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바다는 지금도 푸르겠지?

2004.01.09 01:55

오정방 조회 수:788 추천:171

고향의 바다는 지금도 푸르겠지?

오정방




이역만리 타국에서 내고향 생각할 때
비취빛 그 바다가 눈 감으니 보이시네
동해의 일출광경은 그릴수록 신비롭다

수평선 넘나들며 갈매기 춤을 출 때
헤엄치고 조개줍고 돌팔매 겨루었던
동무들 그 뒷소식이 오늘따라 사무친다

창파에 돛단배가 그림처럼 지나갈 때
딩굴고 씨름했던 새하얀 그 모랫벌
동심의 어린 시절을 하마 어찌 잊으리

- 졸시 ‘고향바다’ 전문

위의 시조는 1999년에 작시한 것으로 졸저 ‘그리운 독도’(2001)에
수록되어 있다. 이민의 삶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마음을 스스로
달래보기 위하여 쓴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나는 행복하다. 가슴 속에, 머리 속에 마음껏 그릴 수 있는 고향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냐. 하기야 고향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어릴 때의 티없던 그 유년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고향을
가진 사람은 의외로 많지를 못하다. 고향에 묻혀 있을 때는 잘 못느끼지만
이렇게 멀리 떠나 있다보면 문득문득 고향의 모든 것이 그리움으로
다가오는데 그럴 때마다 내 머릿속엔 고향의 푸른바다가 먼저 떠오른다.

나는 일정 말기, 일인들의 저 유명한 진주만공격이 있었던 해인
1941년 5월에 동햇가 울진의 양정洋亭이란 바닷가에서 태어났다.
출렁이는 바다의 파돗소리를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들었고 또 태어나서
가장 먼저 본 것도 넘실대는 동해의 푸른바다였다. 그 푸른바다와
어울리는 하얀 백사장은 유일한 어린시절의 놀이터였다. 그 모래위에서
달리기, 씨름하기, 찜질하기, 바다를 향해 돌팔매 던지기는 바다와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추억의 놀이였다. 키가 자라고 지성이 자라면서 수평선
너머로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는 장관을 바라볼 때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 어떤 신비감마저 느끼면서 컸다. 어쩌다가 먼 창파를 가르며 지나가는
선박들을 바라볼 때는 어딘가에 더 크고 더 넓은 세계가 있음을 상상하며
살았다. 이런 것들 가운데 나의 꿈도 자라났던 것이다.
적령기가 되어서 초등학교에 입학, 10리쯤 되는 울진읍내까지 걸어서
4학년 초까지 하루 왕복 20리 길을 불평없이 다니면서. 적어도 6. 25
한국동란이 일어난 ‘50년까지 10여년을 나는 이 마을에서 자라왔다.
전쟁이 터지던 그 해 3월에 우리집은 학교가 가까운 읍내로 이사를 하였고
6월에 한국동란을 맞았으며 9월에 수복이 되면서 집은 공산군에 의하여
소실되었다. 어린 마음에도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무렵엔 내가 다니던 울진초등학교 건물도 모두 타버렸던지라 우리는
초가지붕을 씌운 가교사에서 공부를 했다. 비가 올 때는 빗물이 천정에서
떨어지고 겨울에는 방풍이 안되어서 여간 춥지가 않았다. 그래도 여름에는
울진읍내의 유일한 남대천南大川 하구로 논두렁 길을 따라 찾아가서는
야외에서 공부를 하였고 쉬는 시간에는 개울가에서 속옷을 입은채로 물속에
들어가 팬티 속으로 들어오는 갖가지 물고기를 잡던 어린시절들이 큰
추억으로 떠오르고 있다. 먹지도 못할만큼 작은 피래미들과 미꾸라지들을
잡아 검정 고무신에 담아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우리들이 부르던 노래는 ‘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나,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갈까나,
이 병에 가득히 넣어 가지고요,
라라라라 라라라라 온다야…’ 였다. 마냥 즐겁기만 했던 하교길, 그 때
함께 노래를 불렀던 동무들은 지금 다 무었들을 하는지? 50여년 전의
일이니 더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동무들도 벌써 여럿 있음은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고향의 그 바다는 여전히 넘실대며 출렁이겠지? 그리고 그 옛날
어린시절에 보았던 그 모습대로 여전히 푸르겠지? 그래서 나는 울진이
고향인 것을 늘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다.


<2003.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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