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은인, 노산 선생님
2004.01.17 07:21
잊을 수 없는 은인, 노산 선생님
- 노산 선생님 20주기를 보내며
오정방
사람은 태어나서 일생을 사는 동안에 수 없는 사람들과 만나게 됩니다.
부모 형제로 부터 친척, 친구, 교사등 연륜에 따라 그 만남은 더욱 많아
질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 목사님과 교우들, 군에라도 다녀오면 동기생을
비롯하여 상사와 부하 등 숫자는 더 늘어납니다. 또한 직장에라도 다니면
또 많은 직장동료들과 만나게도 되지요. 결혼을 하게되면 또 많은 상대방
가족들과도 인연을 맺게됩니다. 어떤 경우라도 만남은 중요하며 일생중
어느 때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일생이 좌우되기도 하는 것이 사람과의
만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에게도 그런 특별한 경우가 있으니 바로 노산 이은상 선생님을 만난
것이 그것입니다. 아니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아드님을 먼저 만났으니 그
얘기부터 잠시 하고 넘어가야합니다. 선생님의 아드님과 나는 공군 99기
동기생으로 공군항공병학교에 입학하여 한 내무반에서 함께 생활을 하던
우리는 문학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집안 얘기도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항공병학교를 졸업후 공군김해기술학교에서도 병과
(행정)가 같아서 다시 만났으니 더욱 친해졌고 그 뒤 그는 서울병무청으로
나는 오산의 공군작전사령부로 배속을 받았습니다. 신병에게 있어서 첫
휴가나 외출은 얼마나 기다려 지는 일인지, 그러나 대학 초년생 1년간의
짧은 서울 생활에 서울이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서울로 올라가 동기생인
그의 집으로 초대를 받았는데 거기서 그의 아버지 노산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62년 일입니다.
처음 뵈었을 때의 기억은 키는 작으신데 특별히 귀와 코가 크시고 인자하신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뒤로 주말에 외출만 나가면 안암동 친구집으로 찾아
가게 되었고 선생님도 아들 친구이니까 스스럼 없이 대해 주셨습니다.
그러던 중 친구인 선생님의 아드님이 의가사 제대를 하고 미국유학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태 전에 모친상을 당한 친구는 아버님이 걱정되었고 결국 나에게
미국 유학을 마칠 때까지 아버님을 자주 찾아뵙고 외롭지 않으시도록 자택에
출입하게끔 서로 양해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는 미국으로 떠났고 나는 주말에
외출을 나와 안암동 선생님을 찾아뵙고 문안하며 친구에게 편지로 소식을
전해주는 동안 3년 군복무 기간이 끝나고 제대를 하였는데 마땅히 갈 곳도
없던터라 제대복장 그대로 찾아가 제대신고를 드리고 선생님의 서재에서
기숙하며 집안의 잔잔한 일들을 맡아보게 되었습니다. 신문사, 잡지사,
방송국 등에 원고를 전하는 일이나 우편 수발, 전화 수발신, 원고 쓰실 때
필요한 사전이나 서적을 찾아드리는 일까지 모두 즐겁게 감당했습니다.
때로는 강연장에 모시고 가기도 하고 중요한 곳에 가실 때 수행하기도 하고
사서 겸 비서 겸 그렇게 '65년 1월 부터 결혼하던 '68년 10월까지 3년 이상을
안암동 생활을 했습니다. 그 사이에 대학등록금을 대주시면서 복학하여 졸업
할 수 있도록 해주셨고 '65년 말에 안암동 자택 부근으로 이사 오신 막내동생의
큰 딸을 배필로 허락하셔서 나를 조카 사위로 삼으시면서 결혼비용도 모두
부담해 주셨습니다. 김현옥 현직 서울특별시장의 주례로 시민회관 소강강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도 가족을 대표하여 인사를 해주셔서 일찍 10살 때 아버지를
여읜 나에게 아버지 몫까지 다 감당해 주셨습니다.
많은 기억들이 있지만 다 적을 수 없는데 '66년에는 충청북도청의 지원으로
충북 12고을을 10일간 순방할 때 함께 수행하였으며 그 때 기행문이 한국일보에
연재된 후에 도서출판 횃불사에서 펴낸 책이 '가을을 안고'('66/서울)인데 여기
나오는 사진은 대부분 내가 찍은 것입니다. 그리고 '79년 미국 동부의 뉴
햄프셔 주에서 개최된 세계산악연맹 총회에 한국산악회장 자격으로 참석하실
때 나는 부대표로 수행하여 1개월간 미국을 돌아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20년간 지근거리에 머물면서 지내는 동안 나는 많은 분들을 뵙게
되었는데 박종화, 모윤숙 선생님 같은 문인들과 최현배, 이희승 선생님 같은
학자 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문화인들을 뵐 수 있었는데
나중에 이런 일들이 삶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처음 만나뵈었던 '62년으로
부터 20년 뒤인 '82년 9월 18일, 바로 오늘 노산 선생님은 천국으로 가셨습
니다. 말년에는 충현교회(담임 김창인 목사)에 출석하셨는데 부목사님이 지켜
보는 가운데 운명하셨고 임종을 바라보던 나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특별히 유언을 남기지는 않으셨고 평소에 '힘을 기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으
므로 유언처럼 받고 있습니다.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돌아가시기 몇달 전에 마지막 시집 '기원'이 출판되었는데 저에게 직접 서명
하여 주실 때 손이 얼마나 떨리시던지 안타깝기 그지 없었습니다.
9월 18일에 돌아가시고 22일 사회장으로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제1묘역에
안장되실 때 나는 선생님의 영정을 들고 장례 모든 순서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5년 뒤에 나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왔고 다시 15년이 흘렀지만 오늘은 바로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20주년이 되는 날이라 옛 기억들을 두서 없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선생님의 아드님, 그리고 뒷날 내 손 위 처남이자
내 공군 동기생인 그리고 동갑인 이 친구는 지난 주에 이곳 포틀래랜드를 방문하여
우리집에서 묵고 갔는데 40년 동안의 얘기를 요약해서 4시간 정도 추억을 더듬었
습니다.
그의 얘기가 자기는 노산 선생님의 육신적 아들이고 나는 정신적 아들이라고
말하여서 다시금 그 말을 곰곰히 되새기게 하였습니다.
다시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의 조카와 결혼하지 않았더면 처제가 초청하여 이곳에
이민 온 나는 현재 미국에 살고 있지도 않을 것이며 전혀 다른 방향, 다른 모습으로
어딘가에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만남이란 그만큼 중요한 것 같습니다.
<2002. 9. 18>
- 노산 선생님 20주기를 보내며
오정방
사람은 태어나서 일생을 사는 동안에 수 없는 사람들과 만나게 됩니다.
부모 형제로 부터 친척, 친구, 교사등 연륜에 따라 그 만남은 더욱 많아
질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 목사님과 교우들, 군에라도 다녀오면 동기생을
비롯하여 상사와 부하 등 숫자는 더 늘어납니다. 또한 직장에라도 다니면
또 많은 직장동료들과 만나게도 되지요. 결혼을 하게되면 또 많은 상대방
가족들과도 인연을 맺게됩니다. 어떤 경우라도 만남은 중요하며 일생중
어느 때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일생이 좌우되기도 하는 것이 사람과의
만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에게도 그런 특별한 경우가 있으니 바로 노산 이은상 선생님을 만난
것이 그것입니다. 아니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아드님을 먼저 만났으니 그
얘기부터 잠시 하고 넘어가야합니다. 선생님의 아드님과 나는 공군 99기
동기생으로 공군항공병학교에 입학하여 한 내무반에서 함께 생활을 하던
우리는 문학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집안 얘기도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항공병학교를 졸업후 공군김해기술학교에서도 병과
(행정)가 같아서 다시 만났으니 더욱 친해졌고 그 뒤 그는 서울병무청으로
나는 오산의 공군작전사령부로 배속을 받았습니다. 신병에게 있어서 첫
휴가나 외출은 얼마나 기다려 지는 일인지, 그러나 대학 초년생 1년간의
짧은 서울 생활에 서울이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서울로 올라가 동기생인
그의 집으로 초대를 받았는데 거기서 그의 아버지 노산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62년 일입니다.
처음 뵈었을 때의 기억은 키는 작으신데 특별히 귀와 코가 크시고 인자하신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뒤로 주말에 외출만 나가면 안암동 친구집으로 찾아
가게 되었고 선생님도 아들 친구이니까 스스럼 없이 대해 주셨습니다.
그러던 중 친구인 선생님의 아드님이 의가사 제대를 하고 미국유학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태 전에 모친상을 당한 친구는 아버님이 걱정되었고 결국 나에게
미국 유학을 마칠 때까지 아버님을 자주 찾아뵙고 외롭지 않으시도록 자택에
출입하게끔 서로 양해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는 미국으로 떠났고 나는 주말에
외출을 나와 안암동 선생님을 찾아뵙고 문안하며 친구에게 편지로 소식을
전해주는 동안 3년 군복무 기간이 끝나고 제대를 하였는데 마땅히 갈 곳도
없던터라 제대복장 그대로 찾아가 제대신고를 드리고 선생님의 서재에서
기숙하며 집안의 잔잔한 일들을 맡아보게 되었습니다. 신문사, 잡지사,
방송국 등에 원고를 전하는 일이나 우편 수발, 전화 수발신, 원고 쓰실 때
필요한 사전이나 서적을 찾아드리는 일까지 모두 즐겁게 감당했습니다.
때로는 강연장에 모시고 가기도 하고 중요한 곳에 가실 때 수행하기도 하고
사서 겸 비서 겸 그렇게 '65년 1월 부터 결혼하던 '68년 10월까지 3년 이상을
안암동 생활을 했습니다. 그 사이에 대학등록금을 대주시면서 복학하여 졸업
할 수 있도록 해주셨고 '65년 말에 안암동 자택 부근으로 이사 오신 막내동생의
큰 딸을 배필로 허락하셔서 나를 조카 사위로 삼으시면서 결혼비용도 모두
부담해 주셨습니다. 김현옥 현직 서울특별시장의 주례로 시민회관 소강강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도 가족을 대표하여 인사를 해주셔서 일찍 10살 때 아버지를
여읜 나에게 아버지 몫까지 다 감당해 주셨습니다.
많은 기억들이 있지만 다 적을 수 없는데 '66년에는 충청북도청의 지원으로
충북 12고을을 10일간 순방할 때 함께 수행하였으며 그 때 기행문이 한국일보에
연재된 후에 도서출판 횃불사에서 펴낸 책이 '가을을 안고'('66/서울)인데 여기
나오는 사진은 대부분 내가 찍은 것입니다. 그리고 '79년 미국 동부의 뉴
햄프셔 주에서 개최된 세계산악연맹 총회에 한국산악회장 자격으로 참석하실
때 나는 부대표로 수행하여 1개월간 미국을 돌아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20년간 지근거리에 머물면서 지내는 동안 나는 많은 분들을 뵙게
되었는데 박종화, 모윤숙 선생님 같은 문인들과 최현배, 이희승 선생님 같은
학자 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문화인들을 뵐 수 있었는데
나중에 이런 일들이 삶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처음 만나뵈었던 '62년으로
부터 20년 뒤인 '82년 9월 18일, 바로 오늘 노산 선생님은 천국으로 가셨습
니다. 말년에는 충현교회(담임 김창인 목사)에 출석하셨는데 부목사님이 지켜
보는 가운데 운명하셨고 임종을 바라보던 나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특별히 유언을 남기지는 않으셨고 평소에 '힘을 기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으
므로 유언처럼 받고 있습니다.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돌아가시기 몇달 전에 마지막 시집 '기원'이 출판되었는데 저에게 직접 서명
하여 주실 때 손이 얼마나 떨리시던지 안타깝기 그지 없었습니다.
9월 18일에 돌아가시고 22일 사회장으로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제1묘역에
안장되실 때 나는 선생님의 영정을 들고 장례 모든 순서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5년 뒤에 나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왔고 다시 15년이 흘렀지만 오늘은 바로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20주년이 되는 날이라 옛 기억들을 두서 없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선생님의 아드님, 그리고 뒷날 내 손 위 처남이자
내 공군 동기생인 그리고 동갑인 이 친구는 지난 주에 이곳 포틀래랜드를 방문하여
우리집에서 묵고 갔는데 40년 동안의 얘기를 요약해서 4시간 정도 추억을 더듬었
습니다.
그의 얘기가 자기는 노산 선생님의 육신적 아들이고 나는 정신적 아들이라고
말하여서 다시금 그 말을 곰곰히 되새기게 하였습니다.
다시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의 조카와 결혼하지 않았더면 처제가 초청하여 이곳에
이민 온 나는 현재 미국에 살고 있지도 않을 것이며 전혀 다른 방향, 다른 모습으로
어딘가에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만남이란 그만큼 중요한 것 같습니다.
<2002.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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