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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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여전히 사랑합니다'

2007.02.12 05:29

오연희 조회 수:933 추천:190

연초부터 한국의 한 유명 연예인 커플의 결혼 2주만의 파경과 관련된 폭행사건이 사람들의 가슴을 철렁 내려 앉게 하고 있다.

비참한 몰골로 병실에 누워있는 여자 사진과 함께한 기사를 접했을 때 한국 방송을 거의 보지 않아서인지 이름만으로는 원래의 그녀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모 여성지 2007년 신년호 표지를 장식한 너무도 아름다운 그 여성이 바로 파경사건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짐작할 수 없었다.

무심코 책을 넘기는데 '12월의 신부'라는 제목과 함께 눈부시게 고운 여자와 지긋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가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앗! 바로 그들이네…' 놀란 가슴으로 기사와 사진을 자세히 들여 다 보았다.

결혼 전부터 여자를 너무나도 가혹하게 폭행했다는 사실이 웃음꽃 활짝 피어 오른 기사 위로 겹쳐졌다. 보여지는 삶과 실제의 삶의 거리가 저처럼 멀 수도 있구나. 사랑이 저처럼 전락할 수도 있는 거구나. 분노 안타까움에 이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그들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모자를 푹 눌러쓴 그 사건 속의 남자가 '여전히 사랑합니다' 울먹이며 기자 회견을 하고 있는 영상물이 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아니 '사랑'이라는 말에게 미안하다고 해야 될 것 같았다.

읽고 있던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라는 한국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는 공지영 소설가의 산문집을 폈다.

하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학대가 일어날 수도 있고 비겁한 위인과 순결한 배반자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라는 구절이 내 눈을 꽉 붙잡았다. 이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지난 날들에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학대가 일어날수 있음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 연예인 부모님의 참담한 심정을 상상해 보았다.

부모라는 자리가 무겁게 다가왔다. 각각 성이 다른 세 자녀를 낳은 그 작가의 엄마 위치를 생각해 보았다. 아찔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한결 같은 마음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끔찍한 폭력을 행사하고도 '여전히 사랑합니다' 라거나 학대 당했던 경험을 미화하는 듯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학대가 일어날수도 있다' 는 말은 참 듣기 민망하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혹은 잘 되라고 하는 것 중에 '잔소리'와 체벌이 있다. 같은 말이라도 부모 말은 듣기 싫은 잔소리고 다른 사람 말은 귀담아 듣는 자녀가 어디 한둘이랴. 그래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 '잔소리' 라는 생각을 해본다. 자녀의 능력에 관계없이 닥달만 하는 잔소리는 곤란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 보면 고쳐져 있는 나쁜 버릇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체벌은 아무래도 좀 다른 것 같다. 자녀와 부모사이의 어떤 규율에 의한 체벌이 아닌 감정이 가득 실린 체벌은 자칫 자녀의 인격에 손상을 입힐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난 후에는 매를 댄 부모쪽이 더 가슴을 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초등학생 이었던 아들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심하게 매를 들었던 일로 몹쓸 엄마가 된 적이 있다. 그 당시의 상황과 후회의 글을 '사랑의 매'라는 제목으로 3년 전 이지면을 통해 고백한 적이 있다. 오래된 그때의 칼럼을 찾아내 며칠 전 주말이라 집에 온 아들에게 읽어보라고 주었다.

"매를 맞은 것은 어렴풋이 기억해요. 그런데 왜 그랬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는데… 그때 그랬어요?" 새삼스러운 모양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내가 옳다는 생각에 젖어서 저지른 일임을 매를 댄 내 쪽이 더 잘 안다.

'사랑은 오래참고…'로 시작하는 성경말씀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부모 자식간에 폭행이나 학대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면 안 되는 일이다. 하물며 동등한 위치에 있는 연인이나 부부사이라면 더 말해서 뭣하랴. "신뢰는 유리 거울 같은 것이다. 한번 금이 가면 원래대로 하나가 될 수는 없다." 스위스 철학자 아미엘의 말이다.

ohyeonhe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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