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02 15:30
이만구(李滿九) 시인 프로필
1957년 (호적에는 1958년) 전북 군산 출생
1975년 군산동고 교지에 단편소설 '동창생' 입선
1981년 서강대 전자공학과 졸업
1982년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입소
1983년 서강대 전자공학과 대학원 졸업
1990년 오레곤 주립대 공학박사
1997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달라스 성당 '대건 이십년 기념집' 편집위원
1998-9년 Marquis Who's Who in Science & Engineering에 등재
2001년 IEEE 협회에서 Sr. Member로 선정
2017년《미주가톨릭문학》시 부문 신인상 수상
2018년 계간《시와정신》으로 등단
2019년 북가주 새크라멘토 정혜 엘리사벳 성당, 정혜글방 방장
미주한국문인협회 및 미주가톨릭문인협회 회원
* 1990년부터 미국 반도체 회사 Sharp, TI, IBM, Atmel 등을 거쳐 현재 샌디에이고 pSemi 근무.
2024년 갑진년 12월
시집 제목: 가을에 핀 배꽃
시인의 말
첫 시집을 내면서 '나에게 시란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다. 고국에서 전공한 나의 외길, 물리전자 반도체 분야에서 나는 지금까지 40여 년간 일해왔다. 이국의 팍팍한 생활전선 일터에서 시간을 내어 시를 쓴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내 감성의 기록이요, 또한 유일한 기쁨이 되곤 했다. 1987년 여름, 나는 30세의 나이에 고국의 에트리 연구소를 떠나, 달랑 유학가방 하나 들고 시애틀 공항에 홀로 내린 것이 결국 미국에 정착하여 살게 된 운명의 계기가 되었다. 그 후, 나는 다행히도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자수성가하여 작은 것에 만족하며 독립적으로 생활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런 이국의 현실적인 환경 속에서 시를 쓰다 보니, 처음 꿈꾸었던 서정시인으로서의 롤모델도 급변하는 현대적 감각에 그리 부흥치 못하였음을 느끼며, 그동안 독자를 위한 좀 더 좋은 시를 쓰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 시집의 세 가지 키워드로는 향수, 고뇌, 동심으로 정리하고 싶다. 행복했던 유년기, 고국에서 부모형제들과 함께 살아온 기억에 대한 '향수'는 내 시의 밑천이요 뿌리였다. 고향의 토속적인 향토문화 속에서 스무 살까지 들새처럼 살아온 꿈같은 시절은 나의 서정적 시세계를 좀 더 폭넓게 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후 나는 상경하여 어렵게 대학을 마치게 되었고, 졸업 후에도 낯선 객지로 떠돌면서 학문과 인생을 준비하며 불태운 내 젊은 시절의 '고뇌'라 하겠다. 고국에서의 첫 직장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시절, 실리콘벨리에서의 해외연수를 계기로 유학을 꿈꾸었고, 결국 신토불이 고국을 떠나게 되었다. 그때부터 운명처럼 찾아온 제2의 삶,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개척해 온 30여 년의 잃어버린 세월 속에서 어쩌면 다시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는 예감 때문일까, 늘 먼 곳에 대한 그리움으로 시를 썼다. 그리고 상흔의 치유는 결국, 고향을 등진 아픔을 형상화하는 나의 '동심'에 대한 회귀라 할 수 있겠다.
나는, 미국 Sharp사, 첫 직장을 잡아 밴쿠버 콜롬비아 강가에 둥지를 틀고 고향에서 홀로 사시던 아버님 모셔와 아내랑 함께 살던 행복한 오레곤 시절이 있었다. 비록 적은 월급이었지만, 세 식구 알콩달콩 살던 때부터 나는 인생을 그려내고 삶의 진실을 노래하는 시의 매력에 반하여 틈틈이 습작하게 되었다. 그동안 쓴 시들 중 다소 보편적이고 서정적인 것들만 골라 미흡하나마 한 권의 시집으로 엮었다. 어떤 것들은 독자 여러분께 선보이기에 부끄러운 것도 없지 않으나, 시를 제대로 모르던 시절에 쓴 몇 편의 시들도 순수함과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집에 담아 보았다. 가끔은 혼자만의 창작 공부를 하면서 나의 시작에 대한 부족함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나는 꾸준히 참신한 감각과 생활의 통찰력으로 습작하면서, 다행히도 이순이 되어서야 비로소 등단 시인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3년 전 일기장에 시에 대한 나의 열망과 포부를 다음과 같이 썼다.
요즘은 밤늦게까지 시작에 열중하는 시간이 길어진 것 같다. 새벽 한 시를 가리키는 벽시계를 보면서 오늘 밤은 유난히도 한 비운의 젊은 시인이 떠오른다. 그를 유행가 풍의 통속적인 시인이라 부르던 이도 있었다. 생각건대, 그는 한국동란을 겪으며, 아마 불행히도 의사의 꿈과 현실을 저버리고 시작에 몰두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그는 대표시 끝말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의 그런 심정으로 목마처럼 별나라로 떠나 간지도 모른다. 그가 화물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와, 장미의 도시 오레곤에서 잠시 살면서 쓴 시 '새벽 한 시의 시'의 고뇌와 우수를 다시 되새겨 본다.
학위를 마치던 1990년, 나는 이곳에 직장을 얻게 되어, 우연히도 그가 마셨던 진피스에 취해 본 적이 있다. 산과 강이 어우러진 포틀랜드 다운타운, 힐튼호텔 앞 네온사인 불빛 비치는 밤거리를 고국에서 보낸 젊은 날을 회상하며 혼자서 쓸쓸히 배회하곤 했다. 그러다 아래로 내려와 윌라메트 강가 워터프런트에 비친 밤하늘의 별빛을 보며 나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의 시를 생각했었다. 시속에 담긴 그의 심정처럼 예측할 수 없었던 홀로 남겨진 나의 불안한 미래 때문이었을까? 가을날의 찬비 내리는 밤거리, 뒹구는 가로수낙엽을 밟으며 사랑과 인생과 삶의 애증으로 괴로워했었다. 세월은 가도 그의 시어는 아직도 내 가슴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중후한 필치로 인생을 노래한 그를 기리는 첫 문학상 수상자인 서은, 고 문병란 선생님처럼, 나도 그의 시 세계를 이어가는 서정시인이 되고 싶었다.
이러한 포부에도 불구하고 바쁜 일상 속에서 그것은 단지 나의 장래 희망이었을 뿐 돌이켜보면, 나의 초기 시들은 문학적인 보편성과 안목보다는 평소 생활 속에서 개인적 발견과 잊지 못할 나의 어머니 (안안순, 1923년 남원 출생) 대한 남다른 감성에 치우치지 않았나 하는 솔직한 고백이 앞선다. 뒤뜰에서 혼자서 일하다, 몇 주 끙끙 앓고 난 뒤, 겨우 기운차려 쓰레기 봉지를 들고 버리러 나온 아내의 얼굴을 뒤뜰에서 일하며 우연히 훔쳐본 적이 있다. 어찌 보면, 그런 일상의 일들이 1977년 여름, 고향집에서 앓고 있던 어머니를 지켜보던 속수무책의 아버지 마음이랄까. 나는 그때의 일을 지금도 가슴에 묻고 산다. 그 당시 대학생인 나는 가톨릭 학생반 여름 봉사활동으로 강원도에 있었다. 어머니의 임종에 함께하지 못했던 나는 그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이국 하늘아래 반생을 살면서 늘 불효자라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아마 불현듯 그런 나의 과거가 초기 몇 편의 시속에 담겨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 감회를 가장 간결하게 상징이나 비유를 빌려서 운율과 심상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어떨까? 그때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가슴을 스치고 가는 것은 아내의 얼굴에서 본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 불행히도 시골에서 제대로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가슴 아픈 기억이 먼저 되살아났다. 안쓰러운 아내의 형상 앞에서 나는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쓴 시가 바로 시집 제목이자 권두시인 '가을에 핀 배꽃'이었다. 긴 여름 시름시름 앓다가 피어난 창백한 이화 몇 송이, 그 가련한 꽃처럼 짧은 생을 살다 가신 내 어머니에 대한 비유적인 시가 아닌가 싶다. 세월이 흘러 이곳 미국에서 해가 길던 한 여름날, 다 큰 막내딸을 앞세우고 산책하였다. 큰 키에 통통한 뒷모습의 딸을 보면서 어머니가 먼 하늘에서 내려와 걸어가는 듯한 그리움의 시적 정서를 느끼곤 했다. 이런 시적 사유가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난 것이 나의 첫 시집에 담긴 시 세계라 할까? 나는 부끄러운 과거의 고백처럼 감추어진 잊지 못할 삶의 체험들을 시의 형식에 담아 써 내려간 것이다.
첫 시집을 내기까지 도와주신 선배 시인님들께 감사드린다. 2년 전 여름, 미국 새크라멘토 한인성당 정혜글방을 방문하시어 시작에 관한 강의를 해주신 전 <미주가톨릭문인협회> 회장님이신 정찬열 시인님을 만나게 된 인연이 있었다. 그때를 계기로 나는 다시 시를 쓰게 되었고, 지금의 작품 활동의 계기를 마련해 주신 그분께 많은 감사를 드린다. 또한, 항상 격려해주고 <라스베이거스한인문학회> 초대회장이시며, 대학교 동문이신 문소 이일영 시인님의 한결같은 따뜻한 배려와 충고에도 고마움을 전한다. 끝으로, 참신한 시 창작에 관한 논고를 보내 주신 원로 수봉 정용진 시인님과 저의 시를 읽고 종종 댓글로 격려해주신 김영교 원로 시인님, 안목있는 좋은 시를 많이 남기시고 항상 저에게도 친절을 베풀어 주신 북가주 유봉희 시인님, 그리고 시집의 편집과 교정 및 여러모로 성심껏 도와주신 《시와정신》 편집부장이신 성은주 시인님의 노고에도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첫 시집 발간에 있어 진솔한 해설을 써주신 권온 문학박사님, 그리고 출판에 관한 알선 및 시 창작에 관하여 권고해주신 《시와정신》 주간 한남대 김완하 교수님께도 진심으로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2019년 기해년 5월
미국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
이만구 (필명: 노을) 배상
* 2024년 갑진년 11월,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서 5년 전, 첫 시집으로 불충분하다 생각하여, 출판 보류했던 시들을 다시 퇴고하고, 시 해설에 쓰인 초기 10편과 '시인의 말'은 대체로 원본 그대로 유지하면서, 다수는 신작시로 바꾸어, 아래 총 100편 시선을 《미주문학》서재에 올려놓았다. 혹시, 출간되지 않는다면, 이 자료는 나의 '자서시집'의 일부이며, 또한 '유고시집' 원고로 남겠다.
목차
권두시
1. 윤사월 붉은 봄꽃이
2. 가을에 핀 배꽃
3. 도시의 야자수
제1부 뿌리_근본
1. 거울 속의 아버지
2. 밥상
3. 낙산, 그 푸른 파도여!
4. 어머니의 섬
5. 나무와 해
6. 한여름 날의 기억
7. 남원으로 갑니다
8. 무말랭이
9. 뒷모습
10. 박대의 고향에서
11. 밤하늘 그 이름 별들
12. 여창의 달빛 아래
13. 내 넋은 고향 언덕에
14. 몽고반점
15. 충무공 이순신
제2부 기억_추억
1. 차창 밖 풍경
2. 겨울비 우산속
3. 그때 생각이
4. 고향에 눈은 내리고
5. 시는 사랑을 싣고
6. 역전의 명수
7. 망향
8. 창 너머 보름달
9. 빛바랜 작은 수첩
10. 길가에 소나무
11. 가을이 오기 전에
12. 외로운 별빛
13. 네 안에 내 모습처럼
14. 토끼와 씀바귀
15. 오레곤에 와서
16. 눈오길 기다리며
17. 마음의 보석
제3부 사물_주체
1. 주홍장미
2. 걷다오는 행길
3. 봄날의 정원
4. 근숙이의 호떡
5. 도시의 겨울비
6. 오늘의 그네
7. 자카란타 꽃
8. 겨울 멜로디
9. 해바라기
10. 하얀 동백꽃
11. 꽃 속의 허밍버드
12. 봄의 자리
13. 풀숲 속 무꽃향기
14. 그림 속 레몬향 물컵
15. 9월의 가로수
16. 밤과 낮
제4부 반성_성찰
1. 나를 찾는 숲
2. 마음속 줄금
3. 하얀 고백
4. 마지막 생일처럼
5. 나의 독방
6. 귀로의 밤
7. 익모초 들꽃
8. 저녁새를 보며
9. 길은 멀어도
10. 한 편 만들기
11. 자기야 꽃봐라!
12. 어머니의 빨랫줄
13. 낙타의 고백
14. 박꽃
15. 테라스의 가을장미
16. 침묵 앞에서
제5부 떠남_이별
1. 산그늘 저 등걸아!
2. 꽃상여
3. 마지막 포옹
4. 타인의 해후
5. 장미꽃은 지고
6. 만추
7. 도시의 자유인
8. 마지막 편지
9. 꽃피는 언덕에서
10. 소풍
11. 아침 둘레길
12. 어느 로사리오 인연
13. 마지막 포옹
14. 11월의 밤
15. 길 잃은 새
16. 국화꽃 한 송이
17. 보랏꽃 피는 산
제6부 기타_열린 확장
1. 사랑은 더디 오더이다
2. 겨울밤 풍경
3. 국제전화
4. 아내의 간장게장
5. 7월, 토로를 만나다
6. 산그림자 길
7. 초여름 아침햇살
8. 단조의 응원가
9. 봄이 오는 길목에서
10. 바닷새의 꿀잠
11. 외로운 별빛
12. 물밥 식사
13. 겨울 덤불숲
14. 봄의 자리에 누어
15. 박꽃
16. 이월의 바람
시집 '가을에 핀 배꽃' 해설, 권온(문학평론가)
과거와 현재, 참회와 사랑의 하모니
―이만구 시집 '가을에 핀 배꽃'에 관하여
1.
이만구는 2017년 《미주 가톨릭 문학》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고, 2018년 계간 《시와정신》으로 등단한 시인으로서 현재 미주 한국문인협회 및 미주 가톨릭 문인협회 회원이다. 이 글은 이만구 시인의 첫 시집 '가을에 핀 배꽃'을 고찰하려는 시도이다. 여섯 개의 부로 이루어진 이 시집은 총 100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밥상」, 「무말랭이」, 「뒷모습」, 「빛바랜 작은 수첩」, 「네 안에 내 모습처럼」, 「나를 찾는 숲」, 「마음속 줄금」, 「나의 독방」, 「사랑은 더디 오더이다」, 「물밥 식사」 등의 시편에 주목하면서 이만구의 시 세계를 파악하려고 한다. 이순(耳順)을 넘어선 시인의 시를 읽는 일은 우리네 삶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계기가 되겠다.
2.
나보다는 열 살쯤 어린 내 어머니가 멀리서 환히 웃음 짓고 걸어온다
평상 위에 잠든 날 흔들어 깨운다
그때처럼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여남은 살 철부지 동생들 챙기며 울 밑 애호박을 따서 찌개 끓이고 황세기 젖 쪄서 저녁상 차린다
산 위에서 어렴풋이 비치는 노을빛
난 툇마루에 앉아 옛 모습 살피며 목이 메어와 한 술 밥도 넘길 수 없다
어릴 적, 생계란 하나씩 건네주며 타고난 손금이 있어 넌 좋을 거라던 될수록 멀리 떠나가야 명 이을 거라고 앞 내다보시던 속마음 여쭐 수 없다
무엇이 그리 급해 먼저 떠난 젊은 내 어머니가 이국땅까지 찾아와 차려준 꿈속의 밥상을 마주한다
―「밥상」 전문
시적 화자 ‘나’는 “꿈”을 꾸고 있다. 여기에서의 ‘꿈’은 ‘과거’를 지향한다. 현재의 ‘나’보다 “열 살쯤 어린 내 어머니가 멀리서 환히 웃음 짓고 걸어”오는 장면이 생생하다. “여남은 살 철부지 동생들 챙기"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난 툇마루에 앉아 옛 모습 살피며 목이 메어와 한 술 밥도 넘길 수 없다” 지금의 ‘나’보다 젊은 어머니를,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먼저 떠난 젊은 내 어머니”를 눈앞에서 보게 된다면 어떤 심경일까? 한국과 미국이라는 공간과 수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상상력의 무대를 제공하는 “꿈속의 밥상”이 더할 수 없이 아름답다.
어릴 적, 몸이 아파 방에 누우면
입맛이 소태맛이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천장의 벽지 무늬 행렬뿐
어지럼증 내려와 코끝이 시큰했다
내 아픈 기운 잡게 한 것은
고기맛의 쫄깃한 무말랭이 한 접시였다
그 후, 어머니는 더운 여름철에도
콩밭 고랑에 난 생무 뽑아
채 썰어 양지바른 곳에 말리곤 하셨다
열병 얻어 앓던 어린 맏형 여의고
가난한 어머니의 놀란 심정이었을까
오늘은 이국의 정월 보름날 저녁
아내가 차려준 무말랭이 무침 먹으며
고향집 토방에 비친 따스한 햇볕과
그리운 어머니의 옛사랑이
다시 내 안에 들어와 몹시 흔들어 놓는다
―「무말랭이」 전문
앞의 시에서 ‘과거’와 ‘현재’를 대비하였던 이만구는 이번에도 시차(時差)를 활용한다. 이 시는 크게 ‘과거’와 ‘현재’로 나뉘고, ‘과거’는 다시 두 개의 ‘시기’로 구분된다. 1연과 2연은 “어릴 적”을 이야기한다. 시적 화자 ‘나’는 “어릴 적 몹시 아파 방에 누"워 있었다. “쫄깃한 무말랭이 한 접시”를 먹은 후 “내 아픈 기운 잡게” 되었다. 3연은 ‘나’의 아픔과 무말랭이의 효험 “그 후,”를 진술한다. “어머니는 더운 여름철에도/ 콩밭 고랑에 난 생무 뽑아/ 채 썰어 양지바른 곳에 말리곤 하셨다”라는 진술에는 어머니의 자식을 향한 사랑이 가득하다. ‘어릴 적’과 ‘그 후,’가 과거의 전반(前半)과 후반(後半)을 가리킨다면 “오늘은”에는 현재의 정황이 담겨있다. 이제 ‘나’의 곁에는 어머니가 계시지 않지만, ‘나’는 “아내의 무말랭이 무침을 먹으며” 고향 “옛집 토방에 비친 따스한 햇볕과” 그 시절 “어머니의 옛사랑”을 다시 음미한다. 우리도 각자의 어머니를 떠올려보아야 할 테다.
찔레꽃 피어난 노을 진 산길 따라
막내딸 앞장세우고 걸어가는
긴 하루의 북가주 저녁 산책길
얼핏 떠오르는 딸아이 뒷모습 바라본다
넌지시 앞서 가라 손짓하고
혼자서 멀찍이 떨어져 뒤따라 가는데
살포시 이는 그리움 먼 곳에서
흔들리는 바람으로 다가와
고향의 옛 생각 떠오르게 한다
황혼 깃든 산 그림자 드리운 언덕
오월의 아카시아 꽃길 따라
밭일 마치고 몸빼 바지 차림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어머니 모습
먼발치에서 본 그 기억 지울 수 없네
훤칠한 키에 통통한 체형
손을 약간 흔들고 앞만 보던 모습으로
어머니가 손녀딸 모습으로
그림자처럼 조용히 다녀가시네
―「뒷모습」 전문
시적 화자 ‘나’는 “북가주(北加州)” 곧 샌프란시스코를 포함한 캘리포니아주 북부의 어느 거리에서 “막내딸”과 함께 산책하는 중이다. “찔레꽃 피어난 노을 진 산길 따라” 걸어가는 “딸아이 뒷모습” 보면서 ‘나’는 “그리움”이 생기고 “고향의 옛 생각”에 빠져든다. ‘나’는 막내딸의 뒷모습을 보면서 “오월의 아카시아 꽃길 따라/ 밭일 마치고 몸빼 바지 차림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어머니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다. “훤칠한 키에 통통한 체형”은 “어머니”와 “손녀딸”의 공통점이다. 이 시에는 수십 년의 시간, 한국과 미국 사이의 엄청난 거리를 모두 뛰어넘는 놀라운 동일성의 순간이 전개되고 있다.
아주 낡을 때까지 쓰자던 손지갑
그 안에 끼인 오래된 수첩을 펴보니
깨알처럼 써 놓은 글들이
눈앞을 아른거리는 옛 기억 담고 있다
묵은 손때 다닥다닥 묻은 겉표지와
이제는 곱게 단풍이 든 글씨가 보인다
다시는 잊지 말자 밑줄 친 메모와
텅 빈 가슴에 떠도는 낙서....
여태껏 무슨 사연 있길래
보란 듯이 매달린 겨울 참나무 잎새
한 장 한 장 넘기며 한참 살피어 보니
예전에 등지고 떠나 온 빈자리마다
세월의 낙엽이 수북이 쌓여있고
스쳐 간 지난날들, 내 애증의 시간
돌아올 수 없는 추억이 담겨있다
한때는 고스란히 태우고 싶던 기억들
그 속에서 헤집어 보는
몇 개의 잿빛 진주알....
아직 내게 소중한 추억이라 만지작거리며
다시 챙겨 넣는 빛바랜 작은 수첩
―「빛바랜 작은 수첩」 전문
수첩을 사용하는 이들이라면 잘 알 것이다. 우리에게는 “오래된 수첩”에 “깨알처럼 써 놓은 글들”을 보며 “눈앞을 아른거리는 옛 기억”을 떠올린 적이 있다. 거기에는 “묵은 손때 다닥다닥 붙은 표지/ 잊지 말자고 박박 밑줄 친 메모”와 “텅 빈 가슴 떠도는 낙서”에는 “스쳐 간 지난날들, 내 애증의 시간/ 돌아올 수 없는 추억이 담겨있다” 독자로서는 “빛바랜 작은 수첩”에 시적 화자 ‘나’의 ‘사랑’과 ‘미움’이 함께 담겨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겠다. 그곳에는 “고스란히 태우고 싶던 기억들”과 “몇 개의 잿빛 진주알”이 공존하고 있다. 삶을 되돌아볼 때 다수의 사람들은 극히 제한적인 부분에서만 ‘기쁨’이라는 열매를 찾을 수 있다. 기억 또는 추억이라는 이름의 행위로 삶을 살필 때 상당 부분은 ‘슬픔’으로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이만구는 우리가 삶에서 사랑이나 기쁨을 향한 발걸음을 쉬이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오래된 작은 수첩에서 길어 올린 “소중한 추억”이야말로 삶의 위대함을 입증하는 사례가 될 게다.
시린 겨울 보내고, 3월의 길 나서니
오랜만에 화창한 봄 하늘 눈부시고
겨우내 총총대며 지저귀던 새들
피어나는 들꽃 앞에서 탄성 지른다
어릴 적 기억, 산길 따라 날던 종달새
저기 새들 마냥 즐거이 노래하였다
덧없이 흘러간 지나간 시간들....
그 작은 생명 지금은 어디로 갔을까
그 청아한 새소리 어디로 사라졌을까
함께 뛰놀던 여리디 여린 모습의
고향 마을 소녀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이국에서 로사리오 인연으로 맺은
깔깔대며 웃으시던 해맑은 신부님
지금 하늘나라 어느 곳에 계시는지
따스한 봄, 여울져오는 그리운 생각
먼 훗날, 네 안에 남겨진 내 모습처럼
스쳐 지나가는 아지랑이들....
봄기운 이는 언덕에서 하늘거린다
―「네 안에 내 모습처럼」 전문
이만구의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핵심어로는 ‘그리움’과 ‘기억’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 시 역시 예외가 아니다. 네 개의 연으로 구성된 이 작품의 1연과 4연은 현재를, 2연과 3연은 “어릴 적 기억”을 다룬다. 1연과 4연은 미국의 “따스한 봄”을 보여준다. 시적 화자 ‘나’는 “3월의 길”에서 “화창한 봄 하늘”과 “지저귀던 새들” 그리고 “피어나는 들꽃”을 만끽한다. “아지랑이들” 피어오르고 “봄기운 이는 언덕에서” ‘나’는 “그리운 생각”에 빠져들고 이는 자연스럽게 2연과 3연으로 연결된다. 한국의 “고향 마을” 또는 “산길”에서 ‘나’는 “종달새”를 비롯한 “새들”과 “소녀” 그리고 “신부님” 등 다양한 대상들을 떠올린다. 시인이 이야기하는 ‘네’ 또는 ‘너’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먼 훗날” 또는 미래에 ‘나’를 기억하고 그리워할 인물로 추정할 수 있겠다. 아마도 사랑하는 자녀가 될 확률이 높겠다.
티 없이 맑은 아기로 태어나서
아무런 세상 걱정도 없이
마냥 경이롭게만 바라보던 어린 시절,
그 순수한 기억의 무늬 더듬어
근원적인 나를 바라볼 수 있을까
어우러진 세상 살아가면서
나의 진정한 모습은 점점 작아져 가고
마음속 안창, 그 기억의 끄트머리
가물가물 알아보기 힘든
내 본래의 표정은 무엇일까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 안에 남이 있고 이웃이 있고
가끔, 서로 다른 자아가 싹트다 사라지는
무성히 우거진 마음의 숲인데
과연, 진정한 나는 누구일까
숲에서 들리는 새소리와 물소리
그 안에서 즐겁고 자연스럽다 할지라도
까마득한 날, 나의 본모습 묻는
하필, 남이 아니고 내가 된 이유
혼자서 미지의 숲길을 찾아 헤맨다
―「나를 찾는 숲」
시적 화자 ‘나’는 “순수한 기억의 무늬를 더듬어” 과거로 향한다. 그가 “경이롭게만 바라보던 어린 시절”에 주목하는 까닭은 “근원적인 나를”, “나의 진정한 모습”을, “내 본래의 표정”을, “진정한 나”를, “나의 본모습”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이만구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철학적인 화두 곧 “내 안에 남이 있고 이웃이 있고/ 서로 다른 자아가 싹트다 사라지는/ 무성히 우거진 마음의 숲”이라는 진술은 의미심장하다. 또한 “하필, 남이 아니고 내가 된 이유”라는 시인의 언급 역시 음미할만하다. 우리들 각자는 왜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여야만 하는가?
동네 안길, 콘크리트 보도 위에
아이들의 색분필 그림이
마음 내키는 데로 형형색색 그려져 있다
비 오면, 말끔히 지워지겠지
어릴 적, 마당에 금 긋고 놀던 때
대빗자루로 깨끗이 쓸면
아무런 자국 남김없이 지울 수 있었다
그런 일은 장대 같은 비라도 내려
아주 없었던 일처럼
흔적 없이 다 지울 수 있겠지만
어쩌다 비켜갈 수 없었던
마음에 두고 쉽게 삭아지지 않는 줄
그 누가 쳐놓은 금이던가
평상심과 감정 잘 저울질하여
마음 가늠해야 했었는데
무엇이 그리도 시시비비 분명하다고
대책도 없이 죽 줄금 그었던가
알게 모르게 쌓인 편견과 아집
떠오르는 마음의 상처 쉽게 지울 길 없다
깊이 새겨야 할 참회의 눈물일 뿐....
―「마음속 줄금」 전문
세월이 흘러도 아이들이 땅에 금 긋고 놀거나 색분필 그림 그리며 노는 것은 여전하다. “비 오”거나 “대빗자루로 깨끗이 쓸면” “아무런 자국 남김이 없”거나 “말끔히 지워지겠”다는 진술에 주목해야겠다. 땅이나 “길 위”에 금을 긋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는 달리 시인의 “마음속의 줄”은 “쉽게 삭아지지 않는”다. “무엇이 그리도 시시비비 분명하여/ 대책도 없이 죽 줄금 그었던가”라는 진술에는 이만구의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난다. “평상심”과 “수평의 균형”이 필요했던 순간 “편견과 아집”이 쌓였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뒤늦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고, 이는 이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삶의 교훈으로서 다가온다.
조용히 눈 감으면,
밤하늘 속 우주보다 더 깜깜한
차단된 독방, 살아온 날들과
정지한 듯한 혼자의 시간과 어둠을 마주한다
잃어버린 옛 기억 속에서
참다운 내 모습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아직 살아 숨 쉰다는 것
그 이상 무얼 더 구하려는 걸까
마음속 저편
촉촉이 비 오는 대지의 뜰안에
새들은 분주히 깃을 털고 날아들건만
집요한 상념
보이지 않는 그물에 걸려있다
비에 젖어 퍼덕이는
처연한 그림자
지난 삶이 단지 헛된 것만 아니었지
그 후, 새가 되어 날아갈 수 있는 걸 알기까지
결코 우연만은 아니었다
―「나의 독방」 전문
‘독방(獨房)’ 곧 혼자서 거처하는 방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시적 화자 ‘나’는 독방에서 온전한 자신을 대면하는 소중한 기회를 얻는다. 그곳은 “살아온 날들”과 “정지한 듯한 혼자의 시간”과 “옛 기억”을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나’는 “지난 삶”이라는 어구로 요약될 수 있는 한 생애를 반추하고 있는 게다. 이만구가 이 시에서 우리에게 던지는 깨달음의 화두는 묵직하다. “지금 내가 숨 쉰다는 것. 그 외에 더 이상 무엇을 구하려는 걸까.” 시인의 언급처럼 ‘지금, 여기’에서 숨 쉬고 살아있다는 사실만큼 확실한 것은 없음을 알게 된다.
세상에 꽃들이 많이 있듯이
사랑도 서로 다른 형태로 피고 지더이다
아직, 보지 못한 미지의 꽃도 있듯이
더러는 잊고 살아온
가슴에 묻힌 사랑도 있더이다
세월이 가도 오래 남은 사랑은
황혼이 지는 서늘한 저녁,
진종일 햇볕에 달구어진 호수의 온기처럼
그리 더디 차오르더이다
한결같이 흔들리지 않는 사랑은
시절 따라 핀 꽃이 진 후에
씨알로 맺어지듯
해저의 침묵 속에서 알알이 맺힌 진주처럼
가슴속 깊이 새겨지더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먼 후일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다가와
꽃향기로 피어오르는
그런 사랑은 세월 속에서 더디 오더이다
―「사랑은 더디 오더이다」 전문
어쩌면 인간에게 ‘사랑’은 가장 존엄한 가치나 미덕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이만구는 본질적인 시인이다. 시인은 ‘사랑’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꽃’을 거론한다. 세상에 많은 꽃들이 있듯이 “사랑도/ 서로 다른 형태로 피고 지”며, 여태껏 “보지 못한 미지의 꽃들도 있”듯이 “더러는 잊고 살아온/ 가슴에 묻힌 사랑도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사랑’과 ‘꽃’의 유사성을 천착하는 이만구의 시선이 더할 수 없이 따스하다. 시인에 따르면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사랑은”, “한결같이 흔들리지 않는 사랑”이고 “그때는 몰랐지만, 먼 후일/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다가와서/ 꽃향기로 피어오르는 그런 사랑”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사랑’은 ‘꽃’이다. ‘사랑 꽃’이다.
반찬이 넉넉지 못한 때나
이가 튼튼하지 못한 나이 드신 분들이
자청해서 챙겨 드시던 물밥
주말 식사 언제부터인가
어느새, 나도 즐겨 먹고 있었다
예전에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는
바쁘시거나 입맛 없으실 때
밥이 보약이라 여기고
찬 밥 덩이 물사발에 담그시며
빈 수저로 도닥거려 물밥을 고르셨다
차리는 번거로움 없는 패스트푸드
혼자 먹는 식사 소리 낸들 어떠냐 마는
부모님 제사 때, 초헌하던 나는
흰 고봉밥 세 숟갈 찬 물그릇에 풀고
수저 소리 내어 담갔다
여름철, 새참으로 풋고추나 오이를
쌈장 찍어 먹는 담백한 맛
기름기 없는 싱거운 초식성 식사로
시원한 물 한 사발 반주하며
입안에서 술술 넘겨 삼키던 물밥
―「물밥 식사」 전문
물에 밥을 말아서 먹는 경우를 ‘물밥’으로 칭하기도 한다. 이만구의 표현처럼 “반찬이 넉넉지 못한 때나/ 이가 튼튼하지 못한 나이 드신 분들이” 주로 활용하는 식사법일 수 있겠다. 시적 화자 ‘나’의 기억 속에서 “물밥 식사”를 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다. “입맛 없으실 때/ 밥이 보약이라 여기고/ 찬 밥 덩이 물 사발에 담그며/ 빈 수저 도닥거려 물밥을 고르셨”던 아버지를 떠올리던 ‘나’는 어느새 아버지처럼 물밥을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주말 식사 언제부터인가/ 어느새, 나도 즐겨 먹고 있다”라는 시인의 발언은 “차리는 번거로움 없는 패스트푸드”라는 ‘물밥’에 관한 개성적인 정의에 다다른다. 이 시에는 한때 아버지가 그러하셨듯이 ‘나’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 뒤를 좇게 된다는 긍정의 깨달음이 가득하다. 공감할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임은 물론이다.
3.
이 글은 이만구 시인의 첫 시집 '가을에 핀 배꽃'을 함께 살피려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총 80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는 중량감 있는 이 시집에서 우리는 「밥상」, 「무말랭이」, 「뒷모습」, 「빛바랜 작은 수첩」, 「네 안에 내 모습처럼」, 「나를 찾는 숲」, 「마음속 줄금」, 「나의 독방」, 「사랑은 더디 오더이다」, 「물밥 식사」 등의 시편에 각별한 애정의 눈길을 보내게 되었다.
「밥상」에서 우리는 한국과 미국이라는 공간과 수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상상력의 무대를 제공하는 이만구의 “꿈속의 밥상”이 더할 수 없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무말랭이」에서 시적 화자 ‘나’는 “아내의 무말랭이 무침을 먹으며” 고향 “옛집 토방에 비친 따스한 햇볕과” 그 시절 “어머니 사랑”을 다시 음미한다. 우리도 각자의 어머니를 떠올려보아야 할 때다. 「뒷모습」에는 수십 년의 시간, 한국과 미국 사이의 엄청난 거리를 모두 뛰어넘는 놀라운 동일성의 순간이 전개된다.
「빛바랜 작은 수첩」에서 이만구는 우리가 삶에서 사랑이나 기쁨을 향한 발걸음을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오래된 작은 수첩에서 끌어 올린 “소중한 추억”이야말로 삶의 위대함을 입증하는 사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만구의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핵심어로는 ‘그리움’과 ‘기억’ 등을 꼽을 수 있는데 「네 안에 내 모습처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나를 찾는 숲」에서 이만구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철학적인 화두 곧 “내 안에 남이 있고 이웃이 있고/ 서로 다른 자아가 싹트다 사라지는/ 무성히 우거진 마음의 숲”이라는 진술은 의미심장하다. 또한 “하필, 남이 아니고 내가 된 이유”라는 시인의 언급 역시 음미할만하다.
“평상심”과 “수평의 균형”이 필요했던 순간 “편견과 아집”이 쌓였다는 사실 앞에서 「마음속 줄금」의 시인은 뒤늦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고, 이는 이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삶의 교훈으로서 다가올 테다. 이만구가 「나의 독방」에서 우리에게 던지는 깨달음의 화두는 묵직하다. “지금 내가 숨 쉰다는 것. 그 외에 더 이상 무엇을 구하려는 걸까.”라는 시인의 언급처럼 ‘지금, 여기’에서 숨 쉬고 살아있다는 사실만큼 확실한 것은 없을 게다.
어쩌면 인간에게 ‘사랑’은 가장 존엄한 가치나 미덕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더디 오더이다」에서 ‘사랑’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이만구는 본질적인 시인이다. 시인에 따르면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사랑은”, “늘 한결같이 흔들리지 않는 사랑”이고 “그때는 몰랐지만 먼 후일에 느껴지는/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다가와서/ 꽃향기로 피어오르는 그런 사랑”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사랑’은 ‘꽃’이다. ‘사랑 꽃’이다. ‘삶’ 역시 그러할 테다. 「물밥 식사」에는 한때 아버지가 그러하셨듯이 ‘나’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 뒤를 좇게 된다는 긍정의 깨달음이 가득하다.
이만구 시인이 시집 '가을에 핀 배꽃'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 세계는 아름답고 따스하다. 그곳에는 현실과 상상이, 한국과 미국이, 과거와 현재가, 참회와 사랑이 나란한 조화를 형성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의 따스하고 아름다운 시 세계가 넓고 깊게 뻗어나갈 것임은 분명한 사실일 테다. 시인의 시와 삶에 건강한 태양이 늘 가득하기를 기원한다.
* 2019 기해년 7월, 《시와정신》사의 권온 문학박사님께 위탁하여 쓰인 해설이다.
감사합니다.
(연락처: mankoolee@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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