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 관한 시 모음

2015.06.14 17:03

박영숙영 조회 수:2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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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랑하는 계절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달은
11월이다
더 여유 있게 잡는다면
11월에서 12월 중순까지다

낙엽 져 홀몸으로 서 있는 나무
나무들이 깨금발을 딛고 선 등성이
그 등성이에 햇빛 비쳐 드러난
황토 흙의 알몸을
좋아하는 것이다

황토 흙 속에는
시제時祭 지내러 갔다가
막걸리 두어 잔에 취해
콧노래 함께 돌아오는
아버지의 비틀걸음이 들어 있다

어린 형제들이랑
돌담 모퉁이에 기대어 서서 아버지가
가져오는 봉송封送 꾸러미를 기다리던
해 저물녘 한 때의 굴품한 시간들이
숨쉬고 있다

아니다 황토 흙 속에는
끼니 대신으로 어머니가
무쇠솥에 찌는 고구마의
구수한 내음새 아스므레
아지랑이가 스며 있다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계절은
낙엽 져 나무 밑동까지 드러나 보이는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다
그 솔직함과 청결함과 겸허를
못 견디게 사랑하는 것이다.
(나태주·시인,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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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늑골 뼈와 뼈 사이에서 나뭇잎 지는 소리 들린다
햇빛이 유리창을 잘라 거실 바닥에 내려놓은 정오
파닥거리는 심장 아래서 누군가 휘파람 불며 낙엽을 밟고 간다
늑골 뼈로 이루어진 가로수 사이 길
그 사람 뒷모습이 침묵 속에서 태어난 둥근 통증 같다
누군가 주먹을 내지른 듯 아픈 명치에서 파랗게 하늘이 흔들린다 
(배한봉·시인,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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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한 그루의 나무에서
만 그루 잎이 살았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박용하·시인,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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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비가

길이
어둠을 점화한다
결코 닿을 수 없는 하늘을 향해
바다는 별을 쏘아 올리고

바람,
네가 피워대는 슬픔의 무량함으로
온 산이 머리끝까지
붉게 흔들린다
(도혜숙·시인,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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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너희들은 이제
서로 맛을 느끼지 못하겠구나.
11월,
햇빛과 나뭇잎이
꼭 같은 맛이 된
11월.

엄마, 잠깐 눈 좀 감아봐! 잠깐만.

잠깐, 잠깐, 사이를 두고
은행잎이 뛰어내린다.
11월의 가늘한
긴 햇살 위에.
(황인숙·시인,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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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의 나무처럼

사랑이 너무 많아도
사랑이 너무 적어도
사람들은 쓸쓸하다고 말하네요

보이게
보이지 않게
큰 사랑을 주신 당신에게
감사의 말을 찾지 못해
나도 조금은 쓸쓸한 가을이에요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어놓은 사랑을 배우고 싶어요
욕심의 그늘로 괴로웠던 자리에
고운 새 한 마리 앉히고 싶어요

11월의 청빈한 나무들처럼
나도 작별 인사를 잘하며
갈 길을 가야겠어요
(이해인·수녀 시인,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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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의 나무

가진 것 없지만
둥지 하나 품고
바람 앞에 홀로 서서

혹독한 추위가 엄습해도
이겨낼 수 있는
튼튼한 뿌리 있어

비워낸 시린 가지
천상 향해 높이 들고

흩어진 낙엽 위에
나이테를 키우는
11월의 나무
(김경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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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무어라고 미처
이름 붙이기도 전에
종교의 계절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사랑은 차라리
달디단 살과 즙의
가을 열매가 아니라

한 마디에 자지러지고 마는
단풍잎이었습니다

두 눈에는 강물이 길을 열고
영혼의 심지에도
촉수가 높아졌습니다

종교의 계절은 깊어만 갑니다
그대 나에게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유안진·시인,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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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월

지금은 태양이 낮게 뜨는 계절,
돌아보면
다들 떠나갔구나,
제 있을 꽃자리
제 있을 잎자리
빈들을 지키는 건 갈대뿐이다.
상강(霜降).
서릿발 차가운 칼날 앞에서
꽃은 꽃끼리, 잎은 잎끼리
맨땅에
스스로 목숨을 던지지만
갈대는 호올로 빈 하늘을 우러러
시대를 통곡한다.
시들어 썩기보다
말라 부서지기를 택하는 그의
인동(忍冬),
갈대는
목숨들이 가장 낮은 땅을 찾아
몸을 눕힐 때
오히려 하늘을 향해 선다.
해를 받든다.
(오세영·시인,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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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저물 무렵 마루에 걸터앉아
오래 전 읽다 놓아두었던 시집을
소리내어 읽어본다
11월의 짧은 햇빛은
뭉툭하게 닳은 시집 모서리
그리운 것들
외로운 것들, 그리고 그 밖의
소리나지 않는 것들의 주변에서만
잠시 어룽거리다 사라지고
여리고 순진한
사과 속 같은 11월의 그 햇빛들이
머물렀던 자리 11월의 바람은 또 불어와
시 몇 편을 슬렁슬렁 읽어내리고는
슬그머니 뒤돌아서 간다
그 동안의 나는
누군가가 덮어두었던 오래된 시집
바람도 읽다 만
사랑에 관한 그렇고 그런
서너 줄 시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길을 걷다 무심코 주워보는 낙엽처럼
삶에 관한 기타 등등이 아니었을까,
시집을 덮고 고개를 들면
더 이상 그리워할 일도
사랑할 일도 한 점 남아 있지 않은
담담하기만 한 11월의 하늘
시집 갈피 사이
갸웃이 얼굴을 내민 단풍잎 한 장이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처럼
낯설고 겸연쩍기만 한데
(최갑수·시인,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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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아내의 손을 잡고 밤거리를 간다
불빛 사이로 잎이 진다
겨울로 가고 있는 은행나무
아내는 말이 없다
그 손금에서도 잎이 지고 있다
문을 닫지 말아야지
겨울이 오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찬바람이 이는 마음의 문을 열어 놓는다
벌거벗은 나무가
나이테를 만들어 가고 있다
사람들이 가고 있다
문을 닫고 불을 끄고 이 밤
그들은 얼마나 긴 성을 쌓을까
구급차의 경적소리가 들린다
이 밤에 다 지려는가
몇 잎 남은 은행잎이
바람에 실려가다
아내와 나의 발등에 떨어진다
(정군수·시인,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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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안부

황금빛 은행잎이
거리를 뒤덮고
지난 추억도 갈피마다
켜켜이 내려앉아
지나는 이의 발길에
일없이 툭툭 채이는 걸
너도 보았거든
아무리 바쁘더라도
소식 넣어
맑은 이슬 한 잔 하자

더 추워지기 전에
김장 끝내고 나서
(최원정·시인,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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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月

추수 끝낸 들판
찬바람이 홰를 치고

바라보이는 먼 산들
채색옷 단장을 하고는
먼데서 오는 손님을 기다린다

잎을 지운 나무 위에
까치집만 덩그마니
11月 가로수 은행나무
줄을 서서 몇 뼘 남은 햇살에
마냥 졸고 있다

채마밭 식구들 실한 몸매를 자랑하며
초대받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데
길 옆 목장 젖소들 등마루에
남은 가을이 잠시 머문다.
(홍경임·시인, 경기도 안성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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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을 보내며

하늘엔 내 마음 닮은
구름 한 점 없이 말짱하게
금화 한 닢 같은
11월이 가는 구나

겨울을 위하여
서둘러 성전에
영혼을 떨구는 사람도

한 잔의 깡소주를
홀로 들이키며
아찔하게 세상을
버티는 사람도

가을과 겨울의
인터체인지 같은
11월의 마지막
계단을 밟는구나

뜰 앞 감나무엔
잊지 못한 사랑인 양
만나지 못한 그리움인 양
아쉬운 듯 애달픈 듯
붉은 감 두 개
까치도 그냥
쳐다보고만 가는...

그래 가는 것이다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추운 겨울 바람 찬 벌판
쌓인 눈 속이라도
살아있으니 가는 것이다

희망이란 살아있는 것일 뿐이라 해도
사랑이란 더욱 외롭게 할 뿐이라 해도
착한 아이처럼 순순히
계절 따라 갈 일이다
사람의 길
사랑의 길을
(유한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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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이 전하는 말

한 사람이 서 있네
그 옆에 한 사람이 다가서네
이윽고 11이 되네
서로가 기댈 수 있고 의탁이 되네
직립의 뿌리를 깊게 내린 채
나란히 나란히 걸어가시네

북풍한설이 몰아쳐도
꿈쩍하지 않을 곧은 보행을 하고 싶네

한 사람 또 한 사람이 만나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올곧은 모습으로
어기여차 어기여차
장단에 맞춰 풍악에 맞춰
사뿐히 사뿐히 걸어가시네

삭풍이 후려쳐도
평형감각 잃지 않을
온전한 11자로 자리매김하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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