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창작 - 맹물의 길 / 김영교
2018.06.10 19:23
맹물의 길 - 김영교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이다.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를 뿐이다'.
중국의 철학자 노자의 말이 떠오릅니다.
겨루지 않고 섬기기만 하는 물맛을 아시는지요?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맹물, 그 물맛 말입니다. 요새 생수 바람이 불어 마켓에서도 병물을 사서 마시고 또 가지고 다니면서 손쉽게 마실 수 있는 편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당분이 가미된 음료수나 설탕물 드링크 멀리 한결 같은 무맛의 물맛, 그런 물을 선호하는 현대인의 수가 불고 있는 것만 봐도 건강에 관심을 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추세입니다.
물은 물리는 법이 없고 용해도가 제일 낮아 생명에 직결 되어있다는 보고에 접합니다. 인체의 70%가 물이라고 하니 병이 난 몸은 바로 물주머니가 탈이 난 것이라 봐도 틀린 얘기는 아닌 듯싶습니다. 출혈이나 뼈가 부러지는 것도 다 물주무니가 터진 것이고, 피부가 건조해 탄력성을 잃거나 주름이 생기는 것도 다 수분 부족이라 하니 이래저래 물주머니를 늘 채우는 게 건강관리 첫 관문이라 여겨집니다. 단물은 쉬 물리기 쉽고 또 쓴맛의 물은 몸에는 이로워도 곧잘 입에서 퇴자를 맞습니다. 옛 부터 군자의 사귐은 맹물 같아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습니다. 변함없는 사람, 잔꾀 피우지 않고 안팎이 같은 맹물 같은 사람에게는 진실성이 있어 이에 가치를 둔 말이겠습니다.
물의 속성을 지닌 세상의 가장 작은 단위, 물 한 방울의 그 시작은 극히 미세하고 연약해 보입니다. 이른 아침 낮은 풀잎에 기대어 반짝이는 작디작은 몸집의 물방울은 보는 이의 가슴을 촉촉한 행복감에 젖어 들게 합니다. 비록 증발할지라도 없어지지 않는 물, 열을 받아 견딜 수 없을 때는 김으로 살아남기도 하고 추우면 얼음으로 피신했다가 녹아서 제자리로 돌아 올 줄도 압니다. 때로는 모여 반사의 힘으로 아름다운 무지개를 띄워 신의 사랑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물의 재롱은 한이 없습니다.
물방울은 약하지만 모이면 엄청난 힘이 된다는 게 물의 품성이지 않습니까? 바위를 뚫는 낙수는 한 방울씩 지속적인 반복의 힘에서 비롯됩니다. 작고 약한 한 방울, 두 방울의 끈기, 물이 모여서 시작된 실개천은 강의 과정을 거쳐 그 끝은 창대한 바다가 되는 것만 봐도 그렇지요. 낮은 곳을 먼저 채우는 물을 보면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오염된 흙탕물을 안으로 가라앉히는 물에서는 인내 다음에 오는 고요를 배웁니다. 공평하면서도 유연하여 주변을 다 껴안는 물의 넓은 가슴에서는 포용을 배우기도 하지요.
때 묻고 냄새나는 마음을 씻어주기도 하는 물은 어머니요, 고향이요, 생명입니다. 물을 마시고 물로 씻고 그 안에 헤엄칠 때 또 그 소리를 듣고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편안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모천은 바로 자궁안의 물주머니이기 때문입니다. 물을 마시면서, 이슬방울을 바라보면서 그 입자 한 개도 빛을 받으면 우주와 교감하는 안테나가 작동하는 게 신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식이 날아가고 집이 날아가는 요즘 같은 불경기에 물의 습성을 배우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스트레스 무게가 힘들어도 흐르기를 멈추지 않는 강물이고 싶고, 껴안을 수 없는 곤혹 상황마저 껴안으며 함께 흘러가기를 열망하고 있는 이웃 모두의 어려운 형편이 아닙니까.
성서에 있는 물을 통한 아름다운 예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옛날 수가성에 그것도 땡볕 대낮에 물 길러 왔던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고 왔던 물동이를 내 팽개치고 마을로 달려가 방금 만난 메시아를 증거 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찾은 목마르지 않는 생수 역시 물방울의 집합체입니다. 상징적인 물이긴 합니다만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물을 은유화한 현장입니다.
한때 저 자신도 갈증의 언덕을 헤맨 적이 있었습니다. 응달이던 제 삶이 가장 연약한 때 였고 그때 생수를 만나게 되었고 그 생수를 마시면서 눈이 뜨여 드디어 눈을 떴습니다. 깨달음으로 이어지면서 엉기고 부딪치며 더 크게 합치며 이제 떼 지어 덮쳐오는 파도가 되어 은혜의 해변을 출렁입니다. 가장 작은 입자인 물방울과 인간의 심장이 교감하면 세상은 더 살기 좋은 곳, 선함과 아름다움으로 환해질 것을 믿습니다. 지상에 있는 바로 작은 천국의 모형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름대로 이 벅찬 기쁨에 동참하고 나누도록 용기와 응원을 아끼지 않는 기도의 동역자들이 있어 기도의 심천(心泉)은 지속적으로 솟아 흐를것을 확신합니다.
결핍으로 허기진 제 삶이 흔들릴 때마다 말씀의 물가에서 갈증을 해결 받았습니다. 물을 마시고 물로 씻을 때 영혼의 뒤꿈치까지 청결해짐을 체험, 이 특이한 환희를 물방울의 투명함으로 고백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맹물이 바로 예수라는 이 기 막힌 사실이 <거저> 라는, <공짜>라는 데에 더 놀라운 은혜가 숨어있습니다. 이런 맹물 마시고 싶지 않으신지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정지원
단 한 번일지라도
목숨과 바꿀 사랑을 배운 사람은
노래가 내밀던 손수건 한 장의
온기를 잊지 못하리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도
거기에서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리
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 되면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
밤이 길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누가 뭐래도 믿고 기다려주며
마지막까지 남아
다순 화음으로 어울리는 사람은 찾으리
무수한 가락이 흐르며 만든
노래가 우리를 지켜준다는 뜻을
- 시집『내 꿈의 방향을 묻는다』 (문학동네,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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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잘 알려진 노래의 가사가 된 원본 시다. “밤이 길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이 대목에서 느끼는 숨 가쁜 격정과 생명력,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에서 휘감기는 뜨거운 사랑의 선동성에 감염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으랴. 20년 세월이 흘렀지만 이 노래는 더 오랫동안 우리 곁에 ‘짙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강물같이’ 휘돌거나 스며들 것이다. 그리고‘‘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고난을 이기는 자, 희망을 버리지 않는 자, 또 그것을 믿고 기다려 주는 자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사실은 변치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나 자신의 신념을 꿋꿋하게 지키며 살아간다는 게 그리 쉽지는 않다. 그것은 때때로 고독하고 외로운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이 크게 와 닿는다. 하지만 그 외로움을 피하지 않고 껴안을 때 비로소 숲이 되고, 산이 되고, 메아리가 된다. 고난을 감수하고 외로움을 참아내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신념이 있는 한,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일 것이다.
시집『내 꿈의 방향을 묻는다』 맨 앞에는 <내가 꿈꾸는 세상>이란 제목의 짧은 시가 있다. “내가 꿈꾸는 세상은/ 깎이고 갇힌 희망이 터져 나오는 땅/ 흙의 평등/ 바람의 자유/ 물의 평화// 바라보지 않아도 꽃이 피어나고/ 기억하지 않아도 잎이 출렁이는 땅” 그러므로 역사를 외면하거나 광장으로부터 퇴각하지 아니하고 함께 꿈의 방향으로 나아갈 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으리라. 그러자면 나 자신부터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흙의 평등, 바람의 자유, 물의 평화’를 힘껏 노래해야겠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역사적인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잘 끝났다. 첫 만남치고 그만하면 그들과 우리 모두 A-정도는 된다. 오늘은 그대들에게 꽃보다 아름답다고 말해주고싶다. 김정은 위원장은 모두 발언에서“우리한테는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또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우리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는데 우린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엄지 척으로 화답했다. 이 발언에는 여러 함의가 있겠으나 북한 내부의 속사정을 드러낸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북한 군부 강경파들의 태클이 적지 않았다는 토로다. 이 말은 우리의 일부 야당과 미국 네오콘도 귀담아듣고 지난 편견을 버렸으면 좋겠다. ‘누가 뭐래도’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으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거스를 수 없는 길을 함께 가야겠다.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