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 /서정주

2014.02.10 11:09

박영숙영 조회 수:5747 추천:49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알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알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잡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 시집‘질마재 神話’(1975)
  
* 돌쩌귀 : 문짝을 여닫게 하기 위해 문설주에 달아 둔, 쇠붙이로 만든 암수 두 개로 된 한 벌의 물건.
* 귀밑머리 : 이마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좌우로 갈라 귀 뒤로 넘겨 땋은 머리
또는 빰에서 귀의 가까이에 난 머리털. 여기서의 뜻
  
* 그러고 나서 : 행을 바꾼 것은 신랑이 도망친 이후 40~50년이라는 시간이 경과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
* 매운 재 : 진한 잿물을 내릴 수 있는 재
* 초록 재와 다홍 재 : 초록 저고리와 다홍 치마를 연상케 하는 것으로
신부의 영적 존재의 아름다움을 의미함. 곧 이 작품을 한 차원 상승시키는 원동력이 됨.
*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 달아나 버렸습니다.:
신혼 조야에 오줌을 누러 급히 나가던 신랑의 옷자락이 문에 걸렸는데,
신랑은 이를 신부가 그 사이를 못 참아서 자기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것을 알고는,
신부가 음탕해서 못 쓰겠다며 그대로 달아나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랑의 급한 성질과 어리석은 속단이 비극의 주된 원인으로 제시되어 있다.

* 그러고 나서 -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이미 독자는 이 이야기가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전설 특유의 전기적 성격을 띤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어리석은 신랑과 대비되는 신부의 매서운 집념이 나타나 있는 부분이다.
*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신부가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는 부분이다.
생명이 없는 상태에서도 초야의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앉아 있었다는 이야기는
일부종사의 가치를 지키고야 말겠다는 신부의 집념이 영혼의 세계로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참고자료
  
시집 <질마재 神話>의 맨 첫머리에 실린 작품이다.
<질마재 신화>는 미당(未堂)의 문학이 원숙기에 접어든 시기에
간행된 시집으로서 초기의 퇴폐적, 상징적 ‘원죄 의식(原罪意識)’에서 벗어나
‘신라’와 ‘불교’에 대한 관심을 거쳐 가장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정취에 몰입한 시기에 간행된 것이다.
이 시집에 담긴 대부분의 시는 대체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내용도 그야말로 보편적인 한국인의 질박한 삶 그 자체를 담고 있어
가장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신부'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여인의 매운 절개를 놀랍도록 담담하고 짧은 이야기체로 엮었다.
여인의 절개란 어김없이 고통과 슬픔, 한(恨)의 여운을 남기는데,
이 작품에서는 강렬한 정서를 담고 있으면서도 전혀 괴로움과
한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묘한 안정감을 준다.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첫날밤의 신부가 신랑의 오해로 말미암아
소박을 당하였지만, 40년인가 50년 -이 시간은 한 인간의 삶 전체를 의미한다 하겠다.-
수십년이 지난 뒤까지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남아 있었고
우연히 들린 신랑의 손길이 닿고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다.
이로써 여인네의 정절의 삶이 완성된 것이다.

이 시의 강렬한 인상은 이미 생명이 없는 존재이면서도
고스란히 제 모습대로 앉아 있는 ‘초록 재와 다홍 재’의 신부에 연유한다.
오히려 철부지이며 지각 없는 신랑에 비해 철저히 유교적인 일부종사(一夫從事)의
매서운 신념을 지닌 신부는, 그러나 현실적인 열녀(烈女)의 세계를 뛰어넘는다.

신부는 ‘초록 재와 다홍 재’가 되어서도 예전의 모습 그대로 남음으로써
육(肉)의 세계를 넘은 영(靈)의 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우리는 서정주 문학의 독특한 미학(美學),
즉 현실적 세계관이었던 유교의 정절이 교묘한 토속적 심미 의식(審美意識)을 통해
신화적 세계관의 경지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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