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차장
2011.08.15 03:32
느닷없이 몰아닥친 열대야 때문인지
작동하지 않는 투명한 유리창 보며
침묵 끝에 열기 보태는 한숨마다
시동 다시 걸고 눌러도 소용없다
허둥대니 땀 흐르는 곳마다 길이고
즐비한 재생부품 간판은 점집 같다
바람 빠져 풀썩 주저앉은 몸으로
살아서 만나지 못했던 인연이라고
죽어서 서로 몸 비비며 부둥켜안고
앙상하게 드러난 뼈 사이로 끝없이
내달았던 추억을 바람에 말리며
오랫동안 누군가 찾아주기 바랬을까
마당에 겹겹이 투명한 무덤 만들고
사라진 공룡의 문형으로 환생했다가
전장 누비던 용사의 말(馬) 화석이거나
형체도 알 수 없이 납작해진 몰골로
세대를 넘나들며 돌고 돌아다닌 몸
장기(臟器)를 만지는 손길이 분주하다
한 때는 동여맨 타이어 다 닿도록
부양가족 위해 몸 사리지 않고
연골 다 닳도록 길이라면 어디든
세상 향해 거침없이 달렸으나 지금은
손가락 사이로 밭은기침 막아내며
휘발유 냄새 베인 해부실에 누워있다
장기 든 한 사내와 수인사를 나누고
불과 몇 분이 무심히 지났을 뿐인데
장갑 벗겨지며 끝난 이식 수술 뒤
저승사자 같은 사무실벽 압축기가
유체 이탈하고 육신만 남은 차의
흔적 지우려 바람 속에 밀어 넣는다
지게차에 옮겨지는 차가운 생명은
내 모르는 수많은 죽음의 하나였을지
날 더운 건 뜨거운 영혼이 쉼 없이
온힘 다해 앞으로 달리기 때문이다
훗날 나도 장기 하나쯤 지상에 놔두고
너처럼 투명하게 층층으로 쌓이고 싶다
2011년 <미주문학>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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