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GPS
2005.08.20 21:16
인생의 GPS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유영희
얼마 전부터, 차 시동을 걸면 늘 인사를 건네 오는 다정한 여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자신을 '안전운전 도우미'라고 소개하고 길 안내를 시작한다. 아리따운 여인의 목소리라는 질투심 때문인지 시끄럽다고 생각하는 나와 달리, 남편은 심심하지 않게 들려오는 멘트가 졸음도 쫓아주고 무료함도 달래주어 고맙다고 한다. 차를 타고 가다보면 잔소리가 보통 심한 여성이 아님을 금방 알게 된다. 그의 이름은 GPS라 불리는 위성항법장치이다.
아무리 먼 길을 동행해도 그녀의 목소리는 도무지 변화가 없다. 무미건조 하다는 말은 그녀에게 들려줘야 할 준비된 표현 같다. 앞 부분 어딘가에 무인 카메라가 있음을 감정 없는 목소리로 전해준다. 경고를 무시하고 제시하는 속도를 넘어서면 "속도를 줄여 주세요!"라는 말만 역시 물기를 쏙 빼버린 채 반복하곤 한다. "과속 방지 턱이 있습니다." "급커브 구간입니다." "구청이 있습니다." 시종일관 감정이 없는 그 목소리는 마치 '네가 아직 모르는 미래를 나는 이미 알고 있다'는 식의 오만한 말투로 들린다.
문득 삶에도 위성항법장치가 존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목적을 향해 무작정 달려가는 현재의 걸음이 속도를 넘어선 것이라면 "속도를 줄여 주세요."라고 인생 GPS는 말할 것이다. 경고를 들은 삶은 무리한 속력을 내던 발걸음에 힘을 뺄 것이다. 밝은 대낮처럼 잘 나가는 삶 앞에 터널이 있으니 전조등을 켜야 한다고 알려 준다면, 우리는 어둠을 통과할 등불을 미리 대비할 수 있으리라. 예고된 터널이니 실족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여 그곳을 통과할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 급커브 인생이 기다리고 있음을 미리 안다면 누구도 궤도를 이탈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정도의 인생 GPS가 있다면 실패라는 단어 자체가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릴 게 아닌가.
승용차에 GPS를 장착하고 얼마동안은 그가 제시하는 친절한 안내 앞에서 그저 감탄하였다. 무인 카메라에 신경을 쓰지 않고 지시에만 잘 따르면 사진을 찍히고 범칙금 고지서를 받는 불행(?)은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GPS가 안겨주는 편리함에 젖어 인생 GPS까지 꿈꾸었던 내가 느닷없이 우스워져 버린 경우가 있었다. 운전 중 법규를 준수한다면 GPS는 없어도 되는 물건이지 않은가? 또한 입력된 정보 외에는 아무리 험난한 길을 가도 안전운전도우미는 그저 침묵할 뿐이다. 설령 대한민국에 나있는 모든 길에 대해 100%의 정확한 정보가 주어진대도 운전자 스스로의 조절이 없다면 역시 무용지물일 따름이다. 도로에는 운전자가 지켜야 할 교통 표지판이 GPS의 안내보다 더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위성항법장치가 아니어도 우리가 가야할 길에 대하여 표지판은 충분히 안내자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눈으로 빤히 볼 수 있는 경고나 안내를 무시하던 운전자로서의 내 버릇이 자신도 모르게 무미건조한 음성의 지시에 길들여져 가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 삶에도 이미 위성항법장치는 존재하고 있었다. 앞서 살다간 선배들이 남긴 흔적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GPS가 아니던가? 내 곁에 머무는 사람 하나하나는 내 삶의 방향과 속도를 제시하는 안내자인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을 새기며 지금 가고 있는 길을 꼼꼼히 살펴본다면 자신이 GPS의 역할을 하기도 할 것이다. 사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지켜야할 것들을 어기면서 인생의 GPS를 꿈꾼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무엇보다 실패라는 단어조차 사라져 버린 인생이라면 성공이라는 의미도 없어져 버릴 것이다. 매끄럽지 못한 나날이지만 탐험과 개척으로 살아온 우리의 삶은 누군가에게 인생의 GPS로 작용될 것이다.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이든…….
요즈음 운전 중에는 GPS의 전원을 꺼버리곤 한다. 비록 같은 길을 달려가지만 GPS에게 조정 당하지 않고 스치는 풍경을 보고 느끼며 혼자만의 감상을 즐기고 싶은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이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한 세대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이웃은 삶의 이정표가 되어 곳곳에서 나에게 삶의 길을 안내해주고 있다. 그 이정표들을 어떻게 선택하는가는 순전히 나의 몫이다. 이정표를 보고 걷다가 아쉬운 부분에서는 나만의 체험을 담은 이정표 하나쯤 세울 수도 있지 않을까. (2005. 8. 14)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유영희
얼마 전부터, 차 시동을 걸면 늘 인사를 건네 오는 다정한 여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자신을 '안전운전 도우미'라고 소개하고 길 안내를 시작한다. 아리따운 여인의 목소리라는 질투심 때문인지 시끄럽다고 생각하는 나와 달리, 남편은 심심하지 않게 들려오는 멘트가 졸음도 쫓아주고 무료함도 달래주어 고맙다고 한다. 차를 타고 가다보면 잔소리가 보통 심한 여성이 아님을 금방 알게 된다. 그의 이름은 GPS라 불리는 위성항법장치이다.
아무리 먼 길을 동행해도 그녀의 목소리는 도무지 변화가 없다. 무미건조 하다는 말은 그녀에게 들려줘야 할 준비된 표현 같다. 앞 부분 어딘가에 무인 카메라가 있음을 감정 없는 목소리로 전해준다. 경고를 무시하고 제시하는 속도를 넘어서면 "속도를 줄여 주세요!"라는 말만 역시 물기를 쏙 빼버린 채 반복하곤 한다. "과속 방지 턱이 있습니다." "급커브 구간입니다." "구청이 있습니다." 시종일관 감정이 없는 그 목소리는 마치 '네가 아직 모르는 미래를 나는 이미 알고 있다'는 식의 오만한 말투로 들린다.
문득 삶에도 위성항법장치가 존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목적을 향해 무작정 달려가는 현재의 걸음이 속도를 넘어선 것이라면 "속도를 줄여 주세요."라고 인생 GPS는 말할 것이다. 경고를 들은 삶은 무리한 속력을 내던 발걸음에 힘을 뺄 것이다. 밝은 대낮처럼 잘 나가는 삶 앞에 터널이 있으니 전조등을 켜야 한다고 알려 준다면, 우리는 어둠을 통과할 등불을 미리 대비할 수 있으리라. 예고된 터널이니 실족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여 그곳을 통과할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 급커브 인생이 기다리고 있음을 미리 안다면 누구도 궤도를 이탈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정도의 인생 GPS가 있다면 실패라는 단어 자체가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릴 게 아닌가.
승용차에 GPS를 장착하고 얼마동안은 그가 제시하는 친절한 안내 앞에서 그저 감탄하였다. 무인 카메라에 신경을 쓰지 않고 지시에만 잘 따르면 사진을 찍히고 범칙금 고지서를 받는 불행(?)은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GPS가 안겨주는 편리함에 젖어 인생 GPS까지 꿈꾸었던 내가 느닷없이 우스워져 버린 경우가 있었다. 운전 중 법규를 준수한다면 GPS는 없어도 되는 물건이지 않은가? 또한 입력된 정보 외에는 아무리 험난한 길을 가도 안전운전도우미는 그저 침묵할 뿐이다. 설령 대한민국에 나있는 모든 길에 대해 100%의 정확한 정보가 주어진대도 운전자 스스로의 조절이 없다면 역시 무용지물일 따름이다. 도로에는 운전자가 지켜야 할 교통 표지판이 GPS의 안내보다 더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위성항법장치가 아니어도 우리가 가야할 길에 대하여 표지판은 충분히 안내자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눈으로 빤히 볼 수 있는 경고나 안내를 무시하던 운전자로서의 내 버릇이 자신도 모르게 무미건조한 음성의 지시에 길들여져 가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 삶에도 이미 위성항법장치는 존재하고 있었다. 앞서 살다간 선배들이 남긴 흔적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GPS가 아니던가? 내 곁에 머무는 사람 하나하나는 내 삶의 방향과 속도를 제시하는 안내자인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을 새기며 지금 가고 있는 길을 꼼꼼히 살펴본다면 자신이 GPS의 역할을 하기도 할 것이다. 사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지켜야할 것들을 어기면서 인생의 GPS를 꿈꾼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무엇보다 실패라는 단어조차 사라져 버린 인생이라면 성공이라는 의미도 없어져 버릴 것이다. 매끄럽지 못한 나날이지만 탐험과 개척으로 살아온 우리의 삶은 누군가에게 인생의 GPS로 작용될 것이다.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이든…….
요즈음 운전 중에는 GPS의 전원을 꺼버리곤 한다. 비록 같은 길을 달려가지만 GPS에게 조정 당하지 않고 스치는 풍경을 보고 느끼며 혼자만의 감상을 즐기고 싶은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이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한 세대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이웃은 삶의 이정표가 되어 곳곳에서 나에게 삶의 길을 안내해주고 있다. 그 이정표들을 어떻게 선택하는가는 순전히 나의 몫이다. 이정표를 보고 걷다가 아쉬운 부분에서는 나만의 체험을 담은 이정표 하나쯤 세울 수도 있지 않을까. (2005.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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