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이월란
나도 나를 늘 <우리>라고 불러왔다
혼자서 장을 보러 갈 때도
<우리 이제 장보러 갈까?>라고 내게 물었듯이
나도 나를 언제나 <우리>라고 불러왔다
탈출하듯 달려와 낯선 방문을 열 때마다 나보다 먼저 뛰어와
짐 풀고 있던 또 다른 나를 기억하기에
벌써부터 감지된 절망의 장면 속으로 일찌감치 마중 나가
미리 눈물을 흘려주고 있던 나를 두려워 하기에
무저갱의 불꽃 속에서 붉은 춤을 추던 두 발을
설국같은 천국의 정원에서 삐걱거리던 흔들의자를
나는 여전히 서러워 하기에
또 다른 나는 가능한 한 실종당했다, 불필요한 장면처럼
제3국어의 악센트처럼 몽상적이었고
모국어의 자막이 없어도 될 만큼 대본은 과감히 삭제되었다
군데군데 난해한 장면들이 배앓이를 불러오기도 하는
내 생의 필름이 <The End>를 알리기 전에
전생과 후생 같은 두 개의 삶을 이중생활의 묘한 뉘앙스로
비틀어버린 생의 통역을 알뜰히 배우며
아득한 슬픔의 발원지를, 따뜻한 눈물의 진원지를
그녀에게 모두 전가시킨다
죽어버린 베로니카에게
살아있는 베로니카에게
2008-12-03
*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 크쥐시토프 키에슬로브스키 감독의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