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베개 / 이월란
1
나를 눕힌 것은 뜬구름 잡는 잠이 아닙니다
초유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머리맡의 기억입니다
다산으로 말라붙은 가슴마저 햇살 아래 말려야 했다는
개연성 없는 감상입니다
더 이상 젖지 않아 살균되지 못한 아기를
행주 옆에 방치했을 늙은 여자는 노산이 취미였습니다
머리를 괴는 곳마다 눈물이 고였다는 말도 거짓말이 틀림없습니다
달콤한 연유를 뺏어 먹은 언니는 농구선수처럼 키가 자라고
벌컥벌컥 물을 마셔도 목이 마른 이유가 어렴풋해질 때쯤
시들어가던 엄마의 욕창이 베갯잇에 피어올랐습니다.
2
아기를 낳고
젖 마르는 약을 먹는 여자는 우유를 마실 자격이 없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어 새끼고양이를 입양하고 빈 젖을 물린 여자는
우유만 먹고 우유부단해진 아이만 나무랍니다
탁아소에 누워 있던 아기를 눈으로 밟고 다닌 적도 없습니다
어물어물 넘어간 몸조리마저 처량한 희생이었다고 단언합니다
가끔 잔병치레하듯 수유가운을 입고 가슴을 만집니다
불린 가슴으로 꼭 짠 세월을 한 방울 두 방울 떨어뜨립니다
오십견에 목이 꺾인 날은 우유베개를 베고 해피드림을 꿉니다
비린내에 잠이 깼는데 엄무우우우우
암소 한 마리 출렁이며 걸어 나옵니다
3
엄마의 법에 충실한 로펌에서 18주 산후휴가를 받은 딸은
보란 듯이 종일 젖을 먹입니다
내가 질투를 느끼는 대상이
D컵으로 부풀어 오른 가슴인지
더 이상 엄마가 필요 없는 디지털 산모인지
고슬고슬한 핏덩이를 끌어안고 눈을 맞추는 새파란 엄마인지
내 딸은 맛도 못 본 젖을 오물오물 배 터지게 빨고 있는 딸의 딸인지
통통한 아기침대가 알 리가 없습니다
먹고자고싸고우는 앱의 운용체계로 들어가 버린 로봇아기가
쌔액쌕 알파와 오메가를 읊조리다 모유 한 모금 뱉어냅니다
자궁처럼 흔들리는 베시넷엔 젖 도는 소리가 쉴 새 없이 흐릅니다
와이파이 프레임 속에서 매일 옷을 갈아입는 혼혈아기가 자면서 웃습니다
액정을 쓰다듬으며 나는 비로소 수면에 공감하고 싶습니다
잠 속의 우유를 마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