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교수의 전화

2005.11.09 18:01

김지중 조회 수:71 추천:11

노(老) 교수의 전화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야)  김 지 중



  11월의 첫 날인 화요일 아침, 대학시절 교양국어를 가르치셨던 교수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명함을 정리하면서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유선전화의 지역번호가 4자리 수 일 때 받은 나의 명함을 보고 생각난 김에 전화를 걸었노라고 하면서 말씀을 이어갔다.

  9월 말, 우리 지역에서 의미있는 행사가 있었는데 도내 언론뿐만 아니라 중앙언론사까지 관심을 보여주지 않아, 서울에서 바쁜 시간을 쪼개어 참석한 초청 손님들에게 상당히 민망했다는 것이었다.  1930년대 한국 시인 중 창씨개명과 친일시를 단호히 거부했던 양심 있는 시인이자 우리시대 문학사의 큰 스승이시며 우리 지역의 존경받는 문인의 추모문학제를 지역언론에서 소홀히 취급했다는 내용이었다.

  지난해 9월 시인의 작고 30주기를 맞아 시작한 문학제로 시인의 문학세계와 시 정신을 기리는 추모 문학제로서, 시인은 1930년대 '시문학' 동인이 된 이래 역사의 혼란 속에서 자신만의 곧은 시 정신을 일관되게 관철했던 문인이라 했다. 그리고 일제말 문예지 '문장'을 강제 폐간하고 친일어용지 '국민문학'을 창간한 일제의 만행에 항거해 광복까지 절필을 선언했던 지조 있는 문학인이었다고 한다.
  대강 이러한 내용으로 한 30여분간 통화를 했다. 휴대폰의 배터리가 따뜻할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오랜만에 학부 학생으로 돌아가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노 교수는 그 날의 행사가 언론사의 취재와 방송이 없어 좋은 뜻을 널리 알리는데 부족했다며 홍보의 미숙함을 안타까워했다. 난 다음에라도 그와 유사한 일이 있어 사전에 알려주시면 해당 부서에 적극적으로 전달해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게 하겠다고 감히(?)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에게 전화를 주신 노 교수님은 다름 아닌 허소라(許素羅, 본명 衡錫) 시인이시다. 석정문학제전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맡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추모문학제의 당사자는 우리가 흔히 목가시인(牧歌詩人) 혹은 전원시인(田園詩人)이라 일컫는 신석정(辛夕汀, 본명 錫正) 시인이다. 오는 2007년이면 탄신 100주기를 맞는다고 한다. 이런 시점에 시인 고향의 지역언론에서 관심을 가져 방송이나 신문기사를 통해서 널리 알려지기를 원했는데 그렇지 않아 서운했다는 내용이었다.

  잠시 상념에 잠겼다. 비록 긍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더라도, 언론에 많이 노출되었거나 일반 대중에게 익숙해진 단체나 인물에게만 뉴스의 초점이 맞춰지고 집중된다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마치 친일파 지식인일지라도 추종세력이 많고 거기에 재력도 있어 출생지에 문학관을 세우고, 문학상을 제정해서 시상식을 하더라도 언론의 조명을 받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처럼 말이다. 전화 한 통화로 이야기가 비약되었지만 한번쯤 되새겨 볼 일이다.

  전주의 덕진공원 연못가에는 지난 1978년에 전북예총에서 세운 신석정 시인의 <네 눈망울에서는>라는 시비가 세워져 있다. 대학시절 읊조렸던 서정적인 시중의 하나였다.

네 눈망울에서는


초록빛 五月
하이얀 찔레꽃 내음새가 난다

네 눈망울에는
초롱초롱한
별들의 이야기를 머금었다

네 눈망울에서는
새벽을 알리는
아득한 鐘소리가 들린다

네 눈망울에서는
머언 먼 뒷날
만나야 할 뜨거운 손들이 보인다

네 눈망울에는
손잡고 이야기할
즐거운 나날이 오고 있다  

>>>>>>>>>>>>>>>>>>>>>>>>>>>>>>>>>>>>>>>>>>>>>>>>>>>>>>>>>>
  한국 시인 중 가장 투명하고 지조 있는 시 세계를 지닌 신석정 시인은  1907년 부안읍 동중리에서 출생했다. 1924년 조선일보에 첫 작품 '기우는 해'를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이후 1974년 7월 유고시 '뜰을 그리며(동아일보 연재)' 까지 반세기가 넘는 시작 활동을 했다.
  본격적인 문단활동은 지난 1931년 '시문학' 3호에 '선물'이 발표되고 박용철·정지용·김영랑·김기림 등과 교유를 갖기 시작하면서라고 한다. '임께서 부르시면',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등이 담긴 첫 시집 <촛불>과 광복 전의 작품을 묶은 제2시집 <슬픈 목가> 등 초기에는 목가적 서정성이 담긴 시를 주로 썼다고 한다. 하지만 광복과 한국전쟁의 격랑을 겪으면서 남성적인 기개와 시대의 아픔이 담긴 시 세계로 변모한다.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은 '산의 서곡', '대바람 소리', '나에게 어둠을 달라' 등이 있다. 시집으로는 제3시집 <빙하>, 마지막 시집인 <대바람소리> 등 4권과 중국시집 <매창시집> <명시조 감상> 공저 외에 수상집 <난초에 어둠이 내릴 때>를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