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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놀라움> 단테와 괴테

2016.12.25 13:41

최선호 조회 수:332

 

 

<삶의 놀라움> 단테와 괴테

                                                                                                          

                                                                                               

시성(詩聖)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와 괴테(Goethe Johann Wolfgang 1749-1832)는 각각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 다른 세대를 살았지만 그들에게는 뚜렷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추구하는 평화이다. 단테는 신곡(神曲)”의 저자이다. 수도자로서 수도복을 입고 “저는 평화를 찾으려고 왔습니다”라며 수도원을 두루 방문하였다. 평화를 찾아 행복의 놀라움을 인생들에게 선사하려는 꿈을 잃지 않은 사람이었다. 평화는 놀라움 중의 놀라움으로 그를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괴테는 “놀라움을 갖기 위하여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 따라서 이들의 생애야말로 놀라움의 경험이 풍부했던 삶이었다. 괴테는 불후의 명작 파우스트(Faust)를 남겼다. 그들이 남긴 문학작품들에서 지극한 놀라움의 가치를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만큼 그들은 놀라움을 놓지지 않고 또렷이 감지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단테나 괴테의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니다. 보다 더 크고 위대한 가장 큰 놀라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에서 만날 수 있다. 

〈성경〉에서 제재를 택한 작품으로 대표적인 것은 밀턴의「실락원」이나 센케비치의「쿠오바디스」등을 들 수 있다. 기독교 정신을 부각시킨 작품으로는 빅돌 유고의「레미제라블」, 찰스 디킨즈의「크리스마스 캐롤」, 존 번연의「천로역정」, 단테의「신곡」, 헤르만 헷세의「수레바퀴 밑」,「페터 카맨찐트」, 부르제의「제자」, 모리악의「테레즈데케이루」,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작품 이외에 존 스타인 백의「분노의 포도」등 적지 않은 작품들이 그 물결을 이루고 있다. 이는 인류 문학사에 길이 간직될 보화들이다괴테는 룻기를 성경속의 가장 아름다운 문학이라 극찬했고, 욥기에서 파우스트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존 번연은 룻기에서 천로역정의 주인공인 기독도의 인간상을 구상했고, 존 밀턴은 가장 현숙한 인류의 여인이 바로 룻이라고 격찬했다. 레오 톨스토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탕자의 비유"(15:11-32)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10:25-37)를 문학 중에도 훌륭한 소설적 요소를 갖춘 문학이라고 극찬했다. 

1416세기에 있었던 Renaissance 이전의 문학은 Hellenism(현실 긍정, 향락 추구) Hebraism(현실 부정, 구도)의 두 사조뿐이었다. Hellenism의 사조에는 Homer의「Iliad,Odyssey, 소포클레스의 여러 비극들, 로마시대의 키케로나 베르길리우스의 찬란함이 배경이 되고 있다. 두 말할 것 없이 Hebraism의 결정은「성경」이다. 성경이야말로 기독문예의 알파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고백록」,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2)의「그리스도를 본받아」등도 손꼽히는 작품들이다. 도스토예프스키나 그레엄 그린의 작품들도 기독문학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기독문예는 인류를 절망에 빠지지 않게 하거나 절망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는 문예를 말한다. 예술은 인간을 더러움에서 건지는 효능이 있다고 말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기독문예는 더 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 말씀 확산의 절대적 도구가 되어야 한다. 이는 우주적 놀라움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말이 구약성경에 41번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후 "좋다"라고 하셨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완전하다'이다. 이 역시 놀라움의 감동임이 분명하다. 프랑스의 서정 시인이며 상징파의 수령으로 알려진 말라르메(Mallarm'e St'ephane 1842-98) "불확실한 현대를 바른 길로 이끌 정신은 바로 시 정신"이라고 했다. 말라르메가 말한 시 정신은 건전한 시 정신을 두고 한 말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치우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시 정신임이 분명하다.                              

놀라움은 총체적으로 삶에 감동의 불을 지른다. 따라서 그 속에 무시 못할 거대한 힘이 작용한다. 이 작용은 삶의 내부를 충만하게 하고 그 충만함 또한 일시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래 지속 되면서 또 다른 놀라움을 발견하게 한다. 그러므로 놀라움은 유한한 세상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영적으로 높고 깊고 넓은 하늘 속까지를 관통하기도 한다. 그런 중에 놀라움은 또 다른 놀라움의 놀라움을 만나게 한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고후12:1-6) -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낙원에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계시의 말을 들은 개인적인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어떤 이들은 그가 이 경험을 갖게 된 것은 돌에 맞아 거의 죽게 된 사건을 통해서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14:19). “셋째 하늘” - 이 말은 전체 구조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말로서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곳 또는 그의 나라를 상징하는 말이다. 한편 일부 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첫째 하늘은 현 지구의 대기권을 말하고, 둘째 하늘은 온 우주를 뜻하며, 셋째 하늘은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시는 곳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에 랍비들이 하늘을 7층으로 생각하는 우주 개념에 근거하여, 여기에 언급된 셋째 하늘은 7층 중 3층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셋째 하늘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공간적인 문제 또는 유대인들의 묵시 문학적인 배경의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심오하고 충절한 계시를 받기 위해 인간과는 초월된 한 곳, 즉 셋째 하늘로 환상 중에 갔다는 사실이다. “몸 안에…… 몸 밖에” - 사도 바울은 자신이 셋째 하늘에 올라가 환상을 보았을 때에 그의 몸과 함께 환상 속에 들어 갔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영()만 그 환상 가운데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자신도 분명히 모른다고 솔직히 고백하였다. “낙원(, 파라데이소스)이란 말은 원래 고대 페르시아어였으나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에 유입되었다. 이 말은 원래 ‘공원’ 또는 ‘정원’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에도 세 번 쓰였고(2:8;2:5;4:13), 그 후 랍비 문헌에서도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신약에서는 눅23:43과 계2:7에서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 부분에서 자신이 낙원을 찾아가서(몸 안 또는 몸 밖으로) 계시를 받은 경험을 기술하면서 이 말을 사용하였다. 2,3절과 병행해서 생각한다면 바울은 낙원의 위치를 셋째 하늘에 둔 것이 된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주의 계시’로 묘사하면서도 주를 낙원에서 직접 만났는지 또는 몸은 나타내시지 않고 계시만 주셨는지 밝히지 않는다. 전자의 입장을 취한다면 당시 바울은 죽은 의인들은 이미 낙원에서 주와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고후 5:8, 1:23과도 조화를 이룬다. “이런 사람” - 바울 자신을 말하는데 자신을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본 결과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을 위하여… 아니 하리라’라는 본절의 표현은 자신이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며,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신에게 공을 돌리거나 영광을 돌리지 않겠다는 겸손의 모습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은은하고 뜨거운 놀라움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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