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돌방의 맛
2005.12.25 12:11
온돌방의 맛
김 학(국제펜클럽한국본부 부 이사장)
꿈을 꾸다가 눈을 떴다. 불을 밝히고 사방을 둘러보니 내 집 내 침실이다. 벽엔 서화작품 몇 점이 걸려있고, 낯익은 아내의 화장대와 나의 책상이 방구석에 얌전히 놓여 있다. 나는 시방 따뜻한 온돌방에서 잠을 자다가 깬 것이다. 옆자리에선 아내가 새근새근 잠을 잔다. 아무도 침노할 수 없는 나의 작은 천국이다.
몇 년 전 우연히 2주일 동안 미국의 여러 도시를 둘러 볼 기회가 있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를 비롯하여 뉴욕, 라스베가스, LA, 호놀루루를 돌며 줄곧 호텔생활이어서 별다른 불편은 없었다. 그러나 여러 날의 침대생활은 나로 하여금 잠을 설치게 했다. 마치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한 느낌이었다. 침대 생활이 계속되면서 나는 《노인의 꿈》을 떠올렸다.
호화로운 호텔이 있었다. 매일 아침 그 호텔에서는 번쩍거리는 호텔주인의 승용차가 굴러 나왔다. 승용차가 그 호텔을 나오면 한 노인이 언제나 호텔 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일이라, 호텔주인은 궁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느 날, 호텔주인은 노인에게 물어 보았다.
"왜 할아버지는 늘 이곳에 앉아 호텔 쪽만 바라보십니까?"
"저는 사업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가족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염치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항상 저 호화로운 호텔에서 지내는 꿈을 꾼답니다."
"아, 그러십니까? 제가 오늘부터 할아버지에게 호텔 방 하나를 내어드리죠. 한 달이고 일 년이고 묵고 싶은 대로 묵도록 하십시오."
그 날부터 노인은 호텔에서 묵게 되었다. 노인의 꿈이 이루어진 셈이다. 며칠 후 호텔주인은 노인의 방을 찾았다. 얼마나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노인은 그곳에 없었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끼니때마다 날라다 주는 고급 음식만 먹으면 편할 줄 알았던 노인은, 그곳에서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어디론가 떠나버린 것이다. 그런 뒤 어느 날 정원을 산책하다가 호텔주인은 의자에 누워있는 노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호텔주인은 노인에게 다가가서 영문을 물었다.
"침대에 누워 있으니까, 이 정원 의자가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었지요." 노인은 아주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국 여행 중 호텔의 침대생활도 나에게 있어선 《노인의 꿈》이나 다를 바 없었다. 짧은 여정인데도 가족이 그립고, 따뜻한 온돌방이 그리웠다. 아무래도 나에겐 새로운 문명천지보다는 생활에 익숙한, 놀던 방죽이 어울린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많은 재미동포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N씨, 택시기사 P씨, 여행사 가이드 S씨, 미국인과 결혼한 주부 L여사, 식당주인 K씨, 노점상 C양……. 나는 그들을 만날 때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집쥐와 들쥐》를 생각하곤 했다. 모국에 사는 내가 집쥐라면 그들은 넓은 신천지에 뛰어든 들쥐가 아닐까?
자유의 범람 속에서 총으로 자신의 안보를 꾀해야 하는 미국, 흑인과 백인의 틈바구니에서 영역을 확대해 나가야 하는 미국,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미국에서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 가는 그들 해외동포야말로 사령장 없는 외교관이요, 우리나라의 영토를 확장해 나가는 개척자가 아닐 수 없다.
온돌방의 따뜻한 열기가 등에 배어든다. 유년시절 어머니의 등에 업혔을 때의 그 따사로운 감촉이다. 침대에서는 맛볼 수 없는 온돌방의 맛이다.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온돌방의 따사로움, 그것은 우리네의 핏줄에 연면히 이어져 온 정(情), 바로 그것이다. 워싱턴 D·C에서 만난 재미동포 N씨에게서도 나는 온돌방의 따사로움을 만끽 할 수가 있었다. 그곳에서 묵던 사흘 밤을 내내 나를 찾아와 밤거리를 구경시켜주고, 술자리를 마련해 주며, 마지막 밤에는 집으로 초대하여 한국식 만찬을 베풀어주기도 하였다. 미국생활 13년째라는 N씨에게서 나는 침대 맛이 아닌 따사로운 온돌방의 맛을 느낄 수가 있었다.
김 학(국제펜클럽한국본부 부 이사장)
꿈을 꾸다가 눈을 떴다. 불을 밝히고 사방을 둘러보니 내 집 내 침실이다. 벽엔 서화작품 몇 점이 걸려있고, 낯익은 아내의 화장대와 나의 책상이 방구석에 얌전히 놓여 있다. 나는 시방 따뜻한 온돌방에서 잠을 자다가 깬 것이다. 옆자리에선 아내가 새근새근 잠을 잔다. 아무도 침노할 수 없는 나의 작은 천국이다.
몇 년 전 우연히 2주일 동안 미국의 여러 도시를 둘러 볼 기회가 있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를 비롯하여 뉴욕, 라스베가스, LA, 호놀루루를 돌며 줄곧 호텔생활이어서 별다른 불편은 없었다. 그러나 여러 날의 침대생활은 나로 하여금 잠을 설치게 했다. 마치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한 느낌이었다. 침대 생활이 계속되면서 나는 《노인의 꿈》을 떠올렸다.
호화로운 호텔이 있었다. 매일 아침 그 호텔에서는 번쩍거리는 호텔주인의 승용차가 굴러 나왔다. 승용차가 그 호텔을 나오면 한 노인이 언제나 호텔 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일이라, 호텔주인은 궁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느 날, 호텔주인은 노인에게 물어 보았다.
"왜 할아버지는 늘 이곳에 앉아 호텔 쪽만 바라보십니까?"
"저는 사업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가족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염치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항상 저 호화로운 호텔에서 지내는 꿈을 꾼답니다."
"아, 그러십니까? 제가 오늘부터 할아버지에게 호텔 방 하나를 내어드리죠. 한 달이고 일 년이고 묵고 싶은 대로 묵도록 하십시오."
그 날부터 노인은 호텔에서 묵게 되었다. 노인의 꿈이 이루어진 셈이다. 며칠 후 호텔주인은 노인의 방을 찾았다. 얼마나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노인은 그곳에 없었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끼니때마다 날라다 주는 고급 음식만 먹으면 편할 줄 알았던 노인은, 그곳에서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어디론가 떠나버린 것이다. 그런 뒤 어느 날 정원을 산책하다가 호텔주인은 의자에 누워있는 노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호텔주인은 노인에게 다가가서 영문을 물었다.
"침대에 누워 있으니까, 이 정원 의자가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었지요." 노인은 아주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국 여행 중 호텔의 침대생활도 나에게 있어선 《노인의 꿈》이나 다를 바 없었다. 짧은 여정인데도 가족이 그립고, 따뜻한 온돌방이 그리웠다. 아무래도 나에겐 새로운 문명천지보다는 생활에 익숙한, 놀던 방죽이 어울린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많은 재미동포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N씨, 택시기사 P씨, 여행사 가이드 S씨, 미국인과 결혼한 주부 L여사, 식당주인 K씨, 노점상 C양……. 나는 그들을 만날 때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집쥐와 들쥐》를 생각하곤 했다. 모국에 사는 내가 집쥐라면 그들은 넓은 신천지에 뛰어든 들쥐가 아닐까?
자유의 범람 속에서 총으로 자신의 안보를 꾀해야 하는 미국, 흑인과 백인의 틈바구니에서 영역을 확대해 나가야 하는 미국,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미국에서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 가는 그들 해외동포야말로 사령장 없는 외교관이요, 우리나라의 영토를 확장해 나가는 개척자가 아닐 수 없다.
온돌방의 따뜻한 열기가 등에 배어든다. 유년시절 어머니의 등에 업혔을 때의 그 따사로운 감촉이다. 침대에서는 맛볼 수 없는 온돌방의 맛이다.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온돌방의 따사로움, 그것은 우리네의 핏줄에 연면히 이어져 온 정(情), 바로 그것이다. 워싱턴 D·C에서 만난 재미동포 N씨에게서도 나는 온돌방의 따사로움을 만끽 할 수가 있었다. 그곳에서 묵던 사흘 밤을 내내 나를 찾아와 밤거리를 구경시켜주고, 술자리를 마련해 주며, 마지막 밤에는 집으로 초대하여 한국식 만찬을 베풀어주기도 하였다. 미국생활 13년째라는 N씨에게서 나는 침대 맛이 아닌 따사로운 온돌방의 맛을 느낄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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