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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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제4시집
2025.05.17 12:52

시집 해설_김학중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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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란 시집 해설>

그러나 시는 이주하지 않았다

 

 

김학중(시인)

 

1. 회상의 리듬으로 경계를 횡단하기

 

시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 질문은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우리에게 환기한다. 시는 우리에게 이미지로 도래하지만 이미지의 기원은 어디에도 없다는 듯 시는 이미지 자체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 이미지는 낯설지만 동시에 그 낯설음 속에 새로운 리듬을 우리에게 전한다. 그 리듬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경계 바깥에서 우리를 넘어서 다가오는 이미지들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 우리 안에 우리 자신의 이미지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지금 여기의 자신과 분리불가능한 자신의 이미지이다. 시는 이미지를 창조하면서 우리를 변화시키면서 과거와 미래의 이미지를 지금 여기의 이미지로 결집한다. 이때 우리가 마주하는 자신의 이미지를 옥타비오 파스는 인간은 자신의 이미지라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상실하면서도 회복하면서 이미지가 회상하는 것에 의해 주어진다. 여기에 이르면 시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회상을 통해 시가 여기로 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는 그렇게 리듬에서 온다.

이월란 시인은 시적 리듬의 지평을 이주의 경험 속에서, 상실하면서 회복하는 모어의 상상력 속에서 넓혀 왔다. 2009년 계간  [서시]로 등단한 이래, 첫 시집 모놀로그]에서부터 이번에 묶은 다섯 번째 시집 [바늘을 잃어버렸다]에 이르는 시적 여정은 이러한 지평의 확장을 추구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오세영이 시집 [흔들리는 집]의 서문에서 이월란의 시는 매우 다이나믹하면서도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평을 한 것이나 임헌영의 해설에서 모하비 사막의 양귀비나 선인장처럼 그녀의 시는 무공해의 산물이라고 평한 것도 그렇고, [오래된 단서]의 해설에서 유성호가 “‘시간 예술로서의 서정시의 속성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사유와 감각의 도록을 보여주면서 “‘죽은 말들을 넘어 모어의 신비에 다다르는 과정을 섬세하게 보여준다는 평을 한 것은, 이러한 이월란의 시적 여정에 대한 조망에서 나온 평이었다.

이월란의 신작시집인 [바늘을 잃어버렸다]에서는 기존의 작업을 확장하면서 새로운 주제들을 들여오고 있다. 이는 1988년 이월란이 도미하여 유타에서 시적 작업을 이어온 이래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변화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판단된다. 우선 그녀가 사는 미국에서 그 어느 때보다 이주의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하고 그에 대한 갈등이 첨예화되어 왔기 때문이다. [오래된 단서]2016년에 발간된 것을 감안해 보면,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과 더불어 미국 내에서 첨예화된 외국인 혐오문화 등이 시기가 신작시집의 시편들에 영향을 주었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더불어 전대미문의 팬데믹이 세계를 휩쓸었다. 팬데믹 이후 아시아인 혐오범죄로 인해 아시아인들이 폭행을 당하거나 심하면 목숨을 잃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그와 더불어 2016년 전 세계적 미투 운동 이후 페미니즘의 확장을 통해 이주민 여성이 겪어왔던 차별과 고통에 대한 조망이 나타났다. 아시안 여성 디아스포라를 다룬 [파친코]나 [미나리]가 미국에서 주목을 받았던 것은 이를 반증한다. 이러한 변화들은 이월란의 시적 여정에서 우리의 이미지 속에 각인된 다양한 경계들을 주목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월란의 시에서 이제 이주, 여성, 경계 등은 기존에 비해 더욱 첨예하게 다루어야 하는 이미지들을 이끌어 온다. 기존의 시편들에 기저에 놓인 모어의 신비에 대한 탐구에서 벗어나 모어의 경계 바깥에서 발화하는 이미지들의 도래를 따라간다. 도래하는 이미지들은 경계를 무화하며 횡단한다. 이러한 시적 여정은 그리하여 이월란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다른 여러 인간의 이미지들로 우리 앞에 도착한다. 그것은 우리 존재를 지금 여기를 넘어선 다른 존재로 이끌며 그것을 통해 존재의 근본적인 회복의 가능성을 연다. 회상의 리듬은 이전보다 더 큰 울림으로 우리를 먼 곳까지 보내는 것이다. 이제 이월란이 우리 앞에 도래시킨 다섯 번째 시적 여정을 따라가 보자.

 

2. 경계의 투명성

 

이주자는 경계를 넘어왔다. 자신이 태어난 땅을 떠나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온 이들은 새로운 땅에서 터를 잡고 뿌리내리려고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이주자의 내면 속으로 자신이 넘어온 경계가 침범해온다. 경계는 이미 넘어온 것이고 우리 내면 바깥에 있는 것이라고 인식하지만 놀랍게도 경계는 이주자들을 재현하는 지평으로 남는다. 이주자는 이러한 경계로 자신들이 다가왔으며 그 경계들이 자신을 침범해오는 것을 느끼면서 비로소 이주를 감지한다.

이때의 경계는 매우 다양한 차원을 지닌 것이다. 이주자들은 그들이 넘어온 경계인 국경을 우선적으로 인식하지만 그것은 그들인 넘어온 경계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인종, 젠더, 문화적 차이 등도 경계다. 이러한 여러 다른 경계들은 이주자들은 이주하고서야 비로소 마주하게 된다. 한국인 이주자의 경우는 이것이 더욱 크게 다가올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은 무의식적으로 동일성의 세계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든다면, 일기예보를 들 수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라온 사람들은 일기예보에서 전국이 맑다거나 전국이 흐리고 비가 온다는 등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자랐다. 그러나 미국과 같은 국가들은 전국의 날씨가 똑같을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미국 같은 나라가 전국이 똑같은 날씨라면 그것은 기상이변이나 다름없다. 미국인들은 그런 까닭에 무의식적으로 차이와 다름의 경계들을 마주하고 산다. 경계를 마주하는 일들은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이주자들의 경우, 익숙하지 않은 이러한 경계들 앞에 놓이는 것을 통해 이전에는 감지하지 못한 자기의 이미지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경계의 침범으로도 느껴질 수 있다. 이월란은 이를 예리하게 감지한다.

시인에게 경계는 끝없이 우리를 구분하면서 동시에 우리를 뒤섞는다. “피는 영원히 이기적이다 퍼스트 네임을 주고받으며 섞이기 좋은 사람들끼리 기대는 척 서로를 빨아 마신다 손끝을 찔러 내피를 먹는다 다시 살아난 동명이인, 타인의 피가 흐른다”(혼혈)라고 노래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경계는 우리의 내부를 흐르면서도 타자적인 지평을 환기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타자적 경계는 우리에게 투명한 듯 보이면서도 불확실한 지평을 환기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리벽처럼 만질 수 없는 닿을 수 없는 그 너머가 훤히 보인다는 건 쫓기거나 헤매다 튕겨 나온 흉몽”(Re: 새벽)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경계는 투명하면서도 주체를 그 투명성으로 내몰고, 바로 그런 이유로 타자에게 투명하게 노출될 폭력적인 상황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계의 투명성은 주체 안의 타자성을 환기하면서 바깥의 타자성도 환기한다. 이 조우는 내가 묻고 네가 대답하면 내가 되는 오늘/어제의 끝말이 치매에 걸렸습니다”(조우)와 같이 이주자인 주체들에게 충격을 가한다. 이러한 경계에 대한 시적 통찰은 안드레 듀브스 3세의 소설 제목을 차용한 모래와 안개의 집에 집약적으로 잘 나타나고 있다.

 

주소를 발설하는 순간

 

솔솔 흘러내리거나 뿌옇게 모였다 흩어지는

 

속이 훤히 비치는 여름옷 같은 곳이었을까요

투명한 리빙박스 같은 곳이었을까요 우리가 꿈꾸던 그곳은

 

집이 없는 동네에서 태어나는 악몽을 꾼 뒤

 

이방인이 되지 않기 위해선 지붕과 벽이 필요하다고

나눠가질 수 없는 땅 위에 각자의 집을 지으면

뾰족한 지붕 위에서도 터를 닦는다고

 

돌아가고 싶은 곳이 어디일 줄 알고 사람들은 집을 지을까요

 

흘러내리는 것을 움켜쥐는 순간과

흩어지는 것을 다시 모으는 사이

 

여자는 투명이 더 투명해질 때까지 창을 닦고

남자는 날아오다 부딪힌 새의 사체를 쓸어 담는 곳이라고

 

종일 잡초를 뽑다 허리를 편 순간

정갈한 정원이 아닌 뽑혀 나간 잡초였음을 들키지 않게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가 서로를 가두는 곳이라고

 

이 집에 살다 간 사람들을 닮아가는 걸까요

그들이 떠나간 곳을 알 수 없으므로

 

여긴 따뜻한 곳이야

여긴 무성한 곳이야

 

벼룻집 같은 어둠이 칸칸이 쌓이는 방 하나쯤 어느 집에나 있다고

거짓에 변명을 조금씩 개어 쌓아 올리다 보면

손바닥만 한 경첩으로도 언제든 열리고 닫히는 기억의 문

그럴수록 거대한 진실처럼 떠억 버텨주는 것이라는데요

 

빈터만 보면 뿌리 내리는 습성으로

어제의 옆집으로 이사 온 뒤

허물어진 귀퉁이로 들려오는 모래와 안개의 웃음소리

 

―「모래와 안개의 집전문

 

안드레 듀브스 3세의 소설 [모래와 안개의 집]은 집 한 채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선주자와 이주자의 갈등을 첨예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작품성과 대중성이 좋아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시에서는 선주자가 이주자의 갈등보다는 이주자가 이주지에서 겪는 심리적인 불안에 초점을 둔다. 이주자는 집이 없는 동네에서 태어나는 악몽을 꾼. 집이 없다는 것은 이주자에게 공포이자 불안이다. 이주자로서 이미 이방인인데, 이주의 실패를 환기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방인이 되지 않기 위해선 지붕과 벽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집을 짓고 들어가 산다.

문제는 이렇게 획득한 주소도 이주자에게 어떤 안정적인 토대도 제공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이주자 주체도 알고 있다. “주소를 발설하는 순간//솔솔 흘러내리거나 뿌옇게 모였다 흩어진다고 토로하는 것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그러기에 집을 가꾸기 위해 이주자 가족이 여자는 투명이 더 투명해질 때까지 창을 닦고/남자는 날아오다 부딪힌 새의 사체를 쓸어 담는행위들을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주체는 집을 획득하는 것을 통해서 집을 종일 잡초를 뽑다 허리를 편 순간/정갈한 정원이 아닌 뽑혀 나간 잡초였음을 들키지 않게/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가 서로를 가두는 곳으로 뒤바꾸기 때문이다. 이주자의 거주지는 이미 경계의 투명성에 침범당했다. 아무리 가리려고 해도 이주자들의 생활 그 자체가 그들이 터전 삼은 곳에서 더욱 경계를 뚜렷하게 만든다. “빈터만 보면 뿌리 내리는 습성으로/어제의 옆집으로 이사왔지만 허물어진 귀퉁이로 들려오는 모래와 안개의 웃음소리의 침범은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경계의 투명성은 이렇듯 이주자가 자신을 지탱하려고 스스로 구축하는 경계를 무화하면서 동시에 경계를 뚜렷하게 가시화한다. 그들은 경계에 침범되고 노출되었다. 그래서 이주자 주체는 모래와 안개에 둘러싸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모래와 안개는 일견 경계의 투명성을 흐리게 만드는 것으로 읽힐 여지를 주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이주자 주체가 자신을 외부로부터 지키려는 경계의 투명성으로 인해 무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경계는 뚜렷하게 우리 앞에 나타난다. 이것이 경계의 투명성이다. 이러한 투명성 앞에서 주체는 늘 문을 열고 나가는 세상은/출입국관리소처럼 매일 태생지와 행선지를 묻는다”(공항 가는 길)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아래의 시에서 오고 가는 피클볼처럼 경계의 투명성에 저항할수록 오히려 경계를 깨우게 된다.

 

통통 걸어가던 피클볼이 꿈틀, 경계를 깨워요 체크무늬 셔츠가 배를 깔고 누워 있어요 겨우 생겨난 구석의 그늘을 하루 쓰고 버리는 일회용 지옥처럼 부둥켜안고 있어요 홈리스적인 침묵이 시체스러워요 부피를 버린 나뭇잎처럼 전혀 입체적이지 않아요 바람 불면 날아가겠죠 발끝에 피어 있는 꽃은 더욱 보들레르적이구요 보이는 실체보다 그의 알리바이가 궁금해진 건 순전히 하나의 공원에 온 탓이에요

 

―「두 개의 공원부분

 

여기서 경계는 하나의 공원을 이분한다. 외관상 공원 피클볼 코트의 모습을 통해 나타나는 경계의 양분화가 나타난다. 피클볼은 탁구와 테니스를 혼합한 스포츠인데, 조금 큰 사이즈의 탁구채로 테니스처럼 공을 쳐 넘기는 운동이라고 한다. 여기서 양분화된 코트는 경계의 양분화를 상징한다. 또한 피클볼 경기를 통해 공이 오가는 랠리는 경계를 거부하고자 하는 행위의 연속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경계의 양분화를 강화한다. 그 과정을 통해 공은 경계를 깨우고 그 경계를 오고 가면서 하나의 공원을 두 개로 양분한다. 이러한 양분은 우리로 하여금 이주의 근본적인 문제적 지평을 환기한다. “돌아가고 싶은 곳이 어디일 줄 알고 사람들은 집을 지을까요”(모래와 안개의 집)라는 질문 앞에 우리를 세우는 것이다.

이 질문이 근본적인 이유는 회상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근원적 회귀를 환기할 때 경계의 투명성은 경계의 근원지를 잃게 된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서 흘러나오는 회귀의 가능성은 존재의 근원적 돌아가기를 환기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숙고한 존재의 근원적 회귀인 죽음앞에서 경계는 어떠한 침범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월란의 시는 파스가 말한 시는 존재로 돌아가기이다란 것을 반복하는 것을 통해 경계의 투명성을 넘어설 가능성을 환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돌아감의 가능성은 어디에서 열리는가? 그것은 여성이자 어머니인 존재를 통해서 열린다고 이월란은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이월란에서 다름 아닌 시적 진실이다. 진실은 늘 프레임 밖”(시간을 베끼다)에 있는 것이므로.

 

3. 여자, 엄마, 짐승, 경계의 무화로 회귀하는 존재

 

우리를 진실 앞으로, 회상을 통한 근원적 회귀의 가능성으로 이끄는 것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이러한 가능성이 왜 이주자 주체에게 회복되어야 할 것인지 다시 한번 짚어야 한다. 이주자 주체는 경계의 투명성 앞에 이주자로 드러난다. 선주민과 이주민 사이에서 차이는 반복되며 더 큰 차이로 부각된다. 세대를 거쳐 이주자 주체는 더욱 경계의 투명성에 의해 고통받는 것이다. 미국과 같이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에서도 이주민에 대한 배타적인 혐오정서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이주자 주체에게 경계의 투명성이 얼마나 벗어나기 어려운 차원의 문제인지 알 수 있다.

이월란은 이러한 경계의 지평이 세대를 거쳐 이주자 주체를 침범하고 있음을 우리 앞에 현시한다. 더욱 문제적인 지점은 이러한 경계의 문제를 이주자가 내면화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경계의 투명성은 이주자들에게 일상으로 다가오며 이 일상성으로 인해서 우리의 내부 깊이 파고든다. 그것이 우리에게 각인한 것은 얼룩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인 얼룩은 이주자를 인간과 짐승의 경계로까지 밀어낸다.

 

얼룩을 지우는 일에 이력이 나고도 여자는

반점들을 하나하나 헤아려보았다

묻었거나 스며든 일상은 문신처럼 살이 되었다

젖었던 곳일수록 더욱 진했다

 

말라붙은 껌딱지에 문지르던 얼음조각을 문질러도 보았다

시린 곳이 차츰 얼어붙고 있었다

들키지 않으려 돋아나는 소름

 

……(중략)……

 

고양이나 말이 되어 뛰쳐나가기도 하는 외계의 짐승

길들지 않는 야생의 흔적이다

 

생존본능에 눈이 감긴 떠도는 점들이 안착하기 좋은 곳은

어둠이 태어나는 깊고 깊은 자궁

숨기는 것들은 섬세한 얼룩으로 다시 태어나고

 

……(중략)……

 

얼룩무늬 아이가 태어났다

얼룩을 중심으로 여백이 되어가는 아이

아이가 점점 지워지고 있었다

 

한 번도 자신의 알몸을 비춰보지 못한 거울 속에서

엄마가 울고 있었다

나쁜 것은 모두 당신에게서 비롯되었지

엄마의 얼굴이 미소로 바뀌었다

꼭 너 같은 딸을 낳았구나

 

―「얼룩무늬 아이가 태어났다부분

 

이 시는 얼룩을 지닌 아이가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 여자얼룩을 지우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그것은 그녀에게 일상의 수준에 이르렀다. 그만큼 얼룩은 지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얼룩짐승의 것이며 야생의 흔적이다. 그런 점에서 얼룩은 이 시의 주체인 여자짐승의 차원으로까지 밀어내는 경계이다.

이 경계는 투명하지만 주체에게 치명적인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인 얼룩은 주체와 분리될 수 없는 차원에 기입되며 주체에게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다음 세대로 전이될 수 있는 수준의 내부까지 침식한다. “얼룩은 주체의 내부 깊숙한 곳, 어둠이 태어나는 깊고 깊은 자궁에서 자라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얼룩무늬 아이는 그렇게 하여 주체 앞에 태어난다. 아이는 그런데 단순히 얼룩을 재현하는 존재로 나타나지 않는다. “얼룩을 중심으로 여백이 되어가는 것이 얼룩무늬 아이이며 이러한 운동을 통해 아이가 점점 지워지고 있. 이를 통해 우리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지닌 얼룩이 경계의 투명성이 보여주는 이중적인 운동을 반복적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자의 내부로 파고든 경계는 다음 세대의 주체적 차원까지도 침입하여 그것을 훼손하고 있다.

얼룩에 의한 이주민 주체의 침식은 다음 세대의 주체에까지 짐승의 차원을 전이시킨다. 이 차원은 머리에 뿔이 돋은 건 아주 오래된 일이었다. 소가 될까 사슴이 될까 뾰족한 수가 없을 때마다 두 손으로 뿔을 감싸 쥐고 내달리곤 했다. 머리를 숙일 때마다 누군가를 들이받을 것만 같았다”(다섯 가지 비밀)와 같은 진술에서 압축적으로 나타난다. 이주민 주체에게 세대를 거쳐 이어진 경계의 투명성은 짐승의 차원으로 주체를 내몰면서도 동시에 짐승의 차원이 지닌 저항의 지평도 연다. 경계의 투명성은 이주자 주체를 차이의 재현 앞에 세우는 것을 넘어 구조적 차원의 차별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주체는 짐승의 차원을 거부하지 않고 그것을 끌어안는 것을 통해 이주자들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문화적 기표들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환기한다.

이월란은 작업은 이러한 짐승의 차원이 지닌 저항의 가능성을 더욱 확장하여 경계의 투명성 바깥을 우리 앞에 도래시키고자 한다. 경계의 투명성이 무화되는 지평 그곳은 다름 아닌 짐승이 출몰하는 지평이다. 그것은 주체가 근원적으로 마주해야 할 자연이다. 이월란은 이러한 지평을 여는 힘을 여성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여성주체는 이월란이 시를 통해 도래시킨 이미지이다. 여성주체는 경계의 투명성을 다음 세대로 전이시킨 주체이자 그것을 무화시킬 가능성을 다음 세대의 여성에게 전달한 주체로 나타난다. 그러한 여성은 사전에 어떤 알림도 없이 경계를 무화하며 출몰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여성이 출몰하는 지평은 근본적인 자연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이 차원은 그렇게 주체에 갑자기 도래하며 그 충격을 통해 경계의 투명성을 무너뜨린다. 이것은 주체의 마주함을 통해 우리 앞에 나타나며, 우리가 마주하려 하지 않아도 우리를 돌려세운다. 그러한 힘은 다름 아닌 이미지의 회상이다.

 

겨울 한가운데였을 것이다

완성된 풍경화 가운데 떨어진 나뭇빛 짐승 한 마리

창 너머 셀폰 터지는 소리를 들었을까

안개꽃 문신이 사향내를 뿌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갑자기 나타나는 것들이 있다

읽다 만 책 속에 끼워둔 북마크 같다

먹이처럼 삼켜지는 줄거리 없는 흉몽 한 입

죽은 엄마의 두 발, 수치스러웠던 대문, 부끄러웠던 운동장, 놓쳐버린 비행기, 올려다보던 하늘에서 떨어지던 눈물, 자꾸만 꺼지던 땅, 멀어질수록 가까워지는 얼굴

 

……(중략)……

 

미세한 거짓이 쌓여 단단한 진실이 되는 걸 보았다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돈을 모으던 엄마가 죽었을 때

그녀마저 비로소 거짓이 되었다

이 많은 진실들이 단 하나의 거짓을 향하고 있다면

곧 사라질 저 사슴 한 마리는

 

기억의 협곡을 헤치고 왔을 것이다

거짓의 영역에 뛰어든 진실처럼 당당하다

믿고 싶었던 헛소문처럼 빼앗긴 들판에 뛰어든 봄처럼

홀로 떠도는 응시

먼 것이 다녀간 뒤 바람의 방향이 바뀌곤 했다

 

사슴 발자국 위에 집을 짓고 문을 잠근 뒤

손에 들고 있던 마지막 경계

두 손을 모으면 기도가 되는 나이가 되어서도

휘저어도 끊어지지 않던 알끈 같은 묘한 당김으로

 

칼끝에서 벌어지는 사과 같은 시간

아삭아삭 풀밭을 거닐고 있다

벨벳을 다 긁어먹고도 배가 고픈 큰 눈망울이 두리번거린다

사슴피를 마시고 사슴이 되었다는 시름시름 앓던 아이 같기도

사자의 뱃속에서 꿈틀 다시 살아난 꿈같기도 해서

외래종이 되어

사슴 앞에 다시 나타난 나를 돌려세운다

 

―「사슴이 온다부분

 

이 시에 나타난 사슴여성주체의 현신이며 새로운 여성의 이미지이다. 여기서 사슴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나타난다. 이 도래를 통해 주체는 죽은 엄마의 두 발, 수치스러웠던 대문, 부끄러웠던 운동장, 놓쳐버린 비행기, 올려다보던 하늘에서 떨어지던 눈물, 자꾸만 꺼지던 땅, 멀어질수록 가까워지는 얼굴을 회상하게 된다. 이 회상을 통해 주체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엄마. “미세한 거짓이 쌓여 단단한 진실이 되는 걸 보았다/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돈을 모으던 엄마가 죽었을 때/그녀마저 비로소 거짓이 되었다는 진술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엄마는 존재 그 자체가 부정당하는 경계에 놓여 있었다. 그러기에 주체는 만약 엄마에게 일어난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곧 사라질 저 사슴 한 마리라고 진술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회상은 주체를 근원적 회귀로 이끈다. 왜냐하면 사슴 발자국 위에 집을 짓고 문을 잠근 뒤/손에 들고 있던 마지막 경계를 보았기 때문이다. “사슴은 이 경계다 긁어먹고도 배가 고픈 큰 눈망울을 지닌 존재로 주체 앞에 서 있다. 그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라서, 경계가 무화되었다는 것을 두드러지게 환기하지도 않는다. 그러기에 사슴다시 나를 돌려세운.

 

4. 희생양, 다크 투어리즘

 

이번 신작시집에 실린 이월란의 시편들은 앞서 살펴본 이미지의 근원적 회상을 통해 이주민의 겪어온 차별과 배제의 고통을 새로운 지평에서 환기한다. 선주민과 이주민 사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경계의 투명성을 통해 여러 각도로 조망했다. 경계의 투명성은 일종의 상징 폭력으로 이주민 주체의 일상마저 굴절시키는 얼룩으로 작동했다. 더 나아가 이주민 주체가 겪은 차별과 배제의 고통이 주체 내부의 가장 깊은 차원에까지 각인된 문제이며, 이 문제가 세대를 걸쳐 다양한 지평에서 변화하면서 이주민 주체를 침범해왔음을 노래했다. 이를 통해 이월란은 우리 앞에 새로운 이주민 주체의 이미지를 선사한다. 그것은 이월란이 새롭게 도래시킨 인간의 이미지이다.

이렇게 도래시킨 인간의 이미지 중에서 이월란은 여성과 짐승에 집중했다. 이월란에게 있어서 여성과 짐승은 서로 구분되는 지평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분리불가능한 지평에 놓여 있다. 여성과 짐승의 이미지의 겹침은 이주민 주체가 경계의 투명성에 의해 훼손된 것으로 인해 추동되어 나왔지만 단순히 그러한 이미지의 돌출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월란은 이 두 이미지가 경계성을 무화하는 주체의 서로 다른 버전의 이미지이며 여러 세대를 걸쳐서 비로소 이주자 주체 앞에 도래했음을 노래했다. 이 주체가 열어놓은 저항의 가능성은 경계의 투명성이 기반한 인간적 차원에 대한 근본적인 회상을 열어놓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발자국에서 자신들의 거주지를 건설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지평을 인간이 잊었기에 인간은 경계를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영토에 기입해 왔다. 자연이 지닌 근원적 지점에서 인간적 차원은 이때 한계를 마주한다.

자연은 인간이 세운 경계를 어떠한 예고도 없이 무화시키며 출몰한다. 이월란에게 이러한 경계의 무화를 추동하는 것이 바로 여성이며 짐승인 주체다. 이러한 주체는 우리가 돌아서고 외면하려고 하더라도 다시 우리를 돌려세운다. 그리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자연의 지평에서 이주는 불가능성을 환기할 뿐이라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근본성이 지닌 특성이다. 또한 이것이 바로 회상이 우리에게 돌려주는 가능성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이월란의 시적 여정을 통해 성취한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감지할 수 있다.

시는 이주의 불가능성을 우리에게 환기하는 것이다. 시적 지평에서 새롭게 도래된 인간의 이미지인 여성이자 짐승인 주체의 이미지는 우리가 근거하고 지평에서 이주는 없었다는 것을 가시화한다. 그러니까 시는 이주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월란 시의 성취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월란은 여기에 도착하기까지 경계의 투명성이 일으킨 다양한 문제적 지평을 경유하였는데, 그것은 이월란에 따르면 일종의 다크 투어리즘이다. 경계의 상징폭력이 이주민 주체에 낳은 여러 다른 차원의 폭력성들을 드러내면서 그것을 넘어설 지평을 가시화하기 위해 시적 여정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이월란은 이주자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선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상징 폭력뿐 아니라 이주자와 이주자 사이에 일어난 상징 폭력까지 주목한다. <스케이프 고트> 연작들이 대표적이다.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월란은 한 발 더 나아간다. 지금 여기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곳에서 팬데믹이 일으킨 사후 효과로 경계의 투명성이 새로운 버전의 상징 폭력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묶어 낸 신작시집은 이 과정을 이어나가는 과정에서 엮은 일종의 누빔점이다.

이월란은 이미지 회상은 이후로도 이어질 것이다. 우리도 이 여정의 중심으로 따라가면 이월란의 시를 읽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월란이 시적으로 여는 순간순간에, 우리에게 펼쳐 놓는 아름다운 시 세계의 묘미를 경험할 필요가 있다. 그 경험을 통해 우리가 마주한 폭력적 세계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는 그렇게 우리 앞에 열려 있다. 마지막으로 이월란이 초대하는 다크 투어리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를 읽어보길 권하며 글을 마친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그대로인데

서로에게 바이러스가 되었다

 

한 걸음 두 걸음 가까워지다 폭발하는 생화학 무기

서로를 방역한다

 

어둠을 여행 중인 지구는 통째로 그라운드 제로

보이지 않는 손은 소리 없이 생체실험 중이다

 

실시간으로 바뀌는 숫자를 물고 비말처럼 흩어지는 햇살 아래

살처분하던 방호복들이 시신을 궤도 밖으로 옮기고 있다

 

독재자에 맞선 쿠데타가 일어난 듯 냉동트럭이 실어 나른 시신들이

축구장에 쌓인다는 가짜 같은 뉴스가 속보로 뜬다

 

마스크 쓴 도시의 얼굴로 사재기 당한 텅 빈 진열대를 보며

오래된 신발이 산더미처럼 쌓인 잘린 머리카락이 산더미처럼 쌓인

아우슈비츠를 떠올린다면

달 표면을 닮은 텅 빈 유령도시 체르노빌을 떠올린다면

 

마른기침이 목에 걸렸다

빛에 눈멀어 날개를 삼킨 죄

 

비행기가 뜨고 내리지 않는 활주로 같은 길을 따라 걷는다

킁킁 앞세운 강아지가 무증상의 길을 탐색한다

 

단지 비눗물에 씻겨 내려갈 뿐인 허망한 적들은

감염경로마다 성곽을 쌓는데

 

봉쇄된 국경 너머

자가격리를 마친 꽃들이 팡팡 터지기 시작했단다

 

―「다크 투어리즘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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