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라*
이월란
너의 이름은 밤
어둠만 반죽하여도 생명이 발효되는 검은 스크린 속
조리대 위에서 불꽃의 점화를 기다리는 설익은 생의 열매라지
운명의 검은 자루 속에서도 봇짐처럼 던져지는 목숨
흑단의 머리 홀로 깨는 어둠 속에서도 동맥 속을 흐르는 따뜻한 피의
소리가 있어, 귀먹은 건반이 영혼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어
부서진 귓뼈 사이로 듣지 않아도 들리던 생명의 아우성
불길한 검은 새의 울음소리는 검은 살빛으로 우는 너의 목청을 닮아 있었지
폐타이어같은 두 발은 희망과 절망의 국경을 넘고 넘어도
좌초된 가슴이 널부러진 거리마다 상처 입은 새 한 마리씩 날아와
유괴당한 세월에, 학대 받은 유년으로, 철들지 못한 청춘 앞에
발기된 세상은 관음증 환자처럼 빗 속에 서 있어도
바람만 먹고도 잎은 무성해, 눈비만 맞고도 꽃은 피어
뿌리 박힌 원시의 생가에 가슴을 묻었다지
미개한 육신도 흑노의 고향을 향해 아침마다 눈을 떴다지
우리에게 우리의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
어느 날은 놓아도 보고, 어느 날은 움켜 쥐어도 보는
빚어진 찰흙 한 줌에도 열꽃이 피어
힐랄의 귀고리 반짝이는 검은 부족의 대지를 향해
오늘도 돌아간다는 것, 내일도 꿈을 꾼다는 것
외줄로 이어진 탯줄 따라 태반처럼 앉아 있는
늙은 어미의 화석같은 손등 위에 길고도 슬픈 기다림을 놓기 위해
마천루의 탁류를 헤엄쳐 원시의 그루터기를 타고 오르는 길
뭇시선 아래 엎드린 몸으로도 풀잎의 하프를 연주하며
세상의 바닥을 핥은 손으로도 그어보는 무흠한 성호
오늘은 바다를 건너고 내일은 사막을 지를지라도
살아 있는 이에게서 죽음을 건져내고
죽은 이에게서 생명을 솎아내는
신은 어디에
태양을 숨긴 밤은 어디에
2008-12-19
* 라일라 : 르 클레지오 작 <황금물고기>의 주인공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