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며 생각하며

2005.11.07 17:54

최옥자 조회 수:59 추천:15

<시드니에서 최옥자 드립니다.>
  
                                     산책하며 생각하며
                                                       최옥자


  온종일 일상사로 달구어진 머리도 식힐 겸 나는 새벽에 이어 저녁산책을 즐긴다. 붉게 이글거리던 석양빛이 서서히 사그라질 무렵, 한적한 저녁산책은 신 새벽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다. 길은 언제나 같은 길이건만 새벽산책엔 하루를 여는 희망이 담기고 저녁산책엔 바쁜 일상을 끝낸 안식과 평화 그리고 감사의 마음이 담긴다.  

인적 없는 주택가엔 어두움이 서서히 내리고 인가 벽난로에서 나오는 매캐한 나무 타는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집집마다 창문에 비치는 황금색 불빛이 따사롭다. 산책 도중 찾아 드는 갖가지 상념 가운데서 며칠 전 돌아가신 마리아 할머니가 떠오른다.

  마리아 할머니는 친우 K의 시어머니이시다. 간혹 K의 집을 방문하게 되는 날엔 90이 가까운 노령이시지만 할아버지와 함께 정갈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주셨다.
“세상이 하루하루 자꾸 좋아지는데 나는 빨리 가고 싶지 않아.”
머지않아 이승을 떠날 것이 의식되는지 우리의 손을 붙잡고 삶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시는 바람에 내 노년에도 저렇듯 생의 의욕이 퍼렇게 살아있겠구나 생각하기도 했다. 잔인한 세월 속에 할아버지가 유명을 달리하신 후 할머니는 예전과는 달리 쓸쓸한 모습이더니 그 후 자리를 보존하시다가 3년 뒤 할아버지 뒤를 따르셨다. 슬픈 소식이다.

인생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다. 나도 이젠 건망증으로 가끔가다 깜박깜박한다. 어제는 텔레비전 리모콘이 없어져 얼마나 찾았던가. 소파를 들어내어 거실 구석구석을 살피고 소파 방석까지 들춰보았으나 오리무중이었다. 덕분에 평소 보이지 않은 곳에 쌓인 먼지를 다 털어 낼 수 있었지만 혹시나 하고 뒤져 본 쓰레기통에도 없었으니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이튿날 리모콘을 찾았다. 구멍 뚫린 양말을 깁느라 갖다 놓은 반짇고리에 왜 리모콘을 넣었을까. 살아온 세월보다 더 짧을, 남은 생을 즐겁게 살아도 여한이 서릴 텐데 나는 수시로 찾아드는 고난의 늪에 빠져 허덕이기 일쑤다.

  어느 잡지사 기자가 ‘하늘나라’ 특집기사를 쓰기 위해 복을 주는 신과 고통을 주는 신을 만나러 떠났다. 그러나 두 신의 주소는 같았다. 두 신이 같이 살면 얼마나 싸울까? 의아한 마음으로 찾아간 자리엔 흰 수염을 늘어트린 할아버지 한 분이 열심히 구멍 속에 크고 작은 공을 던지고 있지 않은가.

“아니 공 던지기를 하시면서 무슨 복을 나눠준다고 하십니까?” 기자의 질문에 “복 받을 놈한테 이 공을 던져서 맞추면 그 때부터 받은 그놈이 발복하는 거야.” 하고 대답한다. 그 공에는 고난, 두려움, 역경이라는 글씨들이 적혀있었다. 기자가 글씨가 새겨진 공의 껍질을 벗기자 그 안에 황금색의 찬란한 빛을 발하는 공이 튀어나왔는데 거기에는 ‘복’이라는 글씨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복을 담당하는 신과 고난을 담당하는 신은 같은 신이었던 것이다.

  신은 역경을 던져 이겨낸 성숙한 인간에게 복을 주셨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고난은 축복의 시작이었다. 살아가며 특히 인간관계를 통해 찾아오는 고난으로 나는 때론 상심하고 허탈감에 빠지기도 한다. 아직도 남을 헤아리는 아량이 부족하고 초월하지 못한 나의 아집과 욕심 탓일 게다. 어제는 난소암을 앓던 여 교우가 세상을 하직했다. 이웃의 연이은 부음이 나의 마지막 행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창조주가 부르시면 언제고 떠나야 할 우리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걸까 하는 생각보다 이제는 어떻게 죽음을 잘 맞이할까 하는 게 더 절실해진다.

죽음의 완성을, 한 번 부여된 자신의 생을 완전히 살아버린다는 주의로 일관했던 천재 괴테는 파우스트를 통해 인생의 영욕과 애욕의 무의미를 체험한 뒤 다시 삶을 긍정했다. 곧 삶의 의미는 돈, 명예, 쾌락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노력해서 살아가는 그 고생 속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의미를 두고 있었다. 고통을 초월하여 진정 ‘인생은 아름다워라’ 말하며 평화롭게 내 인생을 마감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선다면 얼마나 행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