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황혼의 10대 뉴스

2005.12.17 11:34

이기택 조회 수:90 추천:17

2005황혼의 10대 뉴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 이기택

  

  또 한해를 보낸다. 서양의 철인 패닌의 "노년에는 한해 한해가 짧고, 하루하루가 길다." 고 한 말이 실감된 한해인 듯하다. 황혼은 상실의 삶이라 했던가. 올해엔 잃은 것이 많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감상(感傷)적인 심사 탓일까. 그래도 앞뜰에 나서면 온갖 푸성귀, 풀들이 손짓하고, 새들도 반기는 자연 속에서 하루하루가 지루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자위하며 뒤돌아본다.


(1) 큰형님의 별세

     건강하셨던 큰형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예상하지 못했던 갑작스런 전화를 받고, 당황했지만 급히 아들내외를 부르고 급히 챙겨 고향의 현대아산병원으로 달려갔다. 급체로 병원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사망하셨다고 한다. 87세의 고령에도 건강하셔서 걱정 없이 무심하였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한 집안의 어른으로서 버팀목처럼 든든했던 형님이셨는데!! 나에게는 이 나이에도 엉석을 부릴 수 있는 형님이었는데!! 허전하고 무상하였다. 뒤늦게 큰형님의 빈자리가 큰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2) 외손자의 입대

  대학에 다니던 외손자 연철(演喆)이가 휴학하고 군에 입대하였다. 연철이는 제 어미가 교통사고로 젖먹이 때 대부분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서 그런지 유달리 정이 가는 외손자였다. 아내는 막상 내 자식들 군에 보낼 때에는 몰랐는데 외손자가 군대간다고 하니 왠지 모르게 훨씬 안쓰럽다고 했다. 나는"다 가는 군대인데 안쓰러울 것은? 군에 갔다 와야 더 성숙해 지는 거야."라고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아내와 같은 심정이었다.

(3) 아내 '엄마의 밭' 개간

    아내가 오래 전부터 다니던 산책길에 밭을 일구겠다고 며칠째 혼자 열을 냈다. 나는 무슨 욕심이냐고 반대하였으나 끝내 그만두지 않았다. 집념이 대단하였다. 내가 다리가 아프면서 혼자 다니는 산책길이라 나는 현장을 한 번 정찰하고, 가부간 결정해야 할 것 같았다. 산책길 한 모퉁이의 방치된 넓은 공터는 토질도 좋고 밭으로 썩 좋은 곳이었다. 아내는 벌써 두 두렁을 일구어 하지감자를 심어 놓았다. 할 수 없이 나는 5일간의 작업봉사로 한 마지기쯤 되는 밭을 만드는데 협조하였다. 아내가 산책길을 오가며 살피고 가꾸겠다는 밭이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밭'이라 명명하였다. 아내는 그곳에 가면, 재미있는 듯 많은 시간을 보내고 온다. 첫해인 올해에는 풍성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먹을 땅콩과 참깨를 수확했다. 앞으로 '엄마의 밭'은 땅콩, 참깨, 콩 등 우리 집 식구들의 영양을 채워주는 엄마의 젖줄 같은 밭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4) 기제사의 통합

    우리 집 기제사는 아홉 번에 이른다. 형님의 대를 이어 장조카가 지내지만 버거운 일이다. 그래서 증조부님 기일에 통합하여 모시기로 뜻을 모아 결정하였다. 통합하여 한번에 모시면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서로 만나보실 수 있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손으로서는 죄송스러운 마음이다.

(5) 나의 이빨공사

    이는 오복중 하나라고 한 말에 공감한다.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여러 차례 보강했지만 그것도 수명이 다 된 듯 불편하여 두 달에 걸쳐 보강공사를 하였다.

(6)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땅은 거짓말을 안 한다."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말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실제 몸으로 느끼고 실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고, 모든 사고의 뿌리를 그곳에 두고 있는 나 자신도 피상적인 이해에 불과하였으니 말이다. 늦게나마 시골에 다시 살게 된 이제야 철이 드는 것인지 알 것 같다. 공자의 “순천자는 살고 역천자는 망하느니라.”란 말도 그 뜻을 알 것 같다. 농촌 살리기는 개방의 반대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공자의 말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7) 다정하던 세 친구를 저 세상으로 보냈다.

    다정했던 친구를 셋이나 저 세상으로 보냈다. 황혼은 상실의 삶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대전국군묘지는 제2묘역도 거의 다 채워지고 있었다. 하기야 휴전 전후에 군대복무를 했던 사람들은 이제 모두 거의 살만큼 살았다. 묘역을 돌아보며 옛 친구들 묘비를 찾아 명복을 빌었다. 그 옛날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8) 잊고 살았던 옛 전우의 전화

    함께 복무했던 형제처럼 지냈던 친구로부터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내가 그동안 여러 차례 주거지를 옮겨서 어렵사리 찾았다고 했다. 우리가 모셨던 연대장의 소식도 전해주고, 내년에는 한 자리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 옛날의 연대장(李榮培 대령)은 8순이 넘었지만 정정한 목소리였다. 다 반갑고 기쁜 일이다.

(9) 큰아들의 다리골절 부상

    큰아들이 교사축구시합에서 다리골절을 당했다. 그것도 여러 날 소식이 없어 궁금하여 전화했더니, 변명이 의심스러워 알아보니  입원하고 있었다. 뼈에 금이 가서 시간은   걸리지만 괜찮다고 하였다. 애비로서는 불혹을 넘긴 자식이 젊다고 과격하게 운동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경고성 충고를 하였지만 불혹의 아들이 알아서 하지 .않겠는가.

(10) 처조카의 금의환향

     서울에서 근무하던 처조카가 전주로 왔다. 전자제품 판매장을 관리하는 호남총책임자로의 영전이다. 고향으로 와서 쉽게 부모도 찾아보고, 효도하는 것을 보니 흐뭇했다. 학교 때 한 동안 제 고모 밥을 먹어서인지 아내에게도 참 잘한다. 고마운 일이다.

  황혼에도 정열적 사랑을 누렸던 괴테는 ‘황혼은 상실의 삶‘ 이라고  했다. 재산과 돈, 친구와 일, 그리고 꿈을 잃는 삶이라고 했다. 그 말을 실감하며보낸 한해였다.  재산과 돈은 잃을 것도 없지만, 올해엔 큰형님과 친구 셋이나 보냈다. 가야 하는 길을 어이 막을 것인가. 나 또한 희망도 욕심도 버려야 할 황혼 인 것을……. 그러나 꿈은 항상 안고 살아가리라. 비록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꿈을 꾸리라.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즐거워하며, 기뻐하고 만족하며 살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