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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제4시집
2025.05.17 12:34

사슴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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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이 온다 / 이월란

 

 

겨울 한가운데였을 것이다

완성된 풍경화 가운데 떨어진 나뭇빛 짐승 한 마리

창 너머 셀폰 터지는 소리를 들었을까

안개꽃 문신이 사향내를 뿌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갑자기 나타나는 것들이 있다

읽다 만 책 속에 끼워둔 북마크 같다

먹이처럼 삼켜지는 줄거리 없는 흉몽 한 입

죽은 엄마의 두 발, 수치스러웠던 대문, 부끄러웠던 운동장, 놓쳐버린 비행기, 올려다보던 하늘에서 떨어지던 눈물, 자꾸만 꺼지던 땅, 멀어질수록 가까워지는 얼굴

 

갑자기 보이는 것들은 모두 어딘가로부터 천천히 온 것이다

누군가는 먹이를 찾으러 왔다고

누군가는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했다

포식자든 사냥꾼이든 도망쳐 온 길은 사방이 수줍어진다

 

미세한 거짓이 쌓여 단단한 진실이 되는 걸 보았다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돈을 모으던 엄마가 죽었을 때

그녀마저 비로소 거짓이 되었다

이 많은 진실들이 단 하나의 거짓을 향하고 있다면

곧 사라질 저 사슴 한 마리는

 

기억의 협곡을 헤치고 왔을 것이다

거짓의 영역에 뛰어든 진실처럼 당당하다

믿고 싶었던 헛소문처럼 빼앗긴 들판에 뛰어든 봄처럼

홀로 떠도는 응시

먼 것이 다녀간 뒤 바람의 방향이 바뀌곤 했다

 

사슴 발자국 위에 집을 짓고 문을 잠근 뒤

손에 들고 있던 마지막 경계

두 손을 모으면 기도가 되는 나이가 되어서도

휘저어도 끊어지지 않던 알끈 같은 묘한 당김으로

 

칼끝에서 벌어지는 사과 같은 시간

아삭아삭 풀밭을 거닐고 있다

벨벳을 다 긁어먹고도 배가 고픈 큰 눈망울이 두리번거린다

사슴피를 마시고 사슴이 되었다는 시름시름 앓던 아이 같기도

사자의 뱃속에서 꿈틀 다시 살아난 꿈같기도 해서

외래종이 되어

사슴 앞에 다시 나타난 나를 돌려세운다

 

서로를 침범하는 저 가느다란 다리는

과거에서 왔다

미래에서 왔다

앞집 뒤뜰이 겅중겅중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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