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에 관한 시 모음> 윤동주의 '자화상' 외

2014.08.03 10:46

박영숙영 조회 수:1668 추천:23


우물에 관한 시 모음> 윤동주의 '자화상' 외

+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리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시인, 1917-1945)


+ 우물

섣불리 넘치거나
줄지 않는 마음이야
날마다 길어내어도
늘 그만치 고이지만
새벽에 까치 우는 날은
떠오르고 싶어진다.
(강세화·시인, 1951-)


+ 깊은 산골 우물 속
  
깊은 산골 우물 속에 두런두런
천일기도하고 있는 청개구리 한 놈
하늘 나라 은하수 은두레박이
깊은 밤 우물까지 물 길러 오네
(임보·시인, 1940-)
  

+ 우물

대나무 숲 속에
맑은 샘물 있었네

댓잎에 잔물결 일면
그대로 전율하던 수면

허공 맴돌던 댓잎
세상 등지고 떨어져

청정한 샘물에 이르러
소용돌이가 되어 헐떡인다.
(손정모·시인이며 소설가, 1955-)


+ 빈 우물

물맛 좋기로 소문난
동네 우물

따뜻한 인심처럼 솟던 샘물
까르르 웃던 고운 처녀들
수줍게 인사하던 새댁 모습
가고 없네

동네 소문 나누고
갈증 풀며
거꾸로 박힌 자신  
두레박질했던
그곳

세월에 밀려난
빈 우물 안에
내 기억만큼 낙엽만 쌓였으니
추억만 가득 퍼올리네.
(이춘우·사진작가 시인, 경북 영덕 출생)


+ 우물

마당 한복판에
우물을 팠습니다
그대가
목마를 때 살며시 와
목 축이고 가라는 배려였습니다

어느 날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그대 모습이
생생하게
박혀 있었습니다
(반기룡·시인)


+ 사랑의 우물

당신과 나 사이
앙금을 내는 아픔으로
마르지 않기 위해
나는 스스로
사랑의 우물을 판다

심층 천길 깊이에서
생수처럼 솟아나는
투명한 사랑

우리가 진정 살아가며
목말라 하는 것은
생수가 아니라
사랑이어라
(박덕중·시인, 전남 무안 출생)


+ 우물을 보는 소

동네 우물을
소가 들여다본다.

우물 속에는 상수리 나뭇잎 피고
새가 날고
하얀 구름이 흐른다.

물 속의 소는 유난히 귀가 크다.

우두커니 올려다보는 얼굴
흔들리는 굴레
먼 옛날 어느 족장의 훙예 같다.

종처럼 일하다가
거지처럼 떠돌다
늙어서 바리때 하나 짊어지고
떠나왔다.

우물에 나비 미끄러지고
민들레 피어
그의 얼굴을 만진다.
꽃관을 썼다.
(이성선·시인, 1941-2001)


+ 우물터에서
  
그 동안 당신이 많이도 잊어먹은 것은
구름을 바라보는 서글픈 눈매.
눈 덮인 골짝에서
부서져 내리는 돌바람의 귀[耳].
푸들푸들 깃을 치는 눈[雪]의 육체.

그 동안 당신이 많이도 잊어먹은 것은
책 한 권 아무렇게나 손에 들고
저무는 언덕길로 멀어져 가던 뒷모습.
초가집 뒤울 안에 곱게 쓸리는 대숲의 그늘.

오시구려, 오시구려,
그렇게 멀리서
억뚝억뚝 바라보며 서 있지만 말고
흰 구름이라도 하나 잡아타고
그 동안 많이도 잊어먹은 것들을 가지러
오시구려,
아직도 우물터가 그리운 사람아.
(나태주·시인, 1945-)


+ 우물을 들여다보다

찬물을 길어 올린 뒤 들여다보는
우물은 깊어서 참 슬프다

빈 두레박을 던지면 언제나
울리는 것은 내 가슴이다
차디찬 물소리 듣는 아침이면
텅 빈 우물 속에 가득 차오르는 서늘한 안개
이제서야 한 오라기씩 풀려 나와
세상 바깥에서 녹는
오래 전 봄밤의 농밀한 향기

이 세상 그 무엇도 다 담고 있는 아내의
깊고 검은 눈.
(김정구·시인, 1953-2004)


+ 아내의 우물

아내가 사막이 되었다
사막을 횡단하며 아내의 우물을 발견했다
여자가 사막이 되면 지혜로워지고
사내가 사막이 되면 먼지가 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손만 대면 황금으로 변화시키던 손도
펄펄 먼지만 난다

마흔 줄에 접어들면서
아내의 우물은 바닥이 났다
운명처럼 세월을 따르고 있다
아내는 사막이 된 것을 모르고 있다
가슴에
아직도
하늘이 떠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김용언·시인, 1944-)


+ 오래된 우물  

아침부터 나는 줄곧 유리창을 보고 있었으나
무엇을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많은 것들이 희미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가을날들이 홑이불처럼 날리면서 가고 있었고
소나무들이 흔들리고 있었고
어두워지고 있었고

물을 한 잔 마시고 있었다

하늘 아래 달과
물이 차오르면서 쿨, 쿨, 쿨, 쿨,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최하림·시인, 1939-2010)


+ 오래된 우물

뒤안에 우물이 딸린 빈집을 하나 얻었다
  
아, 하고 소리치면
아, 하고 소리를 받아주는
우물 바닥까지 언젠가 한 번은 내려가보리라고
혼자서 상상하던 시절이 있었다
우물의 깊이를 알 수 없었기에 나는 행복하였다
  
빈집을 수리하는데
어린것들이 빗방울처럼 통통거리며 뛰어다닌다
우물의 깊이를 알고 있기에
나는 슬그머니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오래된 우물은
땅속의 쓸모 없는 허공인 것
  
나는 그 입구를 아예 막아버리기로 작정하였다
우물을 막고 나서는
나, 방안에서 안심하고 시를 읽으리라
인부를 불러 메우지 않을 바에야 미룰 것도 없었다
눈꺼풀을 쓸어내리듯 함석으로 덮고
쓰다 만 베니어 합판을 덧씌우고
그 위에다 끙끙대며 돌덩이를 몇 개 얹어 눌렀다
  
그리하여
우물은 죽었다
  
우물이 죽었다고 생각하자
나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때 찰박찰박 두레박이 내려올 때마다
넘치도록 젖을 짜주던 저 우물은
이 집의 어머니,
별똥별이 지는 밤하늘을 밤새도록 올려다보다가
더러는 눈물 글썽이기도 하였을
저 우물은
이 집의 눈동자였는지 모른다
  
나는 우물의 눈알을 파먹은 몹쓸 인간이 되어
소리친다
아, 하고 소리쳐도
아, 하고 소리를 받아주지 않는
우물에다 대고
(안도현·시인, 1961-)


+ 고향 우물

두레박 소리에
새벽이 열리고

마을의 대소사가
한번 퍼 올려지면

동네
아줌마들의 질벅한 웃음으로
모두 하얗게 씻겨지던
우물

옆집 여섯 살배기 성애가
물을 긷다 빠졌을 때

살려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뛰어드시다 상처까지 입으셨던
울 아버지의 무용담이

시원한 물맛에 푹 빠져버린
구름
그 사이로 유유히 헤엄치는
붕어의 몸놀림처럼 반짝이던

내 고향
내 그리움

이제 내 아버지의 흰머리 세던 나이 되어
우물이 있었던 그 언저리 더듬어 보지만
세월과 함께 묻혀버린 유년의 기억

우물 속 들여다보며
소리 지르던 이름은
낯선 문패로 걸려 있고

골 깊은 한쪽 가슴속에는
두레박 물새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훈식·시인)


+ 우물에서 시를 긷다

더운 날 산 타고 내려와
길어 올린 우물물 입을 대니
맑은 세상이 내 몸 속으로 들어온다
짜르르 오르는 느낌 온 몸이 떨려오는데
아마도 우물에서 시를 길었나 보다
벗님과 목도 축이고 발도 씻고 하는 등멱
산을 타도 씻기지 않던 찌든 때
불은 듯 벗겨져 나간다
욕심에 자꾸 길어 올려보니
어느 새 우물물에 흙이 배어 온다
우물도 많이 퍼올리면 짙어오는 앙금
한여름 조용한 날 조금씩 퍼올려야
우물물도 맑고 그 위에
해맑은 시도 떠있더라
(최범영·시인, 1958-)


+ 내 마음속 빈집에 우물

내 마음의 빈집에는 누구나
잠시 머물다 떠나버린다

어떤 때는 늦가을 까치독사가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때로는 수평선 큰 고래가
여유롭게 물도 뿜는다

까치가 세놓은 성근 빈집에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들 듯

누구라도 부담 없는 세입자가
머물다 떠나가면 좋으련만

언제쯤 바람 자는 빈집 우물에
밤마다 별들이 날아 내릴까
(김내식·시인, 경북 영주 출생)


+ 그대라는 우물 하나 있습니다

그대라는 우물 하나 있어
두레박으로 그대 맘을 긷습니다.
때론 내 서툰 솜씨 땜에 길어 올리던
그대 맘에 티끌을 넣곤 합니다.
우물 안 돌 틈으로 난
풀잎이 떨어져 올라오기도 하고,
두레박 가득 채워진 물이 흘러넘치기도 합니다.
그건 모두가 내 탓이겠지요.
사람의 맘을 얻는다는 것 더한 행복은 없습니다.
끊임없이 맑은 물이 샘솟는 우물,
들여다보면 하늘이 들어있고
내 얼굴도 들어있습니다
퍼내도, 퍼내도 한량없는 그대 맘,
청아한 하늘빛으로 그대를 얻는 건 내 몫입니다
오늘도
두레박 하나로 맘을 긷습니다.
그대의 맘을 긷습니다.
(허영미·시인, 1965-)


+ 우물 치는 날

비가 갠 그 이튿날
우물을 치려고
어른들은 머리를 감아빗고 흰옷을 갈아입었다
신발도 빨아 신었다

손 없다는 날
마을은 개도 안 짖고
하늘이 어디로 다 가서 텅 비었다

우리들은 늬들 누렁코도 부스럼도 쌍다래끼도 우물 땜시 벗었니라던
할매 말씀이 참말이라고
턱을 누르며 믿었다

울타리도 절구통도 살구나무도 언제 본 듯한 날
우물가엔 아래서 올라온 것들이 쌓였다

삼대 부러진 것 바가지 실꾸리 신발짝 호미자루 쇳대 뼈다귀 돌쩌귀 이끼 못 흐레 쇠시랑날 연필 눈썹 꿈동 텡
(정인섭·시인, 1955-)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출처 :바람에 띄운 그리움 원문보기▶   글쓴이 : 정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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