 삶 속에 심겨진 기억들을 하나, 또 하나 지워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월의 무게가 얹어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기억의 조각들을 잃어버리며 살 것이다. 이왕이면 세상을 향한 악한 기억의 퍼즐 조각은 잃어버리고, 아름다운 그림을 맞출 수 있는 조각만 남으면 좋으련만. 친정 조부모 님 기일을 잊지 않으려 달력에 표시를 해놓고 4월을 열던 날, 그게 무슨 표시인지 알아내는데 얼마나 많은 퍼즐 조각이 동원되었던지…….(200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