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 정 지 용

2019.01.28 14:23

박영숙영 조회 수:114

향수  / 정 지 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던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1927<조선지광(朝鮮之光)> 3월 호. 통권 56호에 발표된 작품이다. 또한 1935년에 낸 시집 <정지용 시집>에 수록되어있다. <향수>는 정지용의 초기작으로 그가 추구한 모더니즘적인 양상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향수란 말은 자기가 태어난 출생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인간은 성장하게 되면 삶의 터전을 찾아 외지로 가게 된다. 타향에서의 삶이 빈곤하든 부유하든 지기가 태어나서 자리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객지에서 뿌리박고 터전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더할 것이다. 이 시가 일제의 암흑기에 쓰여 졌으니 나라를 잃은 비애도 가미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리라. 고향은 누구나 갖고 있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자기를 낳아주었고 키워준 출생지애 대한 생각은 일생 동안 간직하게 된다.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향수>에는 실개천, 얼룩빼기 황소,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아버지, 하늘을 향해 쏘던 화살, 어린 누이와 예쁠 것도 없는 아내, 서리까마귀 등이 등장하며 옛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는데 유독 빼먹은 것이 있다면 어머니 일 것이다. 정지용의 향수에 왜 어머니를 빼놓았는지는 여러 추측이 있을 것이다. 혹시나 고부간의 불화는 없었는지 하는 추론도 하게 된다. 시의 절마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를 되풀이한 것은 향수란 시에서 고향 상실을 강조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사무친 고향이기 때문이다. 동물에게도 귀소성(歸巢性)이란 게 있다. 자기가 태어나고 살던 곳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인간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전자와 같은 자연환경과 가족관계가 서로 엉켜 있기도 하지만 고향이란 옛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변해버려 옛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니까 본래의 고향을 상실하는 아픔이 가중되기 때문이리라.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한다. 고향이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래서 향수는 인간을 끝까지 따라온다. 삶의 종착역까지 향수는 같이 할 것이다.

 

정지용이 1935<정지용 시집><시문학사>에서 냈다. 이 시집 발간에 대해서 이양하는 이 시집에 대해 “그러나 우리는 여기 마침내 우리의 욕심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처음 씨의 시집이 출판되었으매 우리는 한 아름 꺾어든 꽃다발처럼 씨의 시집을 끌어안고 그의 아름다운 색채를 향기를 형체를 윤곽을 마음대로 그리며 엿보며 어루만지게 되었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일보 1935128) 지용의 제2시집은 <문장사>에서 <백록담>을 펴냈다. 정지용은 많은 시집을 내지 않았다.

 

정지용은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 씨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연못에서 용이 승천하는 태몽을 꾸었다 해서 아명이 지룡(池龍)이었다. 1911년 대홍수로 집이 떠내려갔고 한의사였던 아버지의 한약재와 한약 도구가 떠내려가 가세가 기울어 어렵게 살게 되었다고 한다. 지용은 12세에 동갑내기 송재숙과 1913년에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 처가에서 혼례를 올렸다. 지용이 191817세의 나이로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12월에 <서광> 창간호에 유일한 소설 <삼인>을 발표했다. 19193,1운동 때 교내 문제로 휘문사태 주동자가 되어 이선근과 함께 무기정학을 받아 1,2학기 수업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교비 장학생에 선발되어 일본 동지사(同志社)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1929년에 졸업했다. 정지용은 약속대로 귀국해 모교인 휘문고보 영어교사로 근무했다. 교사 시절에 지용은 늘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는데 습관보다는 취향의 의미가 있었다. 검정 두루마기를 입었기 때문에 뒷모습만 보아도 정지용임을 알 수 있었다. 지용은 31녀를 두었다.

 

1930년 박용철 김영랑 이하윤 등과 같이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에 휘문고보에서 직장을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옮기고 다시 이화여대 교수로 직장을 옮겼다. 지용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1926<창조>지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를 발표해 등단했다. 오장환의 스승이며 구인회의 창립회원이기도 하다. 1939<문장>지의 추천 위원이 되어 청록파의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을 등단시켰으며 김종한 박남수를 등단시켰다. 1933<가톨릭 청년>지에 이상의 시 <꽃나무>를 추천해 등단시켰다. 좌익 문학단체에 가입해 조선문학가동맹 아동문학분과 위원장이 되었으나 문학 활동을 하지 않고 뜻이 맞지 않아 전향했다. 1942년 대동아전쟁 이후부터 붓을 꺾고 글을 쓰지 않았다.

 

정지용 시의 경향을 보면 몇 가지의 유형이 있다. 모더니즘 계열의 시, 가톨릭 적 종교시, 그리고 전통 지향의 시도 많이 보인다. 지용은 선명한 이미지와 감각적인 시를 썼다. 한국 시인들이 고향을 노래한 시가 많지만 <향수>야말로 고향을 노래한 대표적인 시가 아닌가 여겨진다. 김기림은 “정지용은 시의 낭만주의 요소를 제거하고 시의 기술주의를 주장하며 시를 썼다”라고 평했다. 지용의 이미지즘의 시에서 시의 언어와 기술면에서 남긴 업적은 한국 시사에 뚜렷하게 명시되어있다. 한국시에 현대적인 감각과 호흡을 불어넣은 시인이고 또한 대화의 어법을 시에 도입해 자연스러운 리듬을 조성했다. 정지용은 한국현대문학사에서 언어에 대한 자각을 특출하게 드러낸 시인으로 여겨진다.

 

1920년대 다수의 시인들이 감정의 과인 분출의 시를 썼다고 본다면 1930년대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등장한 정지용은 다양한 감각적인 경험을 선명한 이미지로 절제된 언어로 시를 썼다는 평을 받는다. 감정을 서정적이 아닌 감각 화하는 시의 방법은 정지용만의 언어에 대한 자각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절제의 언어 구사가 정지용 시의 특성이다. 서구 시의 수용으로 한국시에 이미지즘을 도입해 한국현대시의 선구자란 평을 받는다.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 시도 돋보인다. 시집<백록담>은 그의 시정신이 도달한 최상의 수준이라고 평한다. 19394월에 발표한 <백록담>은 감각적 심상을 통해서 정신이 도달하는 고요의 공간으로 빚어냈고 표현의 시적 구성이 명징성을 드러냈다. 시인의 정신이 도달한 최상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시의 추종을 넘어서 우리 시의 전통에 근거한 산수시의 세계를 현대어로 직조함으로 한국시의 성숙도를 높였다.

 

<향수>는 대중 가수 이동원과 테너 박인수가 노래로 불러 더욱 유명해진 작품이기도 하다. <향수>가 노래로 된 데에는 일화가 있다. 이동원은 시 <향수>가 너무 마음에 들어 평소에 노래로 부르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최고 작곡가 김희갑 선생을 찾아갔다. 김희갑 선생은 이건 노래로 못 만든다고 이동원을 돌려보냈다. 시가 노랫말로 써진 게 아니라서 운율이 맞지 않아 곡을 붙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동원은 끈질기게 찾아가 간청했고 결국 김희갑이 그럼 해보자고 해 성사되었다고 한다. 김희갑은 희극배우 김희갑이 아니다. 뮤지컬의 <명성황후>의 작사 작곡한 김희갑이다. 또한 테너 박인수는 어느 날 이동원이 불쑥 전화를 걸어와서 <향수>를 같이 부를 수 없느냐고 제안했다 한다. 박인수는 가사가 마음에 들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인수는 대중 가수와 같이 불렀다고 해서 클래식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국립오페라단에서 재명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대중들은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다. <향수>가 노래로 불려 지면서 더욱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정지용은 6,25 동란이 일어나자 피난길에 오르지 못하고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설정식 등 여러 명의 젊은 좌익의 제자들에 의해 정지용은 모시고의적삼 차림으로 끌려 북한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이때 정인택 김기림 박영희도 같이 수감되었다고 한다.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북으로 끌려갔으며 평양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 후 고문을 당하고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한편 북한 시인 박산웅의 말에 의하면 정지용이 북으로 끌려가다 동두천 소요산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하나 그 사실도 단정할 수 없다. 정지용은 스스로 월북한 게 아니었는데, 월북 시인으로 분류되어 해금이 되기까지 가족들은 고통스러웠다. 1988년 정부에서 재검토한 결과 월북이 아니란 것이 확인되어 해금되기 전에는 정지용이란 이름을 쓸 수 없었다. 정지용의 시를 함부로 낭송할 수도 없었다. 그런 고통 속에서 살았던 부인 송재숙 씨는 70세를 일기로 1971415일 별세했다.

 

정지용의 아들 구관(求寬)은 정보부의 감시로 떠돌아다니며 보따리 장사와 비닐공장도 하고 홍성군 광천의 석명광산을 운영하다가 재산을 다 날렸다. 아버지가 해금이 되어 구관 씨는 비로소 아버지의 작품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구관 씨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고 다행히 구관 씨는 북에 있는 동생과 만나게 되었다. 2006년 구관 씨(72)는 평양의 고려호텔에서 북에 사는 동생 구인(68)와 구원(66) 등을 만났다. 그러나 동생들은 아버지의 생사를 전연 모르고 있었다. 같이 산 게 아니고 떨어져 살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구관 씨가 돌아간 지도 오래되었다. 구관 씨의 아들 정운영(鄭運永)(57) . 정지용의 손자는 산악도로용 자전거와 전기자전거를 판매하고 분해 수리 하는 일을 하고 있다. 운영 씨는 “제가 문인의 길을 걸었다면 할아버지의 무게감이 컸을 테지만 문학을 안 하다 보니까 그런 무게감은 없다”고 했다. 88년 해금되기 전까지 정확히 할아버지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고 했다. 학창시절에 할아버지에 대해 알았다면 문학에 관심을 가졌을 텐데 아버지가 할아버지에 대해 일체 말이 없었다고 했다. 해금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창시절에 백일장에 나가서 상도 탔는데 아버지께서 절대로 글을 쓰지 말라고 했다 한다. 차라리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해금이 되기 전에는 이따금 검은색 지프를 탄 사복경찰이 찾아와 괴로웠다고 했다.

 

정지용이 1944년부터 3년 동안 은거했던 경기도 부천시 소사읍 소사 본 289-14번지가 정지용이 살던 집터로 밝혀졌다. 이곳에 정지용이 살았다는 사실은 구자룡이 부천천주교사 자료를 수집하던 중에 밝혀지게 되었다. 정지용은 부천에서 시를 쓰지는 않고 대신에 소사성당 창립에 전염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지용은 천주교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는 기도문 번역에도 참여해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정지용의 열성에 힘입어 현재의 소명여자중고등학교 도서관을 이용한 소사성당 첫 미사가 봉헌되었다. 정지용은 특히 부천지역 교회사와 관련해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부천 복사골문학회는 1993년 정지용 집터에 기념 표석을 세웠고 부천시는 부천중앙공원에 <향수> 시비를 세웠다.

 

정지용은 유치환의 고향인 통영을 여행해 기행문 6편을 남겼다. 미륵산 정상에서 바라본 통영과 바다 풍경을 산문으로 써 남겼다. 다음에 그 일부를 소개한다.

 

“통영과 한산도 일대 풍경의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 더욱이 한산섬을 중심으로 한려수도 일대의 충무공 대소전첩기를 이제 새삼스럽게 내가 기록해야 할만치 문헌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미륵산 산봉에 올라 한려수도 일대를 부감할 때 특별히 통영 포구와 한산도 일폭의 천연미는 다시 있을 수 없는 것이라 단언할 뿐이다. 이것은 만중 운산속의 천고 절미한 호수로 보인다. 차라리 여기에서 흐르는 동서 지류가 한려수도는 커니와 남해 전체의 수역을 이룬 것 같다....(통영5) 중에서.

필자는 3년 전에 단신으로 정지용 문학관이 있는 옥천을 여행했다. 옥천 정지용 문학관은 2005년에 개관했다. 문학관에 들어서면 녹음된 <향수>의 노래가 들려와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건물 앞뜰에 정지용 밀랍인형이 벤치에 앉아 방문객을 맞는다. 문학관에 들어서면 문학전시실, 문학체험 공간, 영상실, 문학 교실 등을 볼 수 있다. 지용의 삶과 문학, 지용문학지도, 시와 산문집, 초간본 전시 코너로 문학전시관이 나온다. 영상실에는 정지용의 문학과 삶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상영한다. 문학관 앞에는 정지용 동상과 물레방아 등 조형물이 있는 작은 공원이 있다. 옥천군은 해마다 <지용제>를 정지용의 생가에서 지낸다. 충청북도가 선정한 최우수 문학축제로 선정되었다.

 

정지용의 생가는 구읍 사거리에서 수북 방향으로 청석교 건너에 위치하고 있다. 청석교 건너편 <향수>을 새겨놓은 시비와 생가 안내판이 있는 곳에 이르면 정지용 생가이며 향수의 시 서두를 장식하는 실개천이 흐른다. 그 모습은 변한지 오래되었지만 흐르는 물은 예전과 같이 맑기만 하다. 생가의 문은 항상 열려있다. 정지용의 아버지가 한의사였으며 한약방을 했으므로 한약방 가구(家具)가 있다. 어쩐지 한약재의 냄새가 풍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러 곳에 지용의 시를 걸어놓았다. 방안에 질화로와 등잔도 있다. 두 개의 사립문, 부엌 옆의 돌절구, 나무절구와 공이도 있다. 뒤란의 장독대, 깨진 항아리 판자로 굴뚝을 만들었는데 굴뚝이 낮아 연기는 마당을 휘돌아나가게 되어있다. 이 생가를 한 바퀴 돌며 나는 정지용의 헛기침 소리라도 들리는 듯 했고 발자국 소리도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취해 보았다. 정지용과 같은 해에 태어난 시인으로 김소월이 있다. 김소월은 북의 시인이며 정지용은 남의 시인. 또한 정지용과 윤동주는 같은 일본 도쿄의 동지사대학을 나왔다. 독실한 기독교 계통의 동지사 대학은 정지용과 윤동주를 기리며 교내에 시비를 세워주었다.

 

2017519일부터 21일까지 옥천서 열린 30<지용제>31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문학축제가 되었다. 정지용의 음력 생일인 515일을 전후해 생가 일원에서 <지용제>는 청년들과 함께 지용 시 창작가요를 개최해 지용제와 지용시를 전국에 알리는데 옥천군이 예산을 아끼지 않고 노력해 왔다. 또한 20037월부터 옥천군에서 정지용 시인을 홍보하기 위해 정지용 사이버문학관이 개관되었다. 사이트로 발전시키기 위해 외국어 서비스를 시작했다. 정지용 시인의 안내 및 작품 안내, 생가와 문학관 등을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3개 국어로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2018 '시인정신' 여름호.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유튜브 박영숙영 영상'시모음' 박영숙영 2020.01.10 99
공지 우리나라 국경일 박영숙영 2015.07.06 341
공지 우리나라에는 1년 중 몇 개의 국경일이 있을까요? 박영숙영 2015.07.06 1612
공지 무궁화/ 단재 신채호 박영숙영 2015.06.16 274
공지 무궁화, 나라꽃의 유래 박영숙영 2015.06.16 708
공지 ★피묻은 肉親(육친)의 옷을 씻으면서★ 박영숙영 2014.10.19 442
공지 [펌]박정희 대통령의 눈물과 박근혜의 눈물 박영숙영 2014.06.14 413
공지 박정희 대통령의 눈물 / 머리카락도 짤라 팔았다 박영숙영 2014.05.28 375
공지 어느 독일인이 쓴 한국인과 일본인 ** 박영숙영 2011.08.02 500
공지 저작권 문제 있음 연락주시면 곧 지우겠습니다. 박영숙영 2014.02.08 211
230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박영숙영 2020.12.19 35
229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펌글 박영숙영 2020.12.19 82
228 공전과 자전 /펌글/박영숙영 박영숙영 2020.12.13 41
227 씨줄과 날줄의 뜻 / 박영숙영 박영숙영 2020.12.13 6574
226 백선엽 장군 친일 역사외곡에 대하여 박영숙영 2020.07.15 26
225 내국망명자와 생활세계적 가능성의 지형/홍용희 박영숙영 2019.06.06 44
224 신작시조 10편에 대하여/ 홍용희 박영숙영 2019.06.06 85
223 조오현의 〈아득한 성자 박영숙영 2019.05.30 193
222 느티골의 여름나기 박영숙영 2019.02.20 60
221 ★ 부부 / 문정희· 박영숙영 2019.02.20 125
220 완성 /나태주 ㅡ 접목接木복효근 박영숙영 2019.02.20 103
219 곡시哭詩 / 문정희 박영숙영 2019.02.13 375
» 향수 / 정 지 용 박영숙영 2019.01.28 114
217 내가 하나의 나뭇잎일 때 / 손해일 박영숙영 2019.01.26 80
216 흐르면서 머물면서/손해일 박영숙영 2019.01.24 76
215 미국 어느 여객기 기장의 글 박영숙영 2016.07.02 118
214 38도선이 생긴 역사 박영숙영 2016.07.02 583
213 ★ "진정한 영웅들" ★ 박영숙영 2016.04.29 58
212 탈북자 김수진/백년이 뒤떨어진 곳에서 백년을 앞선 곳으로 박영숙영 2016.04.15 279
211 길 위에서/이해인 박영숙영 2015.12.12 11479
210 아리랑의 참뜻을 아시나요? 박영숙영 2015.08.02 282
209 행복에 관한 시 모음 박영숙영 2015.07.17 10639
208 6월에 관한 시 모음 박영숙영 2015.07.17 5115
207 현충일 시 모음 박영숙영 2015.07.06 1413
206 부모는.기뻐서 울었고 박영숙영 2015.06.17 216
205 11월에 관한 시모음 박영숙영 2015.06.14 7812
204 11월에 관한 시 모음 박영숙영 2015.06.14 2997
203 창 포 - 신동엽- 박영숙영 2015.06.14 99
202 장미를 생각하며/ - 이해인 박영숙영 2015.06.14 97
201 찔 레 / 문정희- 박영숙영 2015.06.14 115
200 패랭이꽃 -류시화- 박영숙영 2015.06.14 155
199 민들레/ 류시화 박영숙영 2015.06.14 150
198 들풀/ 류시화 박영숙영 2015.06.14 143
197 꽃 씨 / 서정윤 박영숙영 2015.06.14 96
196 꽃샘 바람/이해인 박영숙영 2015.06.14 135
195 꽃 멀미- 이해인 박영숙영 2015.06.14 220
194 사랑...조병화 박영숙영 2015.05.12 215
193 Un Fiume Amaro (쓸쓸한 강) 박영숙영 2015.05.12 225
192 무엇이 한국을 세계 頂上으로 만들었을까 박영숙영 2015.04.19 62
191 [펌]외로움과 고독의 차이 박영숙영 2014.10.27 563
190 마음이 깨끗해 지는 법 박영숙영 2014.10.12 120
189 '가 을' - 드라메어 박영숙영 2014.09.19 99
188 '가 을' / 김현승 박영숙영 2014.09.19 119
187 '가 을' 김용택 박영숙영 2014.09.19 88
186 '가 을' 김광림 박영숙영 2014.09.19 86
185 가을 /강은교 박영숙영 2014.09.19 233
184 완경(完經) - 한선향 박영숙영 2014.08.14 201
183 폐경 / 최삼용 박영숙영 2014.08.14 238
182 내력 / 김선우 박영숙영 2014.08.14 178
181 완경(完經)/ 김선우 박영숙영 2014.08.14 153
180 우물에 관한 시 모음> 윤동주의 '자화상' 외 박영숙영 2014.08.03 1668
179 이제 누가 헝클어진 머리 빗겨 주나 박영숙영 2014.07.31 167
178 늑대/도종환 박영숙영 2014.07.16 161
177 죽음 뒤를 볼 수 없다 해도 / 죽음에 대한 ㅡ'시'와 명언 박영숙영 2014.07.02 1010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27
어제:
53
전체:
883,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