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집에서// 장석남

2011.03.30 18:14

kimheejooh 조회 수:9246 추천:21

묵집에서     -장석남(1965~ )

묵을 드시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묵집의 표정들은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나는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한다오

서늘함에서

더없는 살의 매끄러움에서

떫고 씁쓸한 뒷맛에서

그리고

아슬아슬한 그 수저질에서

사랑은 늘 이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사랑은 늘 이보다 위태롭지만

상 위에 미끄러져 깨져버린 묵에서도 그만

지난 어느 사랑의 눈빛을 본다오

묵집의 표정은 그리하여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묵을 먹으면서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는 사람 많을라나. 묵의 살 더없이 매끄럽고, 그 성질 잘 깨지고, 잘 미끄러진다고 여자를 연상케 하나. 그렇다면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해보는 사람 여자보다는 남자 쪽이 많으리. 여자의 깨지기 쉬운 성질이 묵 같다기보다는 사랑, 그 자체의 성질이 묵 같은 것일 테지만. 아닌 게 아니라 묵집에서 묵밥 좀 먹으려면 사람들 입 다물려 조용할 것은 같다. 묵 집어먹기란 조심스럽고 위태로운 작업이니까. 서늘한 사랑 아슬아슬 늘 조심스러웠으나 그만 깨져버리고. 씁쓸한 묵 지켜보는 묵집의 표정은 다시 사랑의 눈빛 고여 와 호젓해지고. 묵을 달콤하다고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 시인이 누대로 물려받은 고졸한 천품(天稟)이 녹아 엷게 달콤, 달콤한 맛도 내준다. <이진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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