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이파리 (손 택수 )

2011.03.22 03:24

kimheejooh 조회 수:418 추천:30

              
얼음 이파리   - 손택수(1970~ )

얼어붙은 연못 위에 낙엽이 누워 있다

얼음에 전신을 음각하는 이파리,

파고들어간 자리가

움푹하다

끌도 정도 없이

살갗을 파고드는 비문이 있다면

비문도 나의 살점이 아니겠는가

말을 안으로 감추어버린 백비(白碑)

속에서 말을 꺼내듯

빙판을 어루만지는 손,

덜 아문 딱지라도 뜯듯

이파리를 걷어내자

얼음 속으로 실핏줄이 이어진다

따끔따끔 떨어져나온 자리마다

잎맥이 돋아난다


이틀 짙은 황사가 몰아쳤는데, 다시 영하로 떨어지는 기온이란다. 이번 겨울도 얼마나 꽝꽝한 얼음의 시간이었나. 그런 얼음 속에도 이파리는 내려앉아 자기의 비문을 새기고 백비의 시간을 살았겠지. 얼음 속에 갇힌 겨울 이파리의 서정을 오랫동안 사랑한 적 있다. 금방 집어 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다 비치는 얼음거울에 들어 마른 잎맥을 실핏줄처럼 놓고 있던 모습. 투명하고 청량한 모습. 얼음거울에 자기를 빠뜨린 문학소녀의 서정. 낙엽인 그 이파리 햇빛 속에서 낙엽 타는 냄새를 퍼뜨려 주었지. 남의 시 얼음 이파리에서 옛날에 맡던 낙엽 타는 냄새를 맡는다. 그로부터 얼마나 까마득히 밀려온 것일까. 건조증의 눈에 눈물이 돌 것만 같은 이 뻑뻑한 3월의 전 지구적 이상 상태. 신문과 TV가 연일 부려놓는 묵시록을 보라. 내 얼음 이파리는 밖에 내놓으려 뜯어냈을 적, 실핏줄 잎맥 산산조각 내 저를 찢어버렸다. <이진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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