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묘

2005.08.02 00:00

김재훈 조회 수:44 추천:11

성묘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 김재훈


우리 집엔 좀 특별한 책이 있다. 법화경을 비롯한 여러 불경을 한지에다 베껴 쓴 책인데 아내의 외할머니께서 쓰신 것이다. 열 권이나 되는 책에 붓으로 또박또박 쓴 글씨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지런하기 그지없다. 책마다 마지막 장의 끝마무리에는 가족의 이름을 거명하며 누구누구가 어떻게 되도록 잘 보살펴 주십사 하는 발원도 담겨있다. 6.25전쟁으로 그 누구보다도 아픈 기억을 안고 있는 할머니이셨기에 아마도 그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 이 글을 쓰게 되지 않았나 싶다. 할머니는 글을 쓰시는 동안 세월 저편의 좋았던 기억들을 더듬기도 하고, 현실의 당신 처지를 생각하며 많은 눈물을 훔치시기도 했을 것이다.


전쟁은 할머니에게 너무나 큰 충격을 주었다. 전주에 사셨던 할머니는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던 사위가 납북되었다는 소식에 아연하던 중, 공직에 몸담고 있던 당신의 남편마저 인민군에 의해 목숨을 잃는 슬픔을 당해야 했다. 비록 전란 중이지만 기쁜 명절인 추석에 청천벽력과 같은 비보를 접했으니 할머니는 그때 어디 온전하게 정신을 수습할 겨를이나 있었으랴. 휘영청 뜬 보름달도 할머니의 슬픔을 보며 함께 눈물지었으리라. 졸지에 연거푸 들이닥친 충격적인 사건으로 그 날 이후 하루하루 살아가는 할머니의 가슴속엔 겹겹이 쌓인 슬픔이 도랑을 이루었을 것이다.


하늘이 그 아픔을 알기라도 한 것이었을까. 느닷없는 불행에 절망하던 할머니에게 귀여운 손녀인 아내가 태어나는 경사가 생겼다. 아기는 할머니에게 당신의 남편과 사위의 빈자리를 다소나마 채워주면서 삶에 새로운 희망의 불씨가 됐으리라. 할머니는 손녀를 애지중지 키우시면서 아마도 언젠가 사위가 돌아오면 아이와 함께 오붓한 가정을 이루게 하리라는 간절한 소망을 간직했을 것이다. 그 세월이 50년도 더 넘었으니 그 심정을 몰라주는 세상이 할머니는 얼마나 원망스러우셨을까?


언젠가 우리 가족이 할머니를 모시고 임진강 근처로 드라이브를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휴전선 너머 북녘을 바라 볼 수 있는 전망대에 올라 철책선 너머를 향하여 말씀을 하시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그 날, 할머니는 북녘 땅을 망연히 바라보시다가 가슴 메이는 슬픔과 원통함을 억제 못하시겠는지 한 말씀을 던지셨다.
"이보게 진 서방, 왜 그리 소식이 없는가. 자네 각시가 홀로 저렇게 기다리고 있고, 자네의 유일한 피붙이인 딸도 꿈속에서조차 자네를 그리며 살고 있는데, 왜 이다지도 소식이 없나. 오고 싶어도 올 길이 없다면 살아있다는 소식이라도 전해야 할 게 아닌가. 어여 소식 주게나. 내가 살아 있을 때 자네를 볼 수 있게 소식 좀 주게나, 이 사람아."
당신의 따님과 손녀도 옆에서 나란히 북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니 더욱 가슴이 미어지셨는지 할머니의 목소리는 떨리기까지 했다. 얼마나 가슴에 맺힌 말이었을까. 한 해 두 해 애타게 기다려온 세월이 쌓이고 쌓여 어느덧 50년. 그 가슴은 멍이 들고 또 들어 숯처럼 타버렸을 것만 같았다.  


할머니의 아픈 기억은 일상생활에도 영향이 많았다. 사회가 어지럽거나 남북 간에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 뉴스라도 들을 때면 혹시 전쟁이 재발하지나 않을까 하며 남은 가족들이 언제 무슨 일을 또 당할 줄 모른다며 노심초사하시곤 했다.
그러던 할머니께서 몇 년 전 갑자기 세상을 뜨셨다. 세월도 무심하게 아직 사위를 만나보지도 못했는데 어느 날 조용히 눈을 감으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 할아버님 옆에 누워 계신다. 우리가 오늘 한식을 맞아 찾아온 이곳 익산의 영모원은 보통의 묘역과는 달리 높은 봉분도 거창한 비석도 없다. 묘마다 한 사람이 누울만한 크기의 직사각형으로 흙을 10cm가량 도톰하게 덮었고, 비석도 똑같이 자그마한 평석에 이름 석 자만 새겨졌을 뿐이다. 멀리서 보면 마치 평평한 잔디공원처럼 보인다. 생전의 부귀영화가 죽음 앞에서 무슨 필요가 있으랴. 더 이상 보일 것도 가져갈 것도 없다는 듯, 모두가 공평하고 조촐한 모습들이다. 삶의 애환도, 고달픔도 다 사라진, 풍랑이 멈춘 정적의 바다에 와 있는 듯하다.


할머니는 생전 이 묘역에 들를 때면 할아버지 묘소 앞에 앉아 하실 말씀이 많았다. 쌓인 한의 응어리가 많아서일까. 마치 실타래에서 실이 풀리듯 이야기를 풀어놓으셨다. 그것은 사변에 홀연히 삶을 등진 애석함의 되뇜이기도 했고, 이제는 모든 것 잊고 편히 잠드시라는 주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당신 따님과 사위가 빨리 만날 수 있게 함께 빌어달라는 발원을 담기도 했다.  
할머니는 생전에 그랬듯이 지금 반듯하게 쪽진 머리에 단아한 모습으로 앉아 우리의 절을 받고 계실지도 모른다. 여러 경전을 붓으로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베껴 쓰시던 할머니! 지금도 불경을 외며 마음을 고르고 계시려나? 생전에 사위를 꼭 만나고 싶다던 그 소원을 못 이루고 가셨으니 남은 가족들을 위하여 지금도 저 세상에서 그것을 염원하고 계시려나? 가족에 대해 늘 염려하시던 할머니건만 우리가 앞에서 절을 하는데도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이승의 언어가 필요 없는 적막의 묘역엔 바람 소리마저 멎었고, 너울너울 할머니의 치맛자락 같은 구름만이 하늘에 피었다 사라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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