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세일즈맨 // 백 상웅

2010.12.02 23:21

kimheejooh 조회 수:352 추천:28

늙은 세일즈맨



     백상웅







 우리는 영감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른다.

 돗자리에 책을 펼쳐두고 묵은 찌개처럼 졸고 있는 영감, 세일즈맨이라고 부르기에 책들은 영감의 낮잠보다 늙었다.



 이제 책을 펼치면 우리는 주름처럼 밭을 갈아야 한다.

 지난 시대의 문법과 진위를 가리기 힘든 그림 위에, 틀리지 않았지만 틀린 것들 위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



 파는 책처럼 보이지 않는 책, 팔고 싶지만 팔릴 책이 아닌 책,

 헌책이 아닌 책을 파는 영감은 거만한 판매자다.

 날마다 모서리가 무너지고 있는 책들, 우리는 때때로 영감이 펼쳐놓은 것들을 보며 고대도시를 꿈꾸게 된다.



 글자들이 흘러내리고 문법이 틀어진다.

 손금이 지워지자 운명이 바뀐다.

 이름을 새겨두고 지은이가 죽는다.

 돌에 새겨진 이름도 곧 지워진다.

 천장이 뚫리면 지하에서 곰팡이가 번진다.

 도시의 뿌리에서는 벌레가 기어오른다.



   그래도 수로에서는 여전히 물이 흐르고, 어김없이 구름은 능선에 걸리고, 푸른 잎사귀는 죽은 도시를 뒤덮고, 꽃은 핀다.

 영감은 죽은 도시의 문리를 유일하게 판매하는 사람.



 절판된 구름이나 나무, 사랑과 철학, 운명과 레시피… 사라진 책들을 우리는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른다.



 우리는 영원히 뭐라고 불러야할지 모른다.

 그리고 영감을 읽는다.

  





                                 —《딩아돌하》 201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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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상웅 / 1980년 전남 여수 출생. 2008년 시 「각목」 외 3편으로 제8회 〈창비 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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