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베끼다 / 이월란
갤러리에 있던 개의 사진이 뭉텅 사라졌다 새를 보고 짖는 명장면까지
같은 시간으로 갈아입고 같은 배경으로 간다
원본처럼 떠 있는 하늘 아래
꼬리가 길어 밟기 좋은 풍경은 순간에서 영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고 믿는다
흐르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메모리칩 속으로 저장되고 있는 시간을 따라간다
같은 날인 척 앉아 있는 벤치에 얄팍한 술수를 입힌다
새가 날아와야 하는 그리운 지점
시간을 먹고 체중이 두 배가 되어버린 피사체는 어디서도 너무 가깝다
익숙한 방향으로 유인하는 손끝에서 패러디 당한 까만 눈도 반짝
몰래 자라난 미래를 가늠하다 발이 빠지기 좋은 지점에서
찰칵, 설정을 베끼는 소리가 너무 가볍다
진실은 늘 프레임 밖에 있다
행복을 선동하는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면 보정 중인 슬픔이 되돌아가기를 반복한다
날조된 유언비어로 하트를 누른다
창밖으로 던져진 의도를 읽는다
뒷모습이 없는 개의 뒷모습을 보며 맥락이 끊긴 셔터를 습관적으로 누른다
순간은 조작 없이도 거짓을 담을 수 있다
역광으로 잘린 그림자를 되살린다
풍경의 이면은 기억의 구도로 가까워지고 바람 소리가 찍힌 지점에
어디선가 본 안목을 덧댄다
어둠으로 인화된 빛은 진실이라는 착각으로 저장되기 마련
시간 밖의 길과
실명의 순간을 찍는 마법의 손
사라진 새에게 애도를 보내며
주인공을 잃고 암실에서 환해지는 동안
중세 말의 플랫폼 같은 갤러리로 맹목이 총총 뛰어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