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막에서 만난 다산정신
2005.09.05 13:08
초당에서 만난 다산정신(茶山精神)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야) 양용모
전남강진에는 영랑 시인의 생가말고 다산초당이라는 가볼 만한 곳이 있다. 강진 시내의 영랑생가를 나온 나는 10여km 떨어진 다산 정약용의 초막으로 향했다. 늘 그렇지만 이런 곳은 관광객이 붐비기 마련이다. 방학을 맞아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아이들의 행동을 저지하며 산을 오르느라 진땀을 뺀다. 음습한 다산 초막은 균여처사 윤단이 초가로 건립한 서당(書堂)으로 후손을 가르치던 곳이었는데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08년 봄 이곳으로 처소를 옮겨 유배가 끝나 고향으로 돌아가던 1818년까지 18명의 제자들과 함께 강학(講學)을 하던 곳이다.
나는 초당의 가장자리에 서서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렸다. 뒷동산의 숲 향기는 초당을 감싸고돌고 천년노송은 곧은 절개로 다산의 마음을 전해주는 듯했다. 철없는 아이들은 산 중턱에 있는 초막의 높음을 탓하며 가쁜 숨을 몰아 쉰다. 초당 뒤편에 다산이 파놓았다는 약천(藥泉)의 샘에서 물길이 끊임없이 치솟고 있었다. 물맛을 보니 그야말로 명경지수다. 꿀맛 같은 물맛이 다산이 늘 마셨다는 차 맛을 일구었나 보다. 초당 옆에는 조그만 연못을 파놓고 잉어를 풀어놓았다. 한가로이 노니는 잉어의 모습이 세월을 잊게 한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조 순조 때 사람이다. 당쟁으로 인한 귀양살이에서 그는 관리들을 위하여 '목민심서'라는 책을 집필하였다. 즉 백성을 위하여 관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밝혀놓은 책이다. 그 목민심서는 베트남의 호지명이 늘 읽었던 책이며, 그가 통일 베트남의 대통령이 된 뒤에도 집무실 책상 위에 놓고 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산은 실학을 집대성한 사람이다. 조선조의 낡은 제도를 고쳐야 된다고 끊임없이 주창하였다. 그는 경세유포, 흠흠신서 등 50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 한양으로 돌아가자 유배지인 강진에서 수학한 제자들이 '다산계'라는 계를 만들어 차나무를 길러 해마다 찻잎을 따 한양에 보냄으로써 마음이 변치 않았음을 보였다고 한다. 그 차를 끓이고 마시던 모습이 눈에 보이는 성싶다. 변절을 밥먹듯이 하는 요즈음 세태를 향해 다산이 묵묵히 꾸짖고 있는 것만 같다.
다산의 진정한 정신세계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백성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그가 써놓은 목민심서에 잘 나타나 있다.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은 어찌해야 하는가. 그것은 높은 학문도 아니고 뛰어난 정치력도 아니었다. 오로지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려는 실용주의였던 것이다. 백성이 편하게 농사를 잘 짓고, 백성들이 쓰는 기구가 편리하면 정치도 잘 되고 나라도 부강해진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욱 강조한 것이 있다면 목민관의 몸가짐이다. 목민관 즉 관리가 부패하면 백성이 곤궁해진다. 관리가 공정치 못하면 억울한 백성이 생겨 나라의 근본이 흔들린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근본이 백성이고 민중일진대 정치가나 교육자, 사회 지도층 등 모든 이들이 늘 귀담아 들어야 함에도 다산초당을 스쳐간 바람처럼 귀담아 듣지 않으니 딱한 노릇이다. 다산의 시 한 수를 음미해 본다.
흥을 달래며
아옹다옹 다투면서 제각기 고집 부려
객창에서 생각하니 눈물이 절로 솟네!
산하는 비좁아서 삼천리인데
어울려 싸우기는 이백 년일세!
영웅들은 길을 잃어 슬퍼하건만
형제들은 어느 때나 재산 싸움 부끄러워
저 하늘 은하수로 말끔히 씻어서
밝은 햇빛 온 누리에 비추게 하였으면.
지금의 형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세계의 열강 틈바구니에서 강토는 두 동강이 나고 민족은 분열되어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처참한 비극도 겪었다. 이제 남북이 화해하여 민족통일의 문을 열려고 하나 국론이 분열되어 쉽지 않다. 가진 자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축재에 열을 올리고 있고, 거리로 내몰린 민중들은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져 버렸다. 어찌하여 이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을까.
초당을 내려오는 마음이 무겁기 그지없다. 옷깃을 여미고 반성하며 내가 사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았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가냘픈 잡초 마냥 미약한 나의 힘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누구를 탓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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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야) 양용모
전남강진에는 영랑 시인의 생가말고 다산초당이라는 가볼 만한 곳이 있다. 강진 시내의 영랑생가를 나온 나는 10여km 떨어진 다산 정약용의 초막으로 향했다. 늘 그렇지만 이런 곳은 관광객이 붐비기 마련이다. 방학을 맞아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아이들의 행동을 저지하며 산을 오르느라 진땀을 뺀다. 음습한 다산 초막은 균여처사 윤단이 초가로 건립한 서당(書堂)으로 후손을 가르치던 곳이었는데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08년 봄 이곳으로 처소를 옮겨 유배가 끝나 고향으로 돌아가던 1818년까지 18명의 제자들과 함께 강학(講學)을 하던 곳이다.
나는 초당의 가장자리에 서서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렸다. 뒷동산의 숲 향기는 초당을 감싸고돌고 천년노송은 곧은 절개로 다산의 마음을 전해주는 듯했다. 철없는 아이들은 산 중턱에 있는 초막의 높음을 탓하며 가쁜 숨을 몰아 쉰다. 초당 뒤편에 다산이 파놓았다는 약천(藥泉)의 샘에서 물길이 끊임없이 치솟고 있었다. 물맛을 보니 그야말로 명경지수다. 꿀맛 같은 물맛이 다산이 늘 마셨다는 차 맛을 일구었나 보다. 초당 옆에는 조그만 연못을 파놓고 잉어를 풀어놓았다. 한가로이 노니는 잉어의 모습이 세월을 잊게 한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조 순조 때 사람이다. 당쟁으로 인한 귀양살이에서 그는 관리들을 위하여 '목민심서'라는 책을 집필하였다. 즉 백성을 위하여 관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밝혀놓은 책이다. 그 목민심서는 베트남의 호지명이 늘 읽었던 책이며, 그가 통일 베트남의 대통령이 된 뒤에도 집무실 책상 위에 놓고 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산은 실학을 집대성한 사람이다. 조선조의 낡은 제도를 고쳐야 된다고 끊임없이 주창하였다. 그는 경세유포, 흠흠신서 등 50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 한양으로 돌아가자 유배지인 강진에서 수학한 제자들이 '다산계'라는 계를 만들어 차나무를 길러 해마다 찻잎을 따 한양에 보냄으로써 마음이 변치 않았음을 보였다고 한다. 그 차를 끓이고 마시던 모습이 눈에 보이는 성싶다. 변절을 밥먹듯이 하는 요즈음 세태를 향해 다산이 묵묵히 꾸짖고 있는 것만 같다.
다산의 진정한 정신세계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백성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그가 써놓은 목민심서에 잘 나타나 있다.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은 어찌해야 하는가. 그것은 높은 학문도 아니고 뛰어난 정치력도 아니었다. 오로지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려는 실용주의였던 것이다. 백성이 편하게 농사를 잘 짓고, 백성들이 쓰는 기구가 편리하면 정치도 잘 되고 나라도 부강해진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욱 강조한 것이 있다면 목민관의 몸가짐이다. 목민관 즉 관리가 부패하면 백성이 곤궁해진다. 관리가 공정치 못하면 억울한 백성이 생겨 나라의 근본이 흔들린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근본이 백성이고 민중일진대 정치가나 교육자, 사회 지도층 등 모든 이들이 늘 귀담아 들어야 함에도 다산초당을 스쳐간 바람처럼 귀담아 듣지 않으니 딱한 노릇이다. 다산의 시 한 수를 음미해 본다.
흥을 달래며
아옹다옹 다투면서 제각기 고집 부려
객창에서 생각하니 눈물이 절로 솟네!
산하는 비좁아서 삼천리인데
어울려 싸우기는 이백 년일세!
영웅들은 길을 잃어 슬퍼하건만
형제들은 어느 때나 재산 싸움 부끄러워
저 하늘 은하수로 말끔히 씻어서
밝은 햇빛 온 누리에 비추게 하였으면.
지금의 형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세계의 열강 틈바구니에서 강토는 두 동강이 나고 민족은 분열되어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처참한 비극도 겪었다. 이제 남북이 화해하여 민족통일의 문을 열려고 하나 국론이 분열되어 쉽지 않다. 가진 자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축재에 열을 올리고 있고, 거리로 내몰린 민중들은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져 버렸다. 어찌하여 이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을까.
초당을 내려오는 마음이 무겁기 그지없다. 옷깃을 여미고 반성하며 내가 사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았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가냘픈 잡초 마냥 미약한 나의 힘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누구를 탓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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