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국망명자와 생활세계적 가능성의 지형

홍용희
                                       
                
    1. ‘새로움’과 ‘오래된 새로움’

신진 시인들의 첫 시집들이 비 온 뒤의 대나무 순처럼 일군의 무성한 숲을 일구고 있다. 시단의 중심부에 새로운 세대 군이 성큼 진입해 들어온 것이다. 2005년을 분기점으로 신진시인들의 등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직접적인 배경은 <천년의시작>, <렌덤하우스중앙> 등의 출판사들이 기성 시인들의 명망에 의존하는 관행보다, 새로운 세대의 목소리를 제도권으로 수용하기 위한 출판 기획을, 과감하게 추진한 데에서 찾아진다.


 그러나 이보다 더 원천적인 배경은 이천년 대에 진입한 지 5년여가 지났으나, 1990년대 시단과 변별되는 뚜렷한 새로운 변모의 단층을 보여주지 못하던 상황에서, 내부에 적재되어 있었던 이천 년대의 새얼굴의 시인과 시적 감각이 표층을 뚫고 돌연히 출현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렇게 보면, 그동안 우리 시사가 비교적 10년 단위로 뚜렷한 전환의 마디절을 보여주었던 것에 비춰볼 때, 2005년에 이르러서야 신진 세대의 새로운 목소리가 전면에 표출된 것은 시차적으로 지체된 감이 없지 않다.


 이것은 1990년대와 2000년대 간에 사회역사적인 층위에서의 변화의 단층이 뚜렷하지 않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이를테면, 1980년대 말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의 와해로 상징되는 탈냉전 시대의 개막과 전 지구적 시장화라는 지각변동이 일어나면서, 시사에 있어서도 리얼리즘의 현격한 퇴조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 및 생태주의 시편이 주류로 나타나는 변화가 있었지만, 1990년대와 2000년대는 이에 상응하는 시대사적 전환의 단층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우리 시단의 이른바 기득권층이 과거 어느 때보다 두텁고 견고해서 신진들의 출현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환경이라는 점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안팎의 여건 속에서 다소 지체된 감은 있으나 근자에 들어 그 어느 때보다 첫 시집의 발간과 더불어 제각기 개성적인 목소리로 출사표를 던지고 있는 시인들이 활발하게 대두되고 있다.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이민하, 『환상수족』, 이승원, 『어둠과 설탕』, 김이듬, 『별 모양의 얼룩』, 김언, 『거인』, 신해욱, 『간결한 배치』, 고영,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박진성, 『목숨』, 이세기, 『먹염바다』, 박후기, 『나는 종이의 유전자를 알고 있다』, 이재훈,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윤성학, 『당랑권 전성시대』, 김근, 『뱀소년의 외출』, 조동범, 『심야 베스킨라빈스 살인사건』, 박판식, 『밤의 피치카토』, 진수미, 『달의 코르크 마개가 열릴 때까지』, 안현미, 『곰곰』, 이영주, 『108번째 사내』 등 신진 시인들의 첫 시집만도 실로 많이 간행되었다.



이들 시집들을 편의상 유형화하면, ‘새로움’과 낯익은 ‘오래된 새로움’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유형화는 우리 시단에 제 3 인류형의 탄생으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낯선 문법과 감각의 ‘새로움’이 등장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시적 전통의 계승에 해당하는 ‘오래된 새로움’의 지칭은 ‘새로움’에 대한 대타적 관계 속에서 성립된다.  



  어느 시대에나 그래왔듯이 새롭게 등장한 세대는 기왕의 시단에 우려와 호기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며 순식간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근자에도 역시 새롭게 등장한 젊은 세대군에 대한 평자들의 논의가 활발하게 개진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논점은 주로 신진들 중에서도 불연속적이고 이색적인 ‘새로움’의 진영에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불연속적인 ‘새로움’과 더불어 ‘오래된 새로움’ 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신진 시인들 전반의 이해를 위한 균형감각의 필요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새로움’이 더욱 시대사적 진정성과 미래적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인식에 바탕 한다.
  특히, 1990년대 이래 지속된 가치의 다원화와 해체적 상상력이 한편으로, 지나치게 개별적 단절과 파편화를 가속화시킴으로써, 고립, 소외, 혼돈, 불안을 야기시켰음을 주목할 때, 이천 년대의 시대정신은 이를 초극할 수 있는 창조적 보편을 요구한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찾아내고 의미화 하는 작업이 이천 년대 시 창작이 견지해야 할 과제라고 할 것이다. 오늘날 발표되는 신진 시인들의 창작활동은 이러한 시대사적 소명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그러나 ‘새로움’의 시편은 숨은 차원의 새로운 질서가 전면에 표출되고 있음을 선언적으로 충격하고 있으나, 이를 구체적으로 의미화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문화주의적으로 추상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 시편의 시인들은 스스로 소통불능의 자기 방어적 성채 속에 들어가서, 자폐적인 언술을 일방적으로 전개하는 일종의 내국망명자의 길을 가고 있다.


이것은 현실세계에 대한  반영일수는 있으나 대안일수는 없다. 오히려 시대적 전환의 전복과 변혁의 에너지를 생산적으로 규명하기 보다는 일과성으로 소모시키기 쉽기 때문이다.  
한편, ‘오래된 새로움’은 구체적인 생활세계에서의 실천적 삶을 통해 이에 적응하고 부정하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체험적 삶에서 터득되는 생활 세계적 이성(하버마스)은 현실에 대한 ‘부정성의 계기’가 되는 미래지향적 예지로 작용한다.


생활세계속의 실천적 삶은 현실상황에 규정받으면서 동시에 이를 주체적으로 구조화하는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오래된 새로움’이 구체적인 시대정신의 발견과 미래적 가능성을 제시하는 역할을 감당하기에 용이하다고 파악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점을 염두해 두고 ‘새로움’의 시편에 대한 성찰적 개관과 함께 ‘오래된 새로움’의 시편의 성격, 의미, 미래적 가능성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새로움’ 혹은 내국망명자들

2000년대 중반이 기존의 질서와 새로운 질서의 ‘두 날’이 팽팽한 긴장관계를 이룬 민감한 임계상태라는 점을 집약적으로 선명하게 표출시킨 시편들은 단절적인 ‘새로움’의 진영이다. 이들의 시편들은 제3 인류형이라고 지칭할 수밖에 없는 소통 불능의 화법과 분방한 상상력으로 넘쳐흐른다. 낮선 문법을 통해 환상, 엽기, 섹스 등의 상상력을 가학적으로 탐닉하는 이들 시편은 현실 사회가 극심한 소외와 사물화에 시달리고 있음을 절규처럼 드러내 주고 있다. 마치 혼돈스런 현대사회에 대응하는 시적 화법으로는 비선형적인 혼돈 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들 시인들의 시편에 대해 시집 전반을 헤짚으면서 상징과 이미지의 기호론적 분석을 시도한다면 나름대로의 의미체계를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은 중요하지 않다. 이들 시편들은 상징적인 메시지의 전달 보다 시적 형식론 그 자체의 강렬한 자기 투척을 통해 불협화음의 실재를 환기시키고자하는 전략이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다음의 시편을 읽어보기로 하자.

  지하에 계신 淫父와 淫母 가 침봉으로 내 얼굴에 난 털
을 벗긴다 나는야 털북숭이 라푼젤, 짜다 푼 목도리의 털
실같이 꼬불꼬불한 털을 발끝까지 내려뜨린 채 울고 있다
울음을 짜보지만 눈물은 흐르자마자 냄새나게 덩어리지는
冷 일 뿐, 에이 더러운 년 킁킁거리며 내 얼굴을 냄새 맡던
淫父가 빨간 포대기처럼 늘어진 혀로 내 털 한 가닥 한 가닥
을 싸매 핦는다 조스바를 빨던 입처럼 淫父의 혀끝에서
검은 색소가 뚝뚝 떨어진다. 이제부터 이게 네 머리칼
이야. 알았어? 淫母가 스트레이트용 파마약을 이제부터 내 머리칼인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부분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밤은 모두 슬프다
광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모두 서른두 개
나는 나의 아름다운 두 귀를 어디에 두었나
유리병 속에 갇힌 말벌의 리듬으로 입맞추던 시간들을.
오른손이 왼쪽 겨드랑이를 긁는다 애정도 없이
계단 속에 갇힌 시체는 모두 서른두 구
나는 나의 뾰족한 두 눈을 어디에 두었나
호수를 들어올리던 뿔의 날들이여.
새엄마가 죽어서 오늘은 모두 슬프다
밤의 늙은 여왕은 부드러움을 잃고
호위하던 별들의 목이 떨어진다
                                                 -황병승, 「검은바지의 밤」 부분

  시적 상상력이 매우 생경하고 도발적이다. 행과 연 구분의 절도와 간격은 물론이거니와 의미의 일관성과 상관성이 무화되고 있다. 첫 행에서부터 시제와 인과적 관계가 무화된 비문임은 물론이고, 엽기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들이 서로 뒤엉킨 채 자기 재생산을 지속하고 있다. 시의 길이는 여기에서 그칠 수도 있지만 무한대로 늘여도 무방하다. 어차피 청자를 배려하지 않은 자폐적 발화인 탓에 시상의 형식과 전개 역시 화자의 자의적인 의지에 따라 결정하면 그만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시편들이 무의미한 잡답이나 잡음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시상의 기반을 이루는 엽기와 환상성은 그 자체로 우리 시의 새로운 범주를 개척하고 돌파하는 충동적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위의 인용시의 시인 이외에도 이민하, 이승원, 진수미, 신해욱, 이영주 등의 시 세계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유사한 경향을 읽을 수 있다.  



  엽기란 기본적으로 공포스럽지만 매혹적이라는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잔혹성이 쾌감을 부채질하고 쾌감은 다시 잔혹성의 공포를 상기시킨다. 공포스러움은 불온하고 발칙하고 어처구니없는 도발과 전복에서 비롯된다. 한편, 매혹적인 쾌감은 공적인 장소에서는 결코 발설되거나 공개될 수 없었던 지점들이 공개될 때, 지배질서의 남용과정의 전모가 누설되고 전복되는 데에서 생성한다.



엽기의 유행과 관련하여 우리시대 자체가 엽기적이기 때문이라는 식의 반영론적 지적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충실한 것도 아니다. 이런 식의 반영론은 문제를 드러내기 보다는 오히려 덮어버린다. 엽기적 상상력에 대해 우리가 고민하고 찾아야 할 핵심 문제는 현대사회에 대한 도저한 성찰, 전복의 에너지를 감지하고 이를 생산적으로 의미화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자에 발표되는 신진 시인들의 시편에 창궐하고 있는 엽기는 세계와의 불협화음 자체에 그치는, 현실 반영론의 차원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은 엽기가 유행하는 불온한 사회에 내장된 발칙한 공격과 저항의 에너지를 봉인하거나 일회적으로 소모시켜 버리기 쉽다.
한편, 환상은 현실과 완전히 차원이 다른 시공간을 향한다. 환상은 일상의 시공간을 혁명적 파괴력을 통해 모험의 시공간으로 대체시키고 있는 것이다. 환상의 가장 표준적인 해석은 배제당하거나 소실된 것들을 호출하는 하나의 중요한 방식이다.


캐서린 흄이 “나는 환상을 사실적이고 정상적인 것들이 갖는 제약에 대한 의도적인 일탈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할 때, 환상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체계에 의해 억압된 신화적이고 자연적인 세계를 가리킨다. 보이는 세계의 재현으로서의 미메시스와 그러한 “사실적이고 정상적인”세계가 포괄할 수 없는 빈자리, 즉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심연이 환상 속에서 재생될 수 있다. 따라서 환상성은 현대 세계의 일상성에 대한 위반과 전복을 통해 미분성의 몽환적이고 신화적인 상상력의 영토를 개척하고 수용할 때 그 본래의 소임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시편에서 환상성은 권태로운 일상에 대한 조소와 일탈의 차원에 머무는 경향을 보인다. 치명적인 비약의 상상이 엽기적 상상력의 보조적 수단으로만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엽기와 환상성이 시적 대화의 상상력을 돌파해내지 못하고 오히려 비유와 상징의 빽빽한 그물망으로 구성된 성채를 높이 쌓는 결과를 낳고 있다. 그리고 그 닫힌 성채 안에서 시인들은 스스로 불안한 매혹의 내국망명자로서의 삶을 구가하고 있는 형국이다. 망명자의 속출은 사회 현실의 불온성을 극명하게 선언하는 충격을 던져줄 수는 있지만, 그러나 혁신과 변화의 출구를 직접 마련하는 데에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내국망명정부의 성채를 허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먼저, 앞에서 제기한 엽기와 환상성이 지닌 부정과 혁신의 창조성을 생산적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환상성은 ‘치명적 비약’의 상상을 통해 일상 속에서 우리 자신의 기원의 시간과 소통함으로써 우리들 스스로도 망각하고 있었던 우리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는 동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엽기 역시 이점은 마찬가지이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추사 김정희가 자신의 문체를 향한 괴기성(怪奇性)이라는 비난 앞에서 ‘괴(怪)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 숭고하고 심오한 지혜의 세계, 지극한 예술의 땅을 밟을 것인가’라고 응답했던 것처럼, 숭고를 향한 추의 미학의 심연으로 매진해나가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시적 형식 미학에서 시적 언술과 이미지의 과잉에 대한 성찰을 통해 절제와 생략의 여백을 추구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 본 바대로, 이들 시편에는 대체로 온통 환유, 제유, 상징 등의 이미지가  범벅을 이루고 있다.  시적 양식이 전통적으로 견지하는 압축과 생략의 미의식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시적 장르의 ‘말하지 않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명제는 여기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말의 절제와 비움이 아니라 말들의 성찬을  즐기고 있다. 시적 화자의 언술만이 시상의 비선형적인 혼돈의 흐름을 타고 일방적으로 발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의 창조적 상상력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차라리 그 비어 있음을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하다.’(多言數窮 不如守中)는 고전(노자 『도덕경』)의 가르침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여기에서 비어 있음을 가리키는 중(中)은 도(道)에 다름 아니다. 말의 풍요는 오히려 그 풍요로움으로 인해 길(道)을 잃게 되고 도(道)의 소통을 막게 된다.)



  실제로 시적 양식은 나르시즘의 성채가 아니라 이타적으로 열린 창조적 대화의 장이다. 주지하듯, 옥타비오 파스는 시 창작에서 ‘타자의 의지의 침투’를 강조한다. 시를 쓰는 행위는 상반되는 힘들의 얽힘, 즉 나의 목소리와 타자의 목소리가 합쳐져 하나가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도 이러한 점을 읽을 수 있다. 그가 시적 창조를 자연의 모방이라고 할 때, 자연은 혼으로 가득한 것, 살아있는 유기체에 해당하는 물활론적 대상이다. 따라서 그의 논지에서 시는 ‘시 자체가 자신의 주인이며 혼이 깃 들인 자연과 시인의 영혼이 만나서 얻어지는 열매이다.’



  이렇게 보면, 시에서 비움과 절제의 여백은 초월적인 ‘타자의 의지가 습합’되는 소통의 공간이다. 시의 형식미학에서 말의 ‘자발적 가난’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발적 가난’의 시적 형식은 타자의 목소리의 동참과 소통을 향한, 시의 우주적 형식화로 정리된다. 여기에 이르면, 시 창작의 주체란 나르시즘적 자아가 아니라 공동체적 자아라고 말해 볼 수 있다. 한편의 시가 집단적, 민족적 차원의 예언적 지성으로 떠오르기도 하는 것은 이러한 문면에서 이해된다. 이렇게 보면, 내국망명자들의 본국 환수의 전략은 형식미학의 자기 갱신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것이다.    

3. ‘오래된 새로움’ 혹은 생활세계적 가능성

  물론, 오늘날 신진시인들로부터 내국망명자들의 이방인적인 발성만이 들리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도 이색적인 탓에 도드라지게 느껴질 따름이다. 사실은 생활세계에서의 고생살이에 시달리면서 이로부터 살림살이의 방향을 찾아서 가로질러 나가는 ‘오래된 새로움’의 시 편이 더욱 활발하게 발표되고 있다.


  ‘오래된 새로움’의 시편은 이를테면, 메를리-퐁티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의식과 신체가 하나로 통일된 ‘살아있는 신체’로서의 인간 실존을, 시적 주체로 설정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살아있는 신체’는  세계 속에 결박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세계를 재구성해 낸다. 다시 말해, 인간 존재는 자신의 상황에 규정 받으면서 동시에 스스로 자신의 상황을 구조화해 나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체험적 삶을 통해 절망과 상처의 길을 걸으면서, 동시에 스스로 이를 초극하고자 하는 ‘오래된 새로움’의 시편에서,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을 감지하는 것이 더욱 용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래된 새로움’의 시편에서 우리는 절망과 상처의 생활세계에 직접 부대끼면서 그 신생의 출구를 향한 탄력적인 움직임을 읽어내는 것이 요구된다.



여기에서는 우선 윤성학, 박후기, 박진성, 이세기의 시 세계를 중심으로 생활 세계적 가능성에 대한 체험적 현장의 언어를 만나 보기로 하자. 이들의 시적 출발은 생의 허기와 결핍이다. 그 주된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물적 풍요와 문명의 이기를 자랑하는 오늘날에도 치명적인 결핍, 가난, 소외, 질병의 그림자가 우리 주변을 침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여기에서 더 나아가 지배 권력의 자동 조절 메카니즘이 고도로 발전한 오늘날에는 적당한 결핍과 고통의 강요가 조장되고 관리되기도 한다.  


적당한 “허기”의 강요가 현대사회의 지배질서에 충실한 구성원을 생성해내는 효율적인 지배전략이기 때문이다. 윤성학의 시집 『당랑권 전성시대』의 첫 번째에 수록된 다음 시편은 이러한 점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매받이는 사냥을 나가기 한 달 전부터
가죽 장갑을 낀 손에 나를 앉히고
낯을 익혔다
조금씩 먹이를 줄였고
사냥의 전야
나는 주려, 눈이 사납다
그는 안다
적당히 배가 고파야 꿩을 잡는다
배가 부르면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꿩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의,
날아 도망갈 수 없을 만큼의 힘
매받이는 안다
결국 돌아와야 하는 나의 운명과
돌아서지 못하게 하는 야성이 만나는
바로 그곳에서
꿩이 튀어 오른다
                                                             -윤성학, 「매」 전문

적당한 “허기”는 문명과 야성의 가파른 긴장관계를 지탱시키는 지점이다. 이때, 사냥꾼의 기질이 가장 민감하게 발휘된다. “꿩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의” 그러나 절대 “날아 도망갈 수 없을 만큼의 힘” 만이 주어지는 지점이다. 그래서 “매받이”는 나에게 “적당히 배가 고”픈 허기를 지속적으로 강요하고 관리한다. 이러한 상황을 다른 시각에서 정리하면, 나는 강요되고 관리되는 문명과 야성, 안주와 고통의 접점을 이탈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는 “꿩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의” “먹이”마저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적당한 “허기”마저도 고마운 은총이다. 이 허구적 은총의 수혜를 계속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윤성학은 “당랑권”의 권법을 내보인다. “이곳에는 사람 수만큼의 권법이 있”지만,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고/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당랑권이다”(「당랑권 전성시대」) 이와 같이, 당랑권의 처세술을 익혀야 낙오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바로 현대사회가 획일화와 자기 정체성의 상실을 강요하는 사회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래서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것보다/누군가 내가 나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더 참에 가까운 명제였다니/그러므로 나는 말하지 못한다/이 구두의 주름이 왜 나인지/말하지 못한다”(「구두를 위한 삼단논법」)는 상황은 예고된 것이다. 이처럼, 심각한 자기 정체성의 상실은 자연스럽게 자기 정체성 회복을 위한 갈망을 증폭시킨다. 마치 몸에서 수분이 빠져나가면 물을 찾게 되는 몸의 반응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윤성학이 “다산이 나고 죽은 여유당 햇빛 속에서/하루를 보내며/촘촘한 그 이의 정신을 읽고 오는 길”에 “철길을 바라보며 그때 알았습니다/물이 그러하듯 쇠가 또 그러하듯/어딘가를 향하는 동안에만/강물이고 철길인 것이었습니다” 라는 전언 역시 자연스럽게 들린다.


윤성학은 첫 시집에서 생활세계의 실천적 삶을 통해 “당랑권 전성시대” 로부터 “다산이 나고 죽은 여유당”을 찾아 “그때 알았습니다”라고 탄성하는 넓은 음역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한편, 박후기의 시집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역시 기본적으로 “생의 허기”에서 출발하고 생성되는 특성을 보인다. 다음 시편은 허기진 사람들의 허름한 모습에 대한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묘파이다.
 
  장대비 맞고 차양이 내려앚은 국밥집
  바지춤을 추켜올리듯 바람은
  흘러내린 천막의 갈피를 움켜지었다, 놓아버린다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도
바지를 흘러내리게 하는 생의 허기
고개 숙인 채 밥집의 허름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배고픈 사람의 뒷모습이 식은 국밥의 기름기처럼
흐린 내 시선에 엉겨붙는다
   (중 략)
사슴 박제처럼
벽에 목만 내걸린 선풍기가
두 평 남짓한 밥집에 철철 바람을 쏟아붓는다
바람은 라디오 속에도 들어 있어
무뚝뚝한 얼굴에 나뭇잎처럼 달라붙은
인부들의 귀를 간질인다

광야는 넓어요 하늘은 또 푸르러요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행복의 나라로」 부분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도/바지를 흘러내리게 하는 생의 허기”를 달래며 “허름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배고픈 사람의 뒷모습이” 넓고 푸른 “행복의 나라”로 가는 정서적 틈새를 마련하고 있다. “두 평 남짓한 밥집”에 내걸린 선풍기의 바람이 라디오의 “행복의 나라”라는 노래를 전파시키는 촉매로 작용하고 있다.


이처럼, 가난과 절망 속에서 풍요와 희망을 향한 추구는 너무도 식상한 계몽적 서사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또한 지속적인 생활세계의 실상이다. 비록 낮고 느리고 가난하다고 할지라도 생활세계 속에서 스스로 부대끼는 삶이 자신을 초극의 길로 인도하는 방법론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뱃속에”서부터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열 개/발가락이 열 개 그리고/바위의 안부를 묻는 빗방울처럼/쉬지 않고 내세를 두드리는/희망이라는 유전자”(「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밥집의 허름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일상은 스스로를 “희망”으로 구원하는 과정과 연관된다.  
   박후기의 시 세계가 대부분 “산란(産卵)의 공장지대”처럼 결핍과 고통의 풍경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그러나 차갑거나 건조하지 않고 그 내부에서부터 자루 속의 감자들이 싹을 틔우듯(“울타리 아래 버려진 자루 속에서/썩은 감자들은 싹을 틔웠고”(「뒤란의 봄」), 따뜻한 희망의 정조가 번져 나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편, 박진성의 시 세계는 질병의 구심력과 원심력의 상상력을 절박한 체험적 언어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질병의 구심력적 상상력이란 공황발작, 불안, 자살충동, 상습불면 등을 앓는 자신의 증세에 대한 핍진한 묘사이고, 원심력적 상상력이란 타인의 아픔과 “애옥한 삶”(「슬픈 바코드」)에 대한 연민의 정감을 가리킨다. 몸속에 침투한 질병은 역설적으로 온몸의 신경 조직과 감각기관을 날카롭게 깨운다. 그래서 질병을 앓을 때, 날씨와 기온의 변화, 바람소리, 지각의 움직임 등을 섬세하게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박진성의 시 세계가 누구보다  절박하면서도 예민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질병의 신경 조직이 시의 촉수를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병동 복도를 걷는다 밤이면 적나라해지는 고통들……
형광불빛 쏟아지면 신경은 휘어진 척추처럼 길에 달라 붙
는다(오늘 검사에서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창문 열면
후려치는 바람, 바람이 부는 것이다 십일 층에서부터 내가
밟고 내려온 건 울분이 아니다 긴 낭하에서 술렁이는 고요의
낱알들은 중력으로 비틀거린다 고요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현기증
어지러운 공기를 가득채운 내 몸은 몇 개 불빛을 집어 삼킬
것이다(내려가고 싶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새벽이면 철제문이
열리겠지 어두운 낭하로 집요하게 파고드는 불빛, 출구가 없는데
바람아, 물체의 몸에서 튕겨나온 빛의 알갱이들아, 아프러 오는가
                                                                    -「봄밤」 부분

“적나라해지는 고통”에 시달리는 시적 주체의 정서와 몸의 감각이 그려지고 있다. 바람이 “후려치”는 각도는 물론이고, 고요와 빛들이 각각 “낱알”과 “알갱이”의 형상으로까지 보이고 느껴진다. 질병의 깊은 고통이 온몸의 감각을 푸른 칼날처럼 날카롭게 살려 놓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질병은 또한 “살고 싶은” 생의 의지에 “목숨을 걸(「목숨을 걸다」)게 한다. 목숨과 건강의 소중함 역시 질병의 상상력이 더욱 깊이 환기시킨다. 몸을 훼손하는 질병이 역설적으로 몸의 가능성을 깨우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박진성의 몸의 고통은 스스로를 외부세계를 향해 원심력적으로 열어 놓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그가 “낮은 카바이드 불빛 아래 쭈그려 앉은 여자, 느린 자전거 한 대만 쓰러져도 모두가 다칠 것 같은 밤의 시장길 모퉁이에 이마 주름살 따라 흔들리고 있는 여자”(「슬픈 바코드」) 의 슬픔을 내밀하게 감지하고 느끼는 것은 질병으로 인해 가장 민감해진 몸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는 시집 『목숨』에서 “목숨”을 거는 질병과의 처연한 싸움을 통해, 한편으로, “산다는 일이 숨결 곳곳에 구멍을 내어 설움도 가난도/비루함도 숨쉬게 해줘야 하는”(「목숨-금강에서」)것이라는 “목숨”의 이치를 성찰적으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세기는 우리 시사에서는 매우 낯설게 바다의 교향시가 아니라 ‘바다의 산문’을 읽어주고 있다(최원식). 바닷가의 질척한 삶의 내력과 흔적이 평명한 언어를 통해 기록되고 있다.
 
   늘그막 함석집에 누군가 걸어온다
   
   막배도 끊기어 올 이도 없는데
   저녁밥상이 차려지고
   흰쌀밥에

  컴컴한 밤이 내어온다

  오리와 고양이와 흰둥이 강아지가 있는 빈 마당이
  쓸쓸하니 텅 비어

  이런 날이면 지리산 갈가그메 게발 물어 던진디끼
나 혼자 떨어졌다며 울었다는 할아배와
   이작도 굴업도 섬그늘을 떠돌다
   불귀의 몸이 되었다는 대고모와 뺑덕어멈을 닮았다
는 할머니가 절로 생각나는

   환한 저녁이 온다
                                                              -「애저녁」 전문
                            
어촌의 “늘그막 함석집”이 맞이하는 저녁 풍경이 종요롭게 그려지고 있다. “올 이도 없”고, “쓸쓸하니 텅 비어”있는 “빈 마당” 이 있을 뿐이지만, 시적 화자에게 그곳은 이미 이승을 떠난 “할아베”, “할머니”, “대고모”의 삶의 내력들로 홍성스럽다.  “늘그막 함석집”은 어느새 이들의 삶의 설화로 술렁인다. 어촌마을의 저녁은 이와 같이 죽어 사라졌어도 잊혀지지 않는 삶의 곡절과 사연들로 언제나 수런거린다. 굳이 “조깃배를 타던 쌍둥이 아들이/월경을 하였다는/소문”(「당너머집」)과 같은 어둠의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섬마을은 제각기의 삶의 곡절들이 도처에 소금처럼 서려있다.


 이를테면, “바다의 잔주름”을 닮은 “옷장수 이수본 씨”(「이수본 씨」), “내 애비의 이 가는 소리와 코곪과 술주정을/보고 돌아왔던 바다”(「백령도에서」), “여인숙 할아배가/화투장을 두드”리는 “옹진여인숙”(「옹진여인숙」) 등이 섬마을의 풍속의 역사를 증거한다. “여기까지 온 길이 생간처럼 뜨"(「먹염바다」)거웠음을 생생한 표정으로 보여주는 섬마을은 또한 그 속에서 “상수리 숲 위 만월”(「애비」)을 퍼올리기도 한다. 어두운 한과 그늘이 “환한 저녁”의 빛을 반사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의 “밤바다”가 “슬프”면서도 “아름다운”(「밤물 때」)까닭이 여기에 있다. 어둠 속에서 어둠이 정화되어 약하고 미미하지만 밝은 기운으로 퍼지고 있는 현상이다.  



물론,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생의 그늘이란 위에서 든, 윤성학, 박후기, 박진성, 이세기의 경우처럼 허기, 질병, 고난 등의 항목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보다 거대 인공도시 속에서의 막막한 단절과 소외의식이 더욱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그 숲엔 풍경이 없다
나무와 새 온갖 풀벌레가 가득하지만
그들은 소리내지 않는다
사방을 둘러봐도 제자리만 지키고 선
가장 그럴듯한 포즈의 마네킹들
그곳엔 소리가 없다
                                                  -이재훈,「빌딩 나무 숲」 부분

이와 같이 몰인격화, 익명화된 도회지적 삶의 일상에 대한 회의는 조동범, 고영, 박판식, 안현미 등의 시편에서도 빈번하게 변주되어 반사된다. 그러나 이들 시편 역시 앞에서 살펴 본 이른바, ‘내국망명자들’의 경우와 달리, 소통 가능한 전통적인 시적 문법을 통해 대화적 상상력의 장을 열어놓는다. 외부 세계와의 불협화음에 대해 자폐적 공간으로의 퇴행이 아니라 외부 세계에 대한 열린 교감의 장을 견지한다. 또한, 이와 동시에 현실 초극의 자기고투의 과정을 지속적으로 추구한다. 이를테면, 실어증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해, “벙어리의 옹아리”(이재훈, 「마리의 오아시스」)나마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메를리-퐁티가  지적했듯이  인간 실존은 현실 세계에 대해 부정성의 계기(완전한 자유에의 계기)만을 갖는 것도 현실을 완전히 수긍하는 계기(결정론적인 계기)만을 갖는 것도 아니다.  구체적인 인간 존재는 외부 상황과 상호 교환적인 작용을 하는 가운데 상황에 의존해 있으면서 항상 미래로 열려있는 성향을 지닌다.  아직 높은 성과를 이루어내지는 못했지만 ‘오래된 새로움’의 시편의 미래적 가능성을 특히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4. 맺음말 : 창조적 보편의 질서를 위한 단상

이천 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신진 시인들의 목소리가 비약적으로 쏟아져 나왔다는 것은 우리사회에 적재된 숨은 차원의 새로운 질서가 표출되고 있음을 가리키는 징후이다. 따라서  어느 시 편이 이러한 징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게 대두된다. 신진 시인들의 시집을 살펴보면, 크게 ‘새로움’과 ‘오래된 새로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의 기준은 물론 매우 이색적인 ‘새로움’의 시편이 출몰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엽기와 환상, 비유와 상징의 이미지가 뒤얽힌 ‘새로움’의 시적 유형은 사회적 질서가 전환의 극점에 도달했음을 충격적으로 선언하고 있으나, 그러한 사실을 추상적으로 일반화시키는 데 그치고 있다. 시인들 스스로 소통불능의 자폐적 성채로 들어가는, 일종의 내국망명자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현실세계에 대한 반영의 한 형식일 수는 있으나 대안일 수는 없다. 오히려 사회 현실의 전복과 변혁의 생산적 에너지를 덮어버리거나 일과적으로 소모시켜버릴 가능성이 있다.



한편, ‘오래된 새로움’의 시편들은 구체적인 생활세계로부터의 체험적 삶을 통해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스스로 존재의 결정과 선택을 열어나가는 가능성을 지닌다. 그래서 ‘오래된 새로움’이 아직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미래적 가능성을 감당할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하기에 용이하다. 특히, 좀더 자각적인 형식미학에 대한 인식이 요구되기도 하지만, 전통적인 형식미의 계승은 ‘타자의 목소리’와 교감하고 공명할 수 있는 열린 소통의 형식과 가깝다는 측면에서 더욱 고무적이다. 물론, 21세기의 미래지향적인 시대정신의 감지가 신진시인들의 몫만은 아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시인군에 한정해서 논의를 전개시키고 있을 따름이며, 그것이 또한 다가오는 새로운 질서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기대도 한 몫을 했다.


  분명, 1990년대 이래 우리 사회는 가치의 다원성과 해체를 해방과 가치의 민주주의라는 미덕으로 추구해왔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과 외부세계의 연속성을 와해하고 단절시켜 개별적 파편화와 소외감의 심화를 몰고 온 것도 사실이다. 이제는 다채로움의 무질서로부터의 질서, 즉 창조적 보편의 양식이 요구된다고 파악된다. 물론, 이때의 창조적 보편은 무질서의 엔트로피를 스스로 수용하면서 나오는 질서일 것이다. 열역학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프리고진은 물질과 에너지의 출입이 가능한 열린계가 평형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미시적 요동의 결과로 무질서하게 흐트러져 있는 주위에서 에너지를 흡수하여 엔트로피를 오히려 감소(무산,霧散)시키면서, 거시적으로 안정한 새로운 구조가 출현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무산 구조 혹은 자생적 조직화로서의,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를 오늘날의 우리 시단에서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창조적 보편의 실체에 대한 논의는 오늘날의 사회, 정치,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와 함께 진척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생활세계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오래된 새로움’의 시편이 내국망명자의 속성을 지닌 ‘새로움’의 시편보다 창조적 보편의 질서를 담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크다는 점에 대해 거듭 강조하고자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국망명주의에 상응하는 ‘새로움’의 시편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평형으로 나아가기 위한 비평형 현상은 그 자체로 과도기적인 동역학으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출처: https://ipoet.tistory.com/105 [명왕성의 부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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