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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제4시집
2025.05.17 12:45

안개와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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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와 아버지 / 이월란 

 

 

세상의 반은 백내장을 앓았어요.

수술대에 오르지 못한 어둠이 버티고 있을 때

물려받은 다초점 렌즈 너머 아버지는 부작용이 넘치는 중

범인 수색에 뚫린 구멍처럼 텅 빈 시선으로

한 눈을 가려도 집으로 가는 길이 두 개로 보였을까요

 

수정체 같은 엄마는 반질반질한 눈물을 깜빡이며

다래끼처럼 생겨난 아침에 한 손으로 용서를 가리고 있었어요

먼 바다가 키운 은갈치 구이로 밥상은 눈부시고

남자와 여자 사이엔 죄로 이어진 다리가 있어

먼저 건너오는 쪽이 죄인이 되는 거라고

안개 자욱한 동굴이 키우는 아이들은

잘못 만난 하나님처럼 그저 숭배하고 복종하는 바람에

 

세상의 반은 당신의 여자들

흉몽을 덮고 자는 밤마다 태어나는 아비뇽의 여자들은

뭘 먹을지 그려보는 분식집 테이블처럼 일상적이었어요

붉은 떡볶이 국물에 하얗게 삶긴 계란은 속살처럼 전위적이어서

입을 닦고 돈을 내는데 화대를 내듯 왜 낯이 뜨거웠을까요

아무 데서나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당신은

장애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모순의 실험실 같았어요

 

당신의 함정에 빠진 아이들은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크고 멋진 배를 떠올렸죠

 

향수에선 늘 매춘의 냄새가 났어요

벽에 닿으면 맺히는 세상은 습관처럼 주인을 실험 중

나는 물방울이 되어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당신의 눈 속에 떠 있었나요

한 눈을 가린 채 아버지, 당신은 무엇과의 거리를 재고 계셨나요

언제나 가해자 편에 서서 피해자를 다독이며

한 번쯤 속여 본 것들이 손을 잡으면 세상이 되는 거라고

반신이 움직이지 않는 방에서도 부활하신 나의 아버지

 

살아갈수록 살아 있다는 기분이 조금씩 달라져요

살아 있다는 건 함정에 빠졌다는 것

살아 있다는 건 함정에서 빠져나왔다는 것

그리고 이제 그 어느 쪽이어도 상관이 없어졌다는 것

당신으로 가려진 세상은 더 크고 더 넓어서

넘어져도 일어날 데가 많았대요 떨어져도 기어오를 데가 많았대요

 

죽은 것과 다름없는 당신의 장지에서 가장 멀리 도망쳤을 때

냉장고 위에서 아버지만 기다리던 바나나 한 손

지금은 정말 보기만 해도 토할 것 같아요, 라며

복숭아맛과 자두맛과 사과맛을 합친 오묘했던 노란 손을 다시 잡아요

손이 많은 아버지

안개만 먹고 자란 아이들은 기일을 기억하느라 생일을 잊었어요

노을이 뒷짐을 지면 하루를 여의던 그때 조금씩 눈치챘어요

안개와 아버지가 한 몸이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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