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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감리교목회자문학」 창간에 즈음하여- 최선호
2016.12.09 04:50
□창간사□
「해외감리교목회자문학」 창간에 즈음하여
최선호
(목사/본회 회장)
기독교 대한감리회 목회자 여러분들이 해외에 나와 한 마음으로 뭉쳐 해외감리교목회자문우회를 조직하고 그 활동영역을 넓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렇게 조촐한 문집을 내어 우리들의 광장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 확실하게 들어나고 우리들의 가슴마다에 향유 가득한 옥합이 자리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이미 제작 운영 중인 홈페이지(cafe.daum.net/KMCalm)를 이용하시는 회원이 점점 늘고, 감동적인 글을 올려 우리들의 오아시스가 건설되고 있음도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정서가 더욱 함양되며, 인생을 더욱 깊게 사유하고, 회원 모두의 안식처로서의 위로와 자랑으로 이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글은 바로 그 글을 쓴 사람의 인격입니다. 그의 성품이며 또한 기량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직접 대면을 하지 않아도 글로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글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글이야말로 이상적인 선교도구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유한하지만 글은 오래오래 널리널리 전파되는 속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우리가 남긴 글들이 세계만방에 퍼져서 주님의 이름으로 위로와 기쁨이 되어 줄 것입니다.
문인의 잉크는 순교자가 흘린 피에 비유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가슴을 가장 깊이 파고드는 감동이 있습니다. 이런 감동을 우리들 심령의 샘에서 자꾸자꾸 퍼 올려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갈한 목을 시원하게 축여 주어야 합니다. 이런 일을 목회자인 우리가 안하면 누가 하겠습니까? 이를 간과하지 않고 미주 감리교 목회자 여러분들이 첫발을 내딛는 자부심도 적지 않습니다.
이에 사명감을 느껴 발 벗고 협력하시는 시인 지인식 목사님과 여러 회원 목사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따라서 머지않은 장래에 기독교문학의 창달을 통한 제2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지는 날이 어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기독교문학을 포함한 모든 문학은 첫째로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재미라면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감동에서 오는 재미와 흥분에서 오는 재미가 그것입니다. 이 둘 중에 흥분에서 오는 재미가 아니라 감동에서 재미가 오도록 해야 합니다. 흥미 위주의 작품은 인간을 흥분시킬 수는 있으나 감동시키기는 어렵습니다. 흥분은 감동과 같이 인간을 정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문학, 특히 기독교문학은 감동적 재미를 느끼도록 창작되어야 합니다.
둘째, 자연스러운 완성에 도달해야 합니다.
기독교문학이라 해서 억지로 뜯어 맞추는 식으로 부자연스럽게 목적에 도달하려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됩니다. 자연스러운 완성이란 광고나 선전, 또는 무엇을 보이게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인간의 의식세계에 목적을 두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의 존재의식과 무의식 세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또는 아가페적 사랑 창조의 발견에 두어야 합니다.
셋째, 기독교문학이 성서적이라는 오해로 어느 경우라도 모방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모방적 요소는 탈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자면 무엇보다도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는 이는 기독문학인이 될 수 없거니와 또 되어서도 안 됩니다. 기독문학인은 성경의 핵심을 알며 영적 생활을 하는 이라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으로부터 천국열쇠까지 받은 수제자의 위치에 있었으나 주님으로부터 '사단'이란 책망을 들었고, 주님을 모른다고 배신한 사실은 베드로 자신에게 성령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성령을 받은 후에는 절대로 가치관이나 신앙관의 혼란이 없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 글만 쓴다고 기독문학인이 아니라 믿음의 반열에서 인생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수많은 소재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진리의 대변을 위해, 이단 퇴치를 위해, 영혼 구원을 위해 문학적으로 정서의 승화를 이루어 내야 합니다. 기독교문학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기독교(박애사상)적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역효과의 위험이 따르게 됩니다. Paul Tillich는 그의 기독교 예술론에서 모든 예술은 신의 문제, 인간존재의 문제에 궁극적인 관심사를 포용토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예술인들은 신과 인간과의 사이에 사랑의 연결고리를 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찬양하는 가장 좋은 무기가 예술임을 실감케 될 것이라 했고, Hazelton은 “우리가 쓰는 말은 찬양이 되어야 하고 문학은 복음에서 나타나는 죄, 용서, 회개, 사랑, 성령, 구원, 성삼위 일체, 성만찬 등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프랑소아 모리악은 "나는 복음전파를 위해서 글을 쓴다. 인간이 지니는 모든 악과 어두움을 파헤치지만 그 어두움 속에 비치는 한 가닥 구원의 빛을 증명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했습니다.
넷째, 기독교 문학은 선교와 목회에 적극적인 봉사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모질게도 수많은 죄악이 깔려 있습니다. 콘크리트처럼 굳어있는 죄성(罪性)들을 녹여내는 뜨거운 감동적 기록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조명하며 찬양하므로 세상을 아름답고 새롭게 하는 작업의 끊임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작가의 인생관은 통속적이 아니고 우주적이고, 박애사상의 역사를 통찰하는 예지가 들어있어, 이를 사역의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노발리스는 "시인은 영적 지도자의 사명을 져야 된다."고 했습니다. 이 직분은 목회자들이 져야 될 직분입니다. 바꿔 말하면 목회자는 시인과 같은 심성을 지녀야 인간을 따뜻하게 이해하고 영적인 설교를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상 최초의 가장 위대한 시인입니다. 인간과 자연을 가장 자애로운 눈길로 바라보고 말씀하셨던 영적 시인이었기에 그 분을 닮지 않으면 좋은 작품을 쓸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문인들에게 막중한 사명이 있습니다.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우주관, 세계관, 인생관을 가졌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작가로서 성숙하지 않은 채 복음전파의 의욕만 가지고 글을 쓰면 설교문이나 선전문구밖에는 안 되어 독자들에게 따돌림을 받게 됩니다. 아무리 재주 있게 썼다할지라도 작가 자신의 기독교적 밝은 눈이 뜨여있지 않으면 영적 감동은커녕, 오히려 기독교를 오도할 우려마저 없지 않습니다.
세계는 우리의 교구입니다. 여기에 기독교문학 내지 기독교문화의 확산이야말로 세계복음화의 지름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