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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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고맙다

2007.03.19 04:18

오연희 조회 수:1071 추천:184


그린색 비로드 융단을 깔아놓은 듯 촘촘하고 곱던 우리집 뒤뜰 잔디가 요즘 머리에 버짐 난 것처럼 누렇다.

지난 겨울 스프링쿨러가 고장 나 호스를 연결해 간간이 물을 줬지만 흡족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있는 줄도 몰랐던 꽃나무들은 땅을 뚫고 쑥쑥 솟아나고 있건만 잔디는 누렇다 못해 허옇다.

뒷마당 풍경을 완전히 버려놓은 잔디를 바라보다가 잔디밭 가장자리에 듬성듬성 올라와 있는 초록빛에 눈길이 갔다.

그나마 잔디밭의 명맥을 유지하는 그 초록빛은 평소 기를 쓰고 패내던 잡초였다. 뿌리가 깊고 넓어 패낸 구멍이 어찌나 흉하던지 엄청 구박했었는데 가뭄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 남은 저 푸릇푸릇한 잡초가 오늘은 참 고맙다.

'고맙다'는 말은 도움을 받거나 은혜를 입거나 하여 마음이 흐뭇하다 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도움이나 은혜 없이 하루도 살아갈 수 없으면서 '고맙다'는 말 쉽게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도움을 주거나 은혜를 끼치기는커녕 진짜잔디를 못살게 군 잡초가 고맙게 느껴질 때가 올 줄은 몰랐다.

나는 종종 한국에 사시는 부모님께 전화를 드린다. 시어머님의 연세는 아흔 넷이고 친정 아버님은 여든넷 이시다.

시어머님은 귀가 잘 들리지 않으셔서 당신 할말만 하시고 툭 끊어버린다. 전화내용은 주로 우리가족의 안부를 묻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말씀이 늘 '고맙다' 이다. 뭐가 고마울까. 명절이고 생신이고 제때 찾아 뵙지도 못하고 전화 한 통화로 때우는데…

얼마 전에는 친정집에 안부 전화를 드렸다. 삼년 전 갑자기 다리에 기운이 쭉 빠지면서 거동이 불편해 지신 아버지가 받으셨다.

전화선을 타고 바삭 마른 음성이 들려 왔다. 이런저런 동네소식 그리고 언니 동생네 안부까지 다 여쭈었더니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다. 좀 더 자주 전화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전화를 끊으면서 '고맙다'고 하셨다. 기분이 이상했다. 기쁘지가 않았다. 마음이 약해지신 것 같아 울적했다.

나의 딸과 아들은 보통 용건이 있어야 전화를 해오는 편이다. 하지만 남편과 나는 용건 없어도 수시로 전화를 건다.

밥 먹다가 딸이 좋아하는 반찬이 나오면 얘는 뭐 먹고 사나 싶어 전화를 한다.

산책하다가 아들의 이번 주말 스케쥴은 어떻게 되나 싶어 전화한다. TV나 라디오에서 학생들 사고소식이라도 들리면 '조심 해라' 하고 전화한다. 많은 생각들이 아이들쪽으로 향해져 있다.

그저께는 딸이 전화를 해왔다. 용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했다고 한다. '그냥' 이라는 말이 참 푸근했다. 한참 수다를 떨었다. 그런데 전화를 끊으면서 '고맙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내 말에 내가 놀랐다. 부모님이 하셨던 '고맙다'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나도 늙나 보다' 싶은 마음에 조금 서글퍼졌다.

해줄 수 있는 좋은 것은 자녀에게 다 주고도 직접 섬기는 것도 아닌 문명의 이기를 사용해 잠깐 시간을 내주는 자녀를 그리 고맙게 여기시는 분 그 '약자' 의 자리에 기꺼운 마음으로 앉아계신 '부모'라는 이름을 생각을 해본다.

낮아진 자리에서 보면 모든 것이 고마운 모양이다.

내가 작아진다는 것은 네가 크기를 바란다는 뜻일 것 같다. 이땅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자녀의 바쁜 삶을 이해하기에 전화 한 통화에도 고마워 할 수 있나 보다.

부모로써 하느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부족했던 것 같은 아쉬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을 충분히 공급하지 못해 누렇게 뜬 잔디에게는 미안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살아남은 짙은 초록빛 잡초가 고맙다.

호스 길이가 닿지않아 튀는 물에 간신히 목을 축인 저 구석의 꽃이 종이처럼 팔팔 날리는 부겐빌리아도 고맙다.

건강한 기대만 남기고 아이들을 피곤하게 하는 지나친 관심이나 간섭을 버릴 때 '고맙다'는 말을 더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다.

ohyeonhee@hotmail.com
신문발행일 :2007. 0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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