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유골과 함께 고국을 방문하다/수필
2020.12.05 15:23
동생의 유골과 함께 고국을 방문하다/
ㅡ(잊히지 않는 나의 여행)ㅡ
박영숙영
매년 방문을 하지 않아도 자주 한국을 방문해서 현대시문학 행사에 참석했고,
LA에서 하는 미주한국문협 행사에도 거의 매년 참석해 왔다. 올해도 1박 2일의
여름문학켐프를 끝내고 8월14일 California Yuba City에 살고 있는 동생을 보려 갔는데, 동생은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병실 안에서는 죽음이 진행되고 있는데, 창밖은 8월 한여름의 무성한 잎들은
생명을 자랑하고 있었고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창 안과 밖은 삶과 죽음이
갈리는 길이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참으로 쓸쓸하고 인생이 허무했다.
암 판정을 받은 지 6개월 만인 2011년 8월20일 55세의 젊은 나이로 사랑하는
동생 의구는 세상을 떠났다. 좋은 건강 보험을 가지고 있으면서 위암 말기,
간암 말기의 판정을 받을 때까지, 아프다 말다 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참고
견디며 병원 가는 것을 미루며 살아왔던 것이 병을 키웠다.
그만큼 삶에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동생의 힘들었던 삶.
진통제와 생명선을 연결하는 줄이 동생의 마른 팔에 매달려 있었다. 중간 중간
고통에서 깨어날 때마다 동생은 벽에 걸린 시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얼마나 잠들었다 깨어났는지를 가늠하는 것 같았다. 마취제를 맞고 깨어나고
잠들기를 반복했다.
방문 2일째 아침, 동생의 복부에 찬 물을 빼고 나니 정신이 맑아져 살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병원에서 누군가가 나를 찾아와서 하는 말이 ㅡ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더 이상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생명선을 재거 하고 퇴원하면, 고통 없이 편안히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해 주겠으니 결정을 해 달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내가 누나지만, 사랑하는 동생의 생명선을 제거할 수 있는
권한은 내게 없었다. 지난날 시아버님의 생명선을 제거하고 난 후, 시누는 늘 죄책감에 오랫동안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적이 있었다. 그날 오후 한인 ”이“성씨를 가진 의사가 병실을 찾아와서 동생에게 하는 말이 ㅡ“당신은 살아날 가망이 없고, 죽을 테니 퇴원하라”ㅡ고 냉정하게 말했다. 아무리 죽음을 앞둔 환자라 할지라도 환자의
인격을 무시한, 인간성이 결여된 한인의사 “이”였다. 같은 한인으로서, 미국 이곳 Yuba City에서, 더구나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자신의 부모님이나 가족에게도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의사는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몸을 갈라 심장을 꺼내고 있는 한 마리 냉혈동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방문 3 일째 되는 날 다시 동생의 몸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통증은 극심했다. 마취의 간격이 짧아지자 자가 마취를 하라고 했다. 그러나 동생 스스로 마취주사를 놓을 정신이 없었다. 대신 마취를 해 주어도 된다고 해서 올케가 동생의 손가락을 마취버턴 위에 올려놓고 올케가 그 버턴을 눌렀다. 올케가 자리에 없을 때 고통스러워하는 동생을 보고서도, 나는 차마 그 버턴을 누를 수가 없어서 간호사를 불렀다. 마취는 고통을 없애 주는 것과 동시에 사랑하는 동생을 더 빨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방문4일째 동생이 떠난 후 사후처리를 하려면 유언장에 서명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올케가 동생의 서명을 받으려 했지만, 동생은 펜을 잡을 힘이 없었고 정신이 없어 결국 서명을 받지 못했다. 동생이 살아생전 통화를 할 때, 동생이 내게 한 말이 있었다. 자신이 세상 떠나게 되면 지금까지 봉급에서 자동 적립된 연금은 자동으로 올케에게 수령이 가게끔, 직장에 함께 가서 서류작성을 해 놓았다고 했다.
충격 때문이었을까? 왜 올케가 동생의 서명을 받으려 했는지는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방문 5일째 되는 날, 동생이 깨어나면서 목이 말랐는지 갑자기 음료수를 찾기 시작했다. 무심코 침대 옆에 세워진 스탠드에 선들을 보니 마취선 하나만 연결이 되어있고 나머지 영양분이 덜어가는 선은 정지되어 있었다. 누가 저것을 멈추게 했냐고 물으니, 올케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제 저녁 의사가 그랬다고 말했다. 나는 의사가 했다는 말에 무심히 그 말을 그냥 흘러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의사가 올케의 동의를 얻고 의사가 그 영양분이 투여되는 생명선을 멈추게 했던 것 같았다. 아무리 의사라도 결코 가족의 동의 없이 살아있는 환자의 생명선을 끊는다면 그것은 의사가 환자를 살인하게 되는 것이라 법적인 문제가 발생하는데 분명 올케의 동의 없이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올케는 왜 동생의 딸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의사의 말에 동의했을까? 동생의 딸은 뉴욕에서 켈리포니아로 오다가 태풍관계로 비행기가 지연되어 빨리 올 수 없었다.
방문 6일째 동생은 더 깊은 잠 속에 빠져 있는 것 같았고 심장과 혈압은 장거리를 달리고 있는 마라톤선수인양 가슴이 답답하도록 숨차 보였다.
방문 7일째 아침에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사랑하는 동생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실에 도착하고 보니 동생은 햐안 천으로 덮여 있었다. 내가 덜어 서니 동생과 함께 있던 호스피스 간호사가 동생의 안구를 기증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동생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다고 말했다. 올케는 퇴원 수속을 밟으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장례식 날에는 200명이 넘는 직장동료들이 참석해 세상 떠나는 동생의 마지막 길을 애도 해 주었다. 동생은 화장을 했다. 동생의 딸에게는 작은 십자가 속에 유골을 넣을 수 있는 금목걸이를 남편이 사서 주었다. 그리고 나는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동생을 부모님 곁으로 보내주기 위해 조그만 대리석 병에 사랑하는 동생의 유골을 담아 Texas Sugar Land 내가 사는 곳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동생을 우리 집 응접실 벽난로위에 앉혀 놓았다.
2012년 9월 제 78차 세계한글국제펜대회에 참가하게 되면서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벽난로위에 앉혀 두었던 동생의 유골 병을 핸드백 속에 넣고, 한국 행 비행기를 타개되었다. 태평양 상공을 비행하는 긴 시간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미국에서30년의 세월을 살아온 사랑하는 동생의 힘들었던 삶과 내가 미국에서 살아왔던 삶이 겹쳐져 생각났다. 가슴 벽을 긁으며 목까지 차오르는 슬픔을 참을 수가 없었다. 뜨거운 슬픔이 용암처럼 가슴에서 끓고 있었지만.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깨문 입술사이로 피가 흘렀고 입술은 부풀어 올랐다.
.1980년대 초 이민 와서 살아 보려고, 언어도, 문화도, 음식도 다른 낯선 땅에서
살아보려고, 근면성실 하나만을 밑천삼아 다섯 아이의 양육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Calpine Corporation 전기회사 현장 기술자로 근무하면서 동료들의 잔업까지 받아서 시간이외 근무를 했다. 외국인들만 일하는 직장에서, 삶에서 일어나는 스트레스도, 가정불화도 외로움도, 그리움도, 그 모든 것을 가슴속에 묻고, 묵묵히 최선을 다하며 일했다. 책임감이 강했던 사랑했던 동생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보지도 못하고, 남의 인생만 살아주다가 세상 떠난 동생이 너무나 가슴 아파서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는 한인들이 집에서 사용하던 기계가 고장 나서 동생에게 부탁하면 동생은 바쁜 중에도 봉사정신으로 고장 난 물품들을 고쳐 주었다.
2010년 연평도에 포격사건이 일어났을 때였다,
“조국이 나를 부른다면 하던 일 멈추고 조국의 전선으로 달려가겠다.”고 말하던
뜨거운 조국애를 품고 살았던 내 사랑하는 동생.
동생은 내게 있어 그리운 부모님이었고,
내 아픔 감싸주는 핏줄이었으며,
나를 이해해주는 다정한 친구였고,
외로울 때 내가 기댈 수 있는 기둥이었다.
그리고 동생은, 잃어버린 고향이었다.
아마도 내가 동생에게 심적으로 많이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생의 빈자리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생각들이 잠을 어지럽혀서 뜬 눈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했고 용산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아침 일찍 서울 역으로 갔다. 많은 작가들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3박4일 국제펜대회가 끝나는 날 아침, 나는 La에서 온 ‘안‘시인과 함께 제주도에서 있을 ‘전’시인의 시비 제막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경주 호텔에서 부산비행장까지
택시로 갔다. 제주 공항에 마중 나와서 기다리겠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우도 가는 부두까지 택시로 갔고 그곳에서 우도 가는 배표를 사려고 했을 때
지금 태풍 ”삼바”가 북상하고 있으니, 오늘 되돌아 나오지 않으면 어쩜 우도에서 발이 묶일지도 모른다고 매표원이 말했다. 태풍으로 인해 우도에서 며칠 발이 묶이게 된다면 내 여행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이다. 더욱이 내 핸드백 속에 있는 동생의 유골을 도로 미국으로 가져와야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우도에서 시비 제막식이 끝나고 곧 바로 오후 5시 마지막 배를 타고 나왔다.
제주공항에서 서울로 오는 마지막비행기를 타고 12시가 넘어서 용산 호텔에
도착하여 방을 예약을 하려 했지만 주말이라 방이 없다고 했다. 어디 가서 오늘 밤을 지내야 할지 난감했다. 마침 택시 기사가 자기가 아는 곳이 한곳에 있다고 안내해 주었다. 모텔에 도착하니 후진 구석방이 이었지만 다행이었다. 태풍 “삼바”가 북상한다는 뉴스를 듣다가 잠이 들었나 보다. 새벽 일찍 깨여서 모텔주인에게 사정을 해서 보관비를 주고, 짐 가방을 맞기고 포항 고속버스 터미널로 갔다.
마음이 급해서였을까? 돈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포항 가는
버스를 탔다. 포항에 도착하고 보니, 내 수중에는 2만원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어제 택시비로 너무 많은 돈을 길거리에 뿌리고 다녔나 보다. 공원 묘를 가야할
택시비, 그리고 포항에서 진해로 가서, 친구를 만나고 머물러 야할 차비와 모텔비 그리고 진해에서 서울로 가야할 차비가 내게는 없었다. 토요일이라 은행도 문을
닫았고, 어디에서 돈을 환전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순간”, 아버님이 떠올랐다. 1976년 당시 아버님은 큰아들과 합가하여 포항에 살았다. 60평생을 고향 땅 진해에서 살다가 포항에 와서 보니, 포항은 마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삭막한 모래벌판 이었다. 갈 곳도, 친구도, 없었다.
뻥튀긴 경제로 핵가족이 되어버린 세상. 부모님의 밥상은 따로 차려져 방안에 넣어 주었다. 부모님은 무인도에 갇힌 투명 인간이 되었다. 자식과 대화할 수 없는 창살 없는 감옥살이에서 아버님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70년대 당시에는 노인회관도 없었으니 타향 땅 포항에서 아버님은 사람정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어쩌다가 생긴 돈 천원을 가지고 아버님은 고향으로 가기 위해 무작정 부산 가는 버스를 타게 돼있으리라. 그러나 부산 종점에는, 진해가는 버스는 그곳에 없었다. 시내버스가 돌아가는 코스도 아니었고 진해가는 버스 종점을 가려면 택시를 타야 갈수 있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아마도 아버님은 거기까지 갈 돈이 없었 어리라.
서울 딸집에 다니러 갔던 어머님이 포항 내려와서 3일 동안 포항 안에서 아버님을 찾아 헤매다가 부산 가는 버스를 탄 걸 알게 되었다. 어머님은, 아버님 사진을 들고 부산버스 종점 부근을 헤매다가 어느 노점상 아주머니가 아버님을 알아보고 소식을 전해주었다. 노점상주인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지하도 입구 앞에 아버님은 3일 동안을 앉아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제와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아버님은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삼일 동안을 한곳에 앉아서 혹시나 하고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아~~고향 진해로 가기 위해 부산까지 왔지만 돈이 모자라서 부산에서 발이 묵혀서 난감해 했을, 아버님은 어디로 가셨을까?
사랑하는 동생 의구의 유골을 가슴에 안고 아버님 생각으로 또 한 번 내 가슴에 해일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때, 내 귓가에 들리는 동생의 목소리ㅡ “누나 뭐해?”ㅡ "누나 사랑해요“ㅡ. “누나, 누나는 죽을 때 마지막으로 할 말이 무엇일 것 같아?”
하고 묻던 동생. 마지막 세상 떠나는 길에 꿈이라도 꾸었을까 엄마가 동생을 마중이라도 나왔던 것일까? 정말 동생의 마지막 말은ㅡ “엄마, 엄마”ㅡ하고 두 번 부르며 엄마 찾아 세상을 떠났다.
미국에서 포항까지 달려와서 아버님 생각, 동생 생각에, 동생의 유골을 품에 안고 대책 없이 한참을 흐느끼다 보니, 작년에 부모님을 뵈려 포항에 왔을 때 친절했던 택시 기사의 전화번호가 생각났다. 그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그분은 점심시간에 집에 점심을 먹으려 덜어 왔을 때고, 그분의 집에 두었던 돈을 환전해 주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동생 의구를 부모님 곁으로 데려 다 주고 산을 내려오려 는데, 땅에까지 닿아 있던 잿빛하늘이 나와 함께 통곡하기 시작했다.
http://mijumunhak.net/parkyongsuk/home
박영숙영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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