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미꽃

2002.11.19 02:31

전지은 조회 수:340 추천:13

오랜만에 산으로 난 오솔길을 걷는다. 깊은 숲 사이사이 조금씩 훔쳐 들어온 햇살 아래 제비꽃이 피었다. 제비꽃을 보게 되면 늘 함께 떠오르는 것은 할미꽃 군상이다. 고향 진외갓댁 뒷산에도 작은 오솔길이 있다. 외사촌들과 어울려 봄나물을 캐고 여름방학이면 식물 채집을 하면서 만났던 정다운 야생들꽃.
청상이 된 엄마는 세살 난 계집아이였던 날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생활을 위해 다시 교편을 잡아야했고, 외할머니는 집안살림을 책임지셔야했다.
혼자 된 딸과 외손녀를 보시며 새까맣게 다 타버렸을 할머니의 가슴. 딸과 외손녀를 위해 아무런 내색을 할 수 없으셨던 할머니. 할머니의 손을 잡고 유치원에 입학하던 날, 할머니는 날아 갈 듯한 옥색명주 한복에 붉은 댕기의 쪽을 찌시고 반짝이는 은비녀를 꼽고 계셨다. 은은한 분 냄새도 풍기셨던 것 같다. 그날 이후, 할머니는 늘 나의 보호자였으며 학부형이셨다.
할머니가 들려 주셨던 구수한 옛날이야기, 일요일이면 할머니 손을 잡고 따라 다녔던 포교당, 해가 기울면 화단의 풀을 뽑고 물을 주던 일, 해가 좋은 휴일이면 반짝거리게 장독을 닦고, 작은 돌쩌귀로 조개를 빻아 닭모이를 만들던 일까지 할머니와 함께 했던 유년의 일상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할머니는 흰 칼라의 교복을 뽀얗게 다려주셨고 양 갈래 머리를 아침마다 땋아 주셨다. 외삼촌과 이모가 결혼을 하였어도 외할머니는 늘 우리와 함께 사셨다.
나도 결혼을 하게 되자 할머니는 증손자나 한번 안아보시고 먼길 떠나시면 소원이 없으시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당신의 업보 같았던 혼자된 딸의 사회적 성공과 손녀의 평온한 삶을 늘 소원하셨던 할머니. 소원하시던 것처럼 증손자를 보시고 난 후 우리들이 미국 행을 결정하였을 때, 엄마를 두고 가니, 꼭 돌아와야 한다고 손을 잡으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아직 우리들의 미국 생활이 어설펐던 어느 봄날, 할머니의 부고를 받았다. 아흔 셋을 일기로 하늘나라로 돌아가셨다. 부음을 듣고도 달려가지 못했던 것은 학기 중간 인 것도 있었으나 좁은 소견에, 비행기 삯이 걱정되어서였다. 그 비행기 삯을 아꼈어도 지금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유학생이라는 신분이 모든 것을 움츠리게 했다. 일주일을 목놓아 꺼억거리며 울었다. 어쩌면 엄마보다 더 많은 마음 고생을 하셨을 할머니. 엄마의 울타리와 나의 보호자가 되어 주셨던 분.
삼년상이 지나고야 산소에 가 뵐 수 있었다. 엎드려 일어나지 못하는 나를 보며 어머니는 오랫동안 말없이 앉아 계셨다.
내려오는 길, 산소가 있는 언덕 양지 바른 곳에 흰털로 덮인 한 무더기의 군상이 보였다. 손녀의 집을 눈앞에 두고 쓰러져 죽은 할머니의 넋이 산골짝 이에 핀다는 할미꽃.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찾아온 손녀를 보기 위해 그곳에 피어나신 걸까. 해마다 그 자리에 필 할미꽃. ‘할머니, 이제야 제가 왔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보고싶어 하던 손녀딸이. 이젠 아무 염려 마시고 편히 쉬세요. 이곳 걱정일랑 접어두세요’.
언덕 아래론 제비꽃도 소담스럽게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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