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의 비밀

2005.09.10 19:27

김병규 조회 수:49 추천:7

왕산의 비밀
                                   전북대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 김병규

경남 산청군 금서면에 있는 왕산을 찾았다. 아득한 역사의 물줄기 속에 숱한 전설과 신비가 서려있고, 실화가 비밀처럼 숨어있다 하여 찾고싶던 산이었다.

찜질 방 같은 더위와 장마가 계속되던 8월, 3번 국도를 달리던 2대의 관광버스가 멈춘 곳은 덕양전이었다. 신라 양왕의 선정을 기려 세워진 덕양전은 양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셨고, 삼국시대 이전, 가락국의 시조 김 수로대왕의 위패도 모신 곳이라고 안내판에 기록되어 있었다. 덕양전을 보면 왕산은 먼 옛적 조상들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명산으로 보였다. 수로왕의 69대 후손인 나는 2000년 전 시조 할아버지의 위엄과 자애를 겸비한 모습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던 형상이 떠올라 뜨거운 마음으로 묵념을 드렸다.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그저 안내판만 뚫어질 듯 바라보다가 아쉬운 마음을 안고 발길을 돌렸다.

덕양전 왼쪽에서 시작되는 산행 길 따라 왕산 초입에 이르니, 비밀로 가려지고 신비에 묻혀있는 구형왕능(仇衡王陵)이 눈을 끌었다. 가락국 10대왕인 구형왕능은, 커다란 돌덩이를 모아 맞물리게 결합해서 7층 피라밋 모양의 돌탑으로 쌓여있고, 주변에는 울창한 나무와 숲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돌이 결합된 200여 평의 묘 터에는, 2000년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고 나뭇잎 하나 떨어진 흔적이 없었다. 돌덩이들도 어느 하나 이끼도 끼지 않고 마치 2-3년 전에 옮겨놓은 것처럼 싱싱한 본래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강철이라도 녹아나고 금강석이라도 퇴색할 2000년 세월을 버티고 본래의 형태를 간직한 돌을 바라보며 과연 신비로운 땅으로만 느껴졌다. 가야문화의 실상이 눈에 어리는 듯 싶고 조상의 지혜가 신비스럽게 보였다.

태양열에 취하여 늘어져 졸고있는 나무 밑 그늘 길이지만, 후끈거리는 지열은 고집스런 등산객들의 온 몸을 달구었다. 이곳에서 2km지점에 유의태 약수터라는 이정표를 따라 헉헉거리며 산에 올랐다. 약수터는 계곡이 아니었다. 좌청룡 우백호라는 명당자리도 아니었다. 그저 산 중턱 평범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소문난 샘이라 하여 주변을 정화하거나 치장도 없이 자연이 준 그대로의 옹달샘이었다. 솟아나는 물만은 이가 시리도록 차갑고 시원했다. 유의태 선생께서 약을 달이는 물로 사용했던 약수다.  

이로운 물에는 새벽이슬이 되어 수면에 맺히는 정화수(井華水)가 있고,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새벽에 시간 맞춰 정성 들여 오래 마시면 위암도 치료된다는 한천수(寒天水)가 있다. 가물 때나 장마 때나 영원히 그치지 않고 솟아나는 유의태 약수터 물이 한천수란다.  

유의태 선생은, 1516년 산청군 신안면에서 태어났다. 의술이 신품(神稟)에 이른 선생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며 환자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서 치료하는 등 정성으로 인술을 베풀었다고 한다. 지난해 나는 아들이 허리 수술을 받게되어 수술실에 들어갈 때, 만약에 잘못되어 환자가 희생될 경우라도 항의하거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약정서에 서명한 일이 있다. 과실이나 고의일지라도 책임을 회피하려는 현대판 인술에 쓰디쓴 감정을 버리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농성을 하는 인술을 보면 분노를 금치 못한다. 400년 전 유의태 선생의 인술이 살아나 천하의 의술이 인술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유의태 선생은, 허준이라는 당대의 진정한 의사를 길렀다. 그 제자로 하여금 자기의 배를 갈라 인체내부를 의학적으로 분석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제자 허준은 그 크나큰 과제를 실행하여 인체의 내부를 면밀히 관찰하였다. 이는 인체해부학(人體解剖學)의 효시(嚆矢)이자 질병퇴치에 큰 공적이었다. 스승의 유지를 받든 허준은 '동의보감'을 저술하여 백성들에게 큰 혜택을 주게 하였고 오늘까지도 자랑스러운 의술의 지침서로 남게 하였다. '동의보감'은 우리 겨레에게 은혜로 내려진 보배롭고 값진 선물이며, 유의태 선생과 허준의 위대한 공적이다.

우리 조상의 얼이 담겨있고, 신비로운 비밀이 숨어있으며 거룩한 혼이 담겨있는 왕산이 문을 활짝 열어서, 많은 사람들이 유의태 선생의 희생적 아름다운 정신을 본 받고,  모든 의사들은 인술정신을 본 받아 의술의 지침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2005. 9. 8)
신품(神稟) : 세상의 만병을 진단하여 치료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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