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역사 ,기억해야 할 자료들
2009.01.26 01:13
기억해야 할 자료들
순종황제 (융희)
1875년 세자 책봉.
1897년 황태자에 책봉.
일제의 앞잡이 이완용의 강요로 1 907년 헤이거 밀사
사건에 책임을지고 고종이 양위 하자 황제에 즉위했다.
서양식 황제 복장을 입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손기정
1936년 8월9일 베르린 올림픽 경기장에서 24살의 나이로
2시간 29분 19초로 결승점을 통과,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으나 가슴의 일장기가 일본 식민 통치하의 나라 현실을 말해주고 있어 마음 아프다.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자적 용포 입은 임금 모습은 전통적인 의관 차림을
보여준다. 경복궁 뜰에 나와 바닥에 카페트를 깔고
뒷배경은 지금의 사진관처럼 천으로 스튜디오를 만들어
퍼시벌 로엘이 촬영한 것이다.
흥선 대원군
이름은 이하응. 자는 시백. 호는 석파. 시호는 헌의. 영조의 5대손이며 고종의 아버지.
안동김씨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하게 지내다가 고종의
즉위로 1863년 대원군에 책봉, 10년간 집권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시 청으로 납치되어 3년간 유패 생활을 보내다가 1885년에 귀국하였다.
신미양요 아시아 함대 선상의 장병(1871)
미국 아시아 함대는 군함 5척, 총병력 1230명 함재,
대포 85문을 장비하고 조선원정 (5월16일 ~ 7월3일) 을 단행했다.
명성황후 장례 준비(1897년)
명성황후의 시신은 일본 낭인배에 시해되어 불에 탄 뼈 조각과 숯덩어리뿐 이었다.
운구준비를 위해 임시 사당을 준비하고 있는 마당에 명성황후 시신은 보자기에 쌓여져있다.
1910년 형장으로 끌려가는 안중근의사-(당32세)
여순(만주)감옥에서 형장으로 가는 마지막 모습.
한말 군인
항거하는 독립군
철도 방해죄로 독립군 처형 (1905년)
처형되는 세 사람은 김성남. 이춘근. 안순서이다.
1904년 9월 오전에 용산 마포간 철도부근 야산에서 처형되고 있는 현장의 사진이다.
로일전쟁 당시의 의병 처형(1904년)
이와 같은 장면은 일본 통치 후 3.1 일 운동에도 재현되어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기 위해
손을 뒤로 묶고 철사줄로 목을 매어 치명적으로 처형시켰다.
비참한 이 광경을 볼 때마다 탄압이 주는 일본의 만행은 무엇을 위한 선택 이었는지 묻고 싶어진다.
항의하는 농민 처형 (1905년)
당시 일본 통치하에 있는 한국인들은 재판 없이 체포되어 일본 관헌들에 의해 즉석에서 처형되었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 하고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는 민족의 애환은
국권을 지키지 못한 무능정부의 탓으로 돌릴 수 밖에....
중앙에 있는 일본 관헌은 복부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있다.
영친왕 일본 유배-1905
이등방문은 1905년 11월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초대 한국 총감이 되었다.
영친왕은 11세 어린나이로 도일했으나 내용은 인질과 다름이 없었다.
영친왕의 정식 칭호는 영왕이다.
일제시대에 조선왕실을 격하시키려고 "친" 이란 단어를 넣어서 영친왕으로 부르게 한 것이다.
순종황제를 이왕으로, 의왕을 의친왕으로 개칭 격하했다.
1904년 좌측이 이승만씨 (미국)
안중근 마지막 유언(1910)
일본 헌병대에게 가혹한 고문과 심문을 받았지만
사형 당하는 그날까지 애국충정으로 더욱 당당했다.
사형을 2일 앞두고 여순 감옥에서 마주 보고 대화하는 사람은
프랑스 신부 홍석구씨와 두 동생이 형님의 유언을 들으며 침묵을 지키고 있다.
1930년 항일 학생 교화시간
일장기 좌.우 충효가 무엇을 강요하는 것일까?
모두 죄수복장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남자현 여사 사진
손가락 2절을 잘라서 배포에 "조선독립원" 이라는 혈서를 쓰고
손가락을 조사국에 보내 우리의 독립정신을 국제연맹에 호소한 독립운동가 이시며
1933년 62세로 하얼빈에서 별세하여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신채호 선생님
35세 북경으로 가서 중국신문 중화일보의 논설을 하셨으며,
독립운동을 주도 하다가 10년형을 받고 옥중에서 별세.
세분 중에 제일 왼쪽 분 이시다.
서대문 형무소 구치장 내부-(여름)
부관 연락선
1921년 부산 부관(부산~시모노새끼) 연락선 출항 직전.
당시 이 연락선은 조선인을 전쟁터 또는 공사장으로 수송하여 일본 중국 등 제 삼국의 강제노동에 동원하였다.
(이 배를 타고간 많은 한국인은 되돌아 오지 못 했다)
놀이터가 된 궁궐-(1929)
처마 밑에 일장기로 장식되고 문짝은 유리로 바꾸어놓고 아동관이라 홍보하고 있다.
배델
1904년 영국 통신원으로 로일전쟁 취재차 내한했다가
양기택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고
일본침략을 기사로 우방에 알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
한국판과 영문판을 발간하다가 일제의 압력에 의해
국외로 추방되었고 다시 입국하여
1909년 서울에서 별세했다. 박재혁의사 비-1920년
박재혁 투사는 부산 경찰서장에게 면담 후
책속에서 폭탄을 꺼내들어 서 장앞에 던졌다.
박재혁 선생은 오직 조국을 위해 깨끗이 목숨을 바쳤다.
독립군 수난
1919년 두손들고 만세부르다 일본경찰대에 검거되어 한 쪽 팔이 짤렸다.
사진에 외과 안내판이 보인다.
팔이 짤린 한국인은 눈동자 초점이 없이 땅만 바라 보고 있다.
통감부 파출소
1909년, 1910년 조선은 경찰권을 일본에 위임하는 각서를 조인했다.
사냥개까지 동원하여 항거하는 독립군을 수색하는 데 이용했다.
소정각-명성왕후(민비) 화장된 곳
명성왕후의 시신이 일본 낭인배에 의해 소 정각 정자앞에서
불태워졌다.
조문객들이 가슴에 검은 상장을 달고 모여 있다.
---(일본 낭인배들이 옥호루에 난입하여 시해함)---
민비는 일제가 명성왕후를 함부로 부르기 위해 붙인
것이다.
옥호루
명성황후가 친러반일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자 일제가
일본 낭인배(깡패)를 동원하여 1895년 10월 8일 옥호루에 난입 하여 시해함.
옥호루에서 시해된 후 며칠이 지나 명성왕후의 새끼손가락이 문틈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이 건물은 궁중의 나인들이 자주 사 용하던 곳이며
오른 쪽에 아궁이가 있어 나인들이 목욕을 즐기던 부엌이다. 뒷편에 박물관 상단이 보인다.
학도병 출옥
1940년 형무소 출옥 당시 모습--(학도병)
피골이 앙상한 체구는 X선에 나타난 형상과 같아 보인다.
민족해방 책임자-박달씨
1936년 민족해방 책임자로 체포도 항일 투쟁본부 책임자
박달씨- (우측에서 3번째)-가 딸과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압송되고 있다.
심한 고문으로 옥사 했다.
광복단 사건
1920년 광복단 사건 발생
광복단 사건으로 인하여 주동자를 즉석에서 총검으로 심장을 찌르고 있다.
안중근 의사
1909 년 이등방문 암살.
1910년 3월26일 여순감옥에서 사형 집행.
당시 체포되어 법정에서 촬영-(안중근) 조선 유해 보관소-1940년
전쟁 중 소식 불명이 된 유해가 일본에서 임시 보관되었다가 얼마 후 한국에 인도 되었었는데 성명을 알 수 없는 유해는 조선이란 보자기에 쌓여 있다.
1920년대 영친왕과 이방자여사 신궁 참배--(매일 아침마다)
시체 수송--(1930)
조선인 시체를 매장하기 위해 중국인 노무자들이 관을 운송하고 있다.
한일합방 동의 전달--(1910)
1910년 8월 29일 순종이 마침내 한일합방 조약을 공포하니
이로써 대한제국의 국권은 완전히 일본에 탈취 되었다
북간도 독립군 모습
일본 75연대와 대항하기 위해 야산에 은신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독립신문 편집
임시정부 요인-(1940)
중앙 앞줄 김구 선생님
살기위한 도전
부모를 여의고 혼자 살아 남은 어린 소녀가 혼자서 짐보따리를 챙기고 있다.
일송 김동삼 선생
단기(4252년) 상해에서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
중국 연해주 지역에서 광복활동.
이동녕 선생
중국 복장으로 촬영되었다.
이동녕 선생의 시구절 일부.
<국내공기 가슴이 답답 망명의 자유가 바람처럼 그리워....>
독립군 재판-(1920)
애국지사를 체포하여 즉석재판을 하는 광경이다.
일본 경찰들은 장검을 들고 재판 분위기를 위협하고 있다.
간도 국민회소속-(1910)
북간도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압송 직전 주막집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젖먹이 아이까지 있다.
형장으로 호송되는 독립투사-(1904)
눈을 가리고 인력거에 태워져 형장으로 가는 독립투사.
독립군
민족의 수난
일가족이 일본 헌병대에 체포 되어 심한 고문을 받은 모습이다.
중앙에 앉아 있는 사람은 눈덩이에 심한 상처가 보인다.
전시된 유골들
독립투쟁을 벌이다가 집단학살 된 유골들.
잔혹한 행위에 무참히 숨져간 수많은 영혼들을 무엇으로 위로해야 한단 말인가....
http://www.poet.or.kr/ocean
저의 블로그에 오시면 사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순종황제 (융희)
1875년 세자 책봉.
1897년 황태자에 책봉.
일제의 앞잡이 이완용의 강요로 1 907년 헤이거 밀사
사건에 책임을지고 고종이 양위 하자 황제에 즉위했다.
서양식 황제 복장을 입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손기정
1936년 8월9일 베르린 올림픽 경기장에서 24살의 나이로
2시간 29분 19초로 결승점을 통과,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으나 가슴의 일장기가 일본 식민 통치하의 나라 현실을 말해주고 있어 마음 아프다.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자적 용포 입은 임금 모습은 전통적인 의관 차림을
보여준다. 경복궁 뜰에 나와 바닥에 카페트를 깔고
뒷배경은 지금의 사진관처럼 천으로 스튜디오를 만들어
퍼시벌 로엘이 촬영한 것이다.
흥선 대원군
이름은 이하응. 자는 시백. 호는 석파. 시호는 헌의. 영조의 5대손이며 고종의 아버지.
안동김씨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하게 지내다가 고종의
즉위로 1863년 대원군에 책봉, 10년간 집권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시 청으로 납치되어 3년간 유패 생활을 보내다가 1885년에 귀국하였다.
신미양요 아시아 함대 선상의 장병(1871)
미국 아시아 함대는 군함 5척, 총병력 1230명 함재,
대포 85문을 장비하고 조선원정 (5월16일 ~ 7월3일) 을 단행했다.
명성황후 장례 준비(1897년)
명성황후의 시신은 일본 낭인배에 시해되어 불에 탄 뼈 조각과 숯덩어리뿐 이었다.
운구준비를 위해 임시 사당을 준비하고 있는 마당에 명성황후 시신은 보자기에 쌓여져있다.
1910년 형장으로 끌려가는 안중근의사-(당32세)
여순(만주)감옥에서 형장으로 가는 마지막 모습.
한말 군인
항거하는 독립군
철도 방해죄로 독립군 처형 (1905년)
처형되는 세 사람은 김성남. 이춘근. 안순서이다.
1904년 9월 오전에 용산 마포간 철도부근 야산에서 처형되고 있는 현장의 사진이다.
로일전쟁 당시의 의병 처형(1904년)
이와 같은 장면은 일본 통치 후 3.1 일 운동에도 재현되어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기 위해
손을 뒤로 묶고 철사줄로 목을 매어 치명적으로 처형시켰다.
비참한 이 광경을 볼 때마다 탄압이 주는 일본의 만행은 무엇을 위한 선택 이었는지 묻고 싶어진다.
항의하는 농민 처형 (1905년)
당시 일본 통치하에 있는 한국인들은 재판 없이 체포되어 일본 관헌들에 의해 즉석에서 처형되었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 하고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는 민족의 애환은
국권을 지키지 못한 무능정부의 탓으로 돌릴 수 밖에....
중앙에 있는 일본 관헌은 복부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있다.
영친왕 일본 유배-1905
이등방문은 1905년 11월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초대 한국 총감이 되었다.
영친왕은 11세 어린나이로 도일했으나 내용은 인질과 다름이 없었다.
영친왕의 정식 칭호는 영왕이다.
일제시대에 조선왕실을 격하시키려고 "친" 이란 단어를 넣어서 영친왕으로 부르게 한 것이다.
순종황제를 이왕으로, 의왕을 의친왕으로 개칭 격하했다.
1904년 좌측이 이승만씨 (미국)
안중근 마지막 유언(1910)
일본 헌병대에게 가혹한 고문과 심문을 받았지만
사형 당하는 그날까지 애국충정으로 더욱 당당했다.
사형을 2일 앞두고 여순 감옥에서 마주 보고 대화하는 사람은
프랑스 신부 홍석구씨와 두 동생이 형님의 유언을 들으며 침묵을 지키고 있다.
1930년 항일 학생 교화시간
일장기 좌.우 충효가 무엇을 강요하는 것일까?
모두 죄수복장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남자현 여사 사진
손가락 2절을 잘라서 배포에 "조선독립원" 이라는 혈서를 쓰고
손가락을 조사국에 보내 우리의 독립정신을 국제연맹에 호소한 독립운동가 이시며
1933년 62세로 하얼빈에서 별세하여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신채호 선생님
35세 북경으로 가서 중국신문 중화일보의 논설을 하셨으며,
독립운동을 주도 하다가 10년형을 받고 옥중에서 별세.
세분 중에 제일 왼쪽 분 이시다.
서대문 형무소 구치장 내부-(여름)
부관 연락선
1921년 부산 부관(부산~시모노새끼) 연락선 출항 직전.
당시 이 연락선은 조선인을 전쟁터 또는 공사장으로 수송하여 일본 중국 등 제 삼국의 강제노동에 동원하였다.
(이 배를 타고간 많은 한국인은 되돌아 오지 못 했다)
놀이터가 된 궁궐-(1929)
처마 밑에 일장기로 장식되고 문짝은 유리로 바꾸어놓고 아동관이라 홍보하고 있다.
배델
1904년 영국 통신원으로 로일전쟁 취재차 내한했다가
양기택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고
일본침략을 기사로 우방에 알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
한국판과 영문판을 발간하다가 일제의 압력에 의해
국외로 추방되었고 다시 입국하여
1909년 서울에서 별세했다. 박재혁의사 비-1920년
박재혁 투사는 부산 경찰서장에게 면담 후
책속에서 폭탄을 꺼내들어 서 장앞에 던졌다.
박재혁 선생은 오직 조국을 위해 깨끗이 목숨을 바쳤다.
독립군 수난
1919년 두손들고 만세부르다 일본경찰대에 검거되어 한 쪽 팔이 짤렸다.
사진에 외과 안내판이 보인다.
팔이 짤린 한국인은 눈동자 초점이 없이 땅만 바라 보고 있다.
통감부 파출소
1909년, 1910년 조선은 경찰권을 일본에 위임하는 각서를 조인했다.
사냥개까지 동원하여 항거하는 독립군을 수색하는 데 이용했다.
소정각-명성왕후(민비) 화장된 곳
명성왕후의 시신이 일본 낭인배에 의해 소 정각 정자앞에서
불태워졌다.
조문객들이 가슴에 검은 상장을 달고 모여 있다.
---(일본 낭인배들이 옥호루에 난입하여 시해함)---
민비는 일제가 명성왕후를 함부로 부르기 위해 붙인
것이다.
옥호루
명성황후가 친러반일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자 일제가
일본 낭인배(깡패)를 동원하여 1895년 10월 8일 옥호루에 난입 하여 시해함.
옥호루에서 시해된 후 며칠이 지나 명성왕후의 새끼손가락이 문틈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이 건물은 궁중의 나인들이 자주 사 용하던 곳이며
오른 쪽에 아궁이가 있어 나인들이 목욕을 즐기던 부엌이다. 뒷편에 박물관 상단이 보인다.
학도병 출옥
1940년 형무소 출옥 당시 모습--(학도병)
피골이 앙상한 체구는 X선에 나타난 형상과 같아 보인다.
민족해방 책임자-박달씨
1936년 민족해방 책임자로 체포도 항일 투쟁본부 책임자
박달씨- (우측에서 3번째)-가 딸과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압송되고 있다.
심한 고문으로 옥사 했다.
광복단 사건
1920년 광복단 사건 발생
광복단 사건으로 인하여 주동자를 즉석에서 총검으로 심장을 찌르고 있다.
안중근 의사
1909 년 이등방문 암살.
1910년 3월26일 여순감옥에서 사형 집행.
당시 체포되어 법정에서 촬영-(안중근) 조선 유해 보관소-1940년
전쟁 중 소식 불명이 된 유해가 일본에서 임시 보관되었다가 얼마 후 한국에 인도 되었었는데 성명을 알 수 없는 유해는 조선이란 보자기에 쌓여 있다.
1920년대 영친왕과 이방자여사 신궁 참배--(매일 아침마다)
시체 수송--(1930)
조선인 시체를 매장하기 위해 중국인 노무자들이 관을 운송하고 있다.
한일합방 동의 전달--(1910)
1910년 8월 29일 순종이 마침내 한일합방 조약을 공포하니
이로써 대한제국의 국권은 완전히 일본에 탈취 되었다
북간도 독립군 모습
일본 75연대와 대항하기 위해 야산에 은신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독립신문 편집
임시정부 요인-(1940)
중앙 앞줄 김구 선생님
살기위한 도전
부모를 여의고 혼자 살아 남은 어린 소녀가 혼자서 짐보따리를 챙기고 있다.
일송 김동삼 선생
단기(4252년) 상해에서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
중국 연해주 지역에서 광복활동.
이동녕 선생
중국 복장으로 촬영되었다.
이동녕 선생의 시구절 일부.
<국내공기 가슴이 답답 망명의 자유가 바람처럼 그리워....>
독립군 재판-(1920)
애국지사를 체포하여 즉석재판을 하는 광경이다.
일본 경찰들은 장검을 들고 재판 분위기를 위협하고 있다.
간도 국민회소속-(1910)
북간도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압송 직전 주막집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젖먹이 아이까지 있다.
형장으로 호송되는 독립투사-(1904)
눈을 가리고 인력거에 태워져 형장으로 가는 독립투사.
독립군
민족의 수난
일가족이 일본 헌병대에 체포 되어 심한 고문을 받은 모습이다.
중앙에 앉아 있는 사람은 눈덩이에 심한 상처가 보인다.
전시된 유골들
독립투쟁을 벌이다가 집단학살 된 유골들.
잔혹한 행위에 무참히 숨져간 수많은 영혼들을 무엇으로 위로해야 한단 말인가....
http://www.poet.or.kr/ocean
저의 블로그에 오시면 사진들을 볼 수 있습니다
댓글 0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유튜브 박영숙영 영상'시모음' | 박영숙영 | 2020.01.10 | 174 |
공지 | 박정희/ 외국학자들의 평가 | 박영숙영 | 2018.03.01 | 970 |
공지 | AP종군기자의 사진을 통해 다시 보는 1950~53년 韓國戰爭 | 박영숙영 | 2015.07.26 | 2204 |
공지 | 박정희 대통령의 시 모음 | 박영숙영 | 2015.07.06 | 1769 |
공지 | 이순신 장군의 어록 | 박영숙영 | 2013.02.22 | 1654 |
공지 | 세계의 냉정한 평가 ㅡ박정희 | 박영숙영 | 2012.03.14 | 897 |
공지 | 저작권 문제있음 알려주시면 곧 삭제하겠습니다. | 박영숙영 | 2009.09.02 | 841 |
» | 슬픈역사 ,기억해야 할 자료들 | 박영숙 | 2009.01.26 | 986 |
공지 | 박정희 대통령의 명언 | 박영숙 | 2009.01.26 | 2763 |
공지 | 박정희와 맥도널드 더글라스사 중역의 증언 | 박영숙 | 2009.01.26 | 1324 |
153 | 대상과인식과정 | 박영숙영 | 2019.06.06 | 77 |
152 | 그날이 오면 (심훈) | 박영숙영 | 2019.04.04 | 302 |
151 | 이황의 풍물시/ 문경새재/ 한벽루/ 정약용/신경림 목계장터 | 박영숙영 | 2018.01.27 | 439 |
150 | 나옹/ 목은 이색/이규보/ 정철/기대승과 이황의 동호 전별 시 화답시 | 박영숙영 | 2018.01.27 | 614 |
149 | 아, 우리나라 국기, 태극기 [스크랩] | 박영숙영 | 2016.06.20 | 589 |
148 | 옛날 옛적의 귀한 이미지 자료 | 박영숙영 | 2016.04.09 | 338 |
147 | 짚신신고 이렇게도 못살았는데 | 박영숙영 | 2015.08.04 | 388 |
146 | 꽃등/ 류시화 | 박영숙영 | 2015.06.14 | 392 |
145 | <'感興' 중 - 白居易> | 박영숙영 | 2015.05.12 | 160 |
144 | 화비화(花非花) - 백거이 | 박영숙영 | 2015.05.12 | 1817 |
143 | 낙서재(樂書齋) _ 고산 윤선도 | 박영숙영 | 2015.05.12 | 446 |
142 | 바다를 가르며(泛海 범해) _ 최치원 | 박영숙영 | 2015.05.12 | 453 |
141 | 俊禪子(준선자) - 淸虛休靜(청허휴정) | 박영숙영 | 2015.05.12 | 213 |
140 | 퇴계가 두향에게 보냈다고 전해진 시 | 박영숙영 | 2015.05.12 | 451 |
139 | 집착하지 않는 삶 | 박영숙영 | 2014.09.07 | 246 |
138 | > 흰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 | 박영숙영 | 2014.09.07 | 280 |
137 | > 오만가지 생각이 한 점 눈송이다,< 청허 휴정 선사 | 박영숙영 | 2014.07.16 | 739 |
136 | 長恨歌(장한가) - 백거이 | 박영숙영 | 2014.09.07 | 10052 |
135 | 춘산에 / 우탁 | 박영숙영 | 2014.06.18 | 257 |
134 | 고시조 모음 | 박영숙영 | 2014.06.18 | 19493 |
133 | [시조모음 ]<백설이 자자진 골에> 묵은 이색 | 박영숙영 | 2014.06.24 | 11418 |
132 | 靜夜思(정야사) - 이백 (중국명시) | 박영숙영 | 2014.05.08 | 2443 |
131 | 도연명 陶淵明, 중국 晉나라 시인 | 박영숙영 | 2014.06.18 | 257 |
130 | 나룻배와 행인 /한용운 | 박영숙영 | 2014.06.16 | 239 |
129 | 賦得高原草送別(부득고원초송별)-백거이 (중국명시) | 박영숙영 | 2014.05.08 | 801 |
128 | 遊子吟(유자음)-맹교 (중국명시) | 박영숙영 | 2014.05.08 | 3192 |
127 | 파초우 /조지훈 | 박영숙영 | 2014.05.08 | 2630 |
126 | 고사(古寺)" /조지훈 | 박영숙영 | 2014.05.08 | 591 |
125 | 신부/ 서정주 | 박영숙영 | 2014.05.08 | 369 |
124 | 귀촉도(歸蜀途)/ 서정주 | 박영숙영 | 2014.05.08 | 947 |
123 | 벽(壁)/ 서정주 | 박영숙영 | 2014.05.08 | 1901 |
122 | 봄이 오면 산에 들에 /홍성란 | 박영숙영 | 2014.05.07 | 272 |
121 | 홍성란 /바람불어 그리운 날 | 박영숙영 | 2014.05.07 | 248 |
120 | 따뜻한 슬픔 ...홍성란 | 박영숙영 | 2014.05.07 | 338 |
119 | 홍성란 /들길 따라서 | 박영숙영 | 2014.05.07 | 534 |
118 | 홍성란 / 명자꽃 | 박영숙영 | 2014.05.07 | 857 |
117 | 시조대상 수상작 모음/ 홍성란, 정수자 | 박영숙영 | 2014.05.07 | 448 |
116 | 正月二日立春 [입춘]/ 퇴계 이황 | 박영숙영 | 2014.02.16 | 915 |
115 | 조국의 영웅 "안중근 의사 어머니 편지"ㅡ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 박영숙영 | 2014.02.14 | 772 |
114 | 신부 /서정주 | 박영숙영 | 2014.02.10 | 6128 |
113 | 파초우(芭蕉雨)/詩: 조지훈 | 박영숙영 | 2014.02.10 | 838 |
112 | "不變(불변)" /학명선사 | 박영숙영 | 2014.02.06 | 590 |
111 | 靜坐然後知平日之氣浮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 | 박영숙영 | 2014.02.06 | 458 |
110 | 冬夜(동야) - 金三宜堂(김삼의당) | 박영숙영 | 2014.02.06 | 439 |
109 | 思齋 / <眞樂在閑居 金正國(1485~1541)> | 박영숙영 | 2014.02.06 | 260 |
108 | [스크랩]황진이 시모음 | 박영숙영 | 2013.07.05 | 4215 |
107 | 遣憂(견우) - 丁若鏞(정약용) | 박영숙영 | 2014.02.06 | 300 |
106 | 不疎亦不親(불소역불친) | 박영숙영 | 2014.02.06 | 411 |
105 | (詩)로 보는 이순신의 생각 읽기 | 박영숙영 | 2013.02.22 | 747 |
104 | 이순신 장군의 시조 모음 | 박영숙영 | 2013.02.22 | 7904 |
103 | 한국의 위인, 성웅 이순신 장군의 명언 | 박영숙영 | 2013.02.22 | 720 |
102 | (가노라 삼각산아) - 김상헌 | 박영숙영 | 2013.02.22 | 1755 |
101 | (장백산에 기를 꽂고) - 김종서 | 박영숙영 | 2013.02.22 | 848 |
100 | (한 손에 가시 쥐고)- 우 탁 | 박영숙영 | 2013.02.22 | 528 |
99 | (샛별지자 종다리 떳다) - 김천택 | 박영숙영 | 2013.02.22 | 66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